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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영 / 첨탑산수,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표상하는

고충환



최소영은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킨다. 거칠게 말하자면 여기서 자연은 선을 상징하고 문명은 악을 상징한다. 대비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선이며 악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의미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선을 상징하고, 그 의미는 자연스러운 존재며 순리 그대로의 존재를, 어쩜 인간의 삶이 문명화되면서 상실했을 원형적인 존재를,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 생명과 같은 하부개념을 아우른다. 그리고 여기에 대비되는 문명은 악을 상징하며, 그 의미는 억압적인 존재를, 특히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총칭한다. 

그렇게 선과 악이 대비되고,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는 작가의 그림은 어둡고 거칠다. 상실된 것(자연)이므로 어둡고, 무분별한 욕망(문명)이 거침이 없어서 거칠다. 현대판 관념산수라고 해야 할까. 보통 관념산수라고 한다면 존재가 유래하고 되돌려질 존재의 원형으로서의 자연,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서 이런 관념은 더 이상 어떠한 공명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공허한 소리가 되었다. 관념이 지향해야할 자연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 비록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이 언급되지만, 이때의 언급은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각하기보다는 다만 이런 상실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Desire, 140x150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상실감이 밀어올린 그림인 만큼 비장하고 묵시록적이다. 문명의, 특히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경고하는, 그런 암울한 비전을 예시해주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유토피아의 시대가 가고 디스토피아의 시대가 도래한,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도래한 시대감정을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과 문명을 대비시키고, 그 대비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대비로 확대 재생산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를 그린 그림 같다. 말하자면 작가의 의식 속에 등재된 장소, 비장소, 없는 장소, 없으면서 있는 장소, 그 자체가 아마도 작가의 관념(작가가 본 비전)과도 통하는, 그리고 작가의 그림을 현대판 관념산수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통하는, 그런 장소를 그린 것 같다. 

작가의 그림은 어둡고 거칠고 비장하고 묵시록적이라고 했다. 바로 상실감이 밀어올린 시대감정이며, 억압적인 문명과 무분별한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반응이다. 작가의 그림은 대개 그림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구분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형식을 취하는데, 선염으로 그려진 그림의 윗부분이 자연에, 그리고 주로 건축물과 같은 기물이 묘사되고 있는 아랫부분이 문명에 해당한다. 여기서 자연과 문명은 서로 구별되기보다는 서로에게 스미면서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다. 그렇게 중첩된 그림을 보면, 자연이며 문명 할 것 없이 온통 안개 속에 가려진 듯 희뿌옇고, 화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 같고, 녹아내리는 것 같다. 토네이도 내지 거친 광풍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진 듯 침수되고 해체되는 것 같다. 일종의 안개 속 풍경(안개 속 정국?)이며 수몰풍경으로 시대감정을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은 반영하는 실체는 없고, 반영되는 대상만 있을 뿐인, 그런 불완전한 반영으로도 표현된다. 이처럼 실체는 없고 반영만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허구적인 문명을, 문명의 허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더 공공연하게 묵시록적인 경우도 있는데, 아예 뿌리째 뽑힌 문명이 그렇다. 

작가는 그렇게 자연에 대한 상실감을 그리고 억압적인 문명을 대비시키는데, 그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매개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며 물신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을 페티시즘이라 하고 물신이라고 한다. 기왕에 물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관념이나 가치관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것마저 물질처럼 취급되고 상품화를 요구받는다. 모든 것은 상품적 가치에 의해 평가되고 저울질 된다. 그 무분별한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도 예외도 없다. 인간이 그렇고 자연도 마찬가지. 몸값을 올리는 것이 죽느냐 사느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가름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공폭포와 조화가 실제의 자연을 대신하고, 관광엽서 속 파라다이스가 자연에 대한 향수를 대리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최소영은 이런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며 상품화의 논리를 전통적인 산수에 빗대어 그린다. 일종의 욕망산수, 물신산수, 첨탑산수가 그렇다. 아마도 그 의미로 치자면 상품화된 자연을 산수에 빗대어 그렸을 욕망산수며 물신산수는 그렇다 치고, 첨탑산수는 무엇인가(여기서 물신산수며 욕망산수는 실제로 따로 그려진 것이라기보다는, 의미론적으로 첨탑산수에 반영되고, 첨탑산수로 표상되는). 울울창창한 봉우리처럼 하늘로 치솟은 첨탑이며 마천루를 그린 것이다. 원래 첨탑은 중세고딕성당의 유산으로서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하늘에 맞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욕망으로 치자면 바벨탑의 후속버전이랄 수 있고, 이때의 욕망은 신을 향한 욕망, 신이 되고 싶은 욕망, 형이상학적 욕망이었다. 그래봤자 무분별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여하튼. 


첨탑산수, 91x117cm, mixed media on canvas, 2015

그리고 현대판 첨탑이랄 수 있는 마천루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울울창창한 봉우리와 하늘을 찌르는 첨탑이, 그리고 마천루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다. 그렇게 오버랩 된 그림은 무슨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그림 속에 욕망의 지점이며 성분들을 숨겨놓고 있는데, 무릉도원과 디즈니랜드가 그것이다. 무릉도원은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전통적인 이상향(유토피아)을 상징하고, 디즈니랜드는 자연을 가장한 물신의 욕망을 상징하고, 자연마저 상품화한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디스토피아)을 상징한다. 

그렇게 무분별한 욕망을 상징하는, 암울한 정서가 흐르는 잿빛풍경 위로 컬러풀한, 화려한, 장식적인, 번쩍번쩍 빛나는, 투명한, 삐죽삐죽한, 공격적인, 하나의 단위구조가 첩첩이 중첩되고 포개진 무더기를 이룬 형태가 대비된다. 얼핏 그 실재를 알 수 없는 이 형태들은 알고 보면 샹들리에를 추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첨탑산수와 별개를 이루는 욕망 시리즈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하나같이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표상하고 강조하기 위해 호출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물신이 각각 첨탑으로 그리고 샹들리에로 현시한(물신도 신으로 보자면 현현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로 퇴락한 면이 없지 않지만, 흔히 샹들리에는 귀족의 생활양식이며 문화를 흉내 내는 부르주아의 무분별한 욕망을 상징하며, 키치의 전형을 상징하며, 부와 권력을 상징하며, 속물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이를테면 섬세하고 장식적인 아라베스크 문양과 패턴이 직조된 커튼을 배경으로 그 위에 자리한 샹들리에가 앤티크 풍의 미적취향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런 앤티크 풍의 미적 취향은 덧없는 삶의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려는, 순간을 시간 속에 가두어 박제화하고 화석화하려는, 비록 그 종류와 경우는 다르지만 역시나 무분별한 욕망의 소산이다. 앤티크는 말하자면 시간의 오브제로 인해 물신을 획득한다. 그래서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이를테면 노스탤지어나 멜랑콜리마저도 키치의 화신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키치가 화려하면서 공격적인, 유혹적이면서 가차 없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물신의 두 얼굴을 표상한다. 

작가는 그렇게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모티브(샹들리에)와 암울한 잿빛풍경(첨탑산수)을 대비시키고, 키치와 자연, 자연과 문명이 대비되는 자본주의의, 물신의 무분별한 욕망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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