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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량 / 회화적 바이털리즘, 회화적 리비도

고충환


이태량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줄곧 존재와 사고라고 부른다. 존재와 사고는 곧잘 그림 속 여기저기에 영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도입되기도 한다. 이 정도라면 존재와 사고는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랄 만하고,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랄 만하다.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회화에서와 같이 주제가 무의미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주제는 작가의 작업을 읽게 해주는 단서 내지 키워드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존재는 살아지는 것을, 그리고 사고는 살아지는 것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한다. 각각 현상과 이해, 존재론과 인식론에 해당한다. 존재는 살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왜 수동태인가. 그건 이해며 인식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든 인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스스로 그런, 원래부터 그런, 자연이 그런 것처럼, 자연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건 자연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존재와 인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고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인식에 의하지 않고선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인식에 의하지 않고선 존재의 암흑천지에, 그 항상적인 미증유의 영토 속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존재는 인식과 상관이 없으면서, 동시에 인식이 없이 존재를 알 수가 없는 것에 딜레마가 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참이고 잠재적으로만 참이다. 그리고 화용론(말의 의미가 상황논리에 연동된다고 보는 논리)으로 치자면 상대적으로만 참이다. 그걸 불완전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그렇고, 현상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다. 


여기서 다시 존재와 사고라는 주제로 되돌아가 보면, 작가의 작업은 살아지는 것의 의미를 묻는 일이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일이며,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일이란 점에서 불완전한 일이고 불가능한 기획이다.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물음이고 기획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그 물음은 아예 무의미한 일이고 무용한 일인가. 이에 대한 해법을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찾는다.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선 침묵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형이상학과 신, 종교와 예술을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역설로 읽는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형이상학과 신, 종교와 예술, 그리고 존재와 현상과 자연과 같은. 

그렇다면 이것들에 대해선 실제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비트겐슈타인은 이것들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이미 제안해놓고 있다.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침묵이란 의미 이전의 선의미들이 웅성거리는 저장고이며, 의미화 되기를 기다리는 의미의 씨앗들이며, 미처 의식화되지 못한, 혹은 의식의 지층으로부터 밀려난 무의식의 침전물이다. 완전언어에 의해 추방된 불완전 언어며 불구의 언어들의 처소다. 그게 뭔가. 몸 언어며 몸말이다. 욕망이며 리비도다.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의식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유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욕망이며 리비도의 언어를 받아 적고 기술하는 일이다. 그래서 최근 작가의 작업에는 존재와 사고라는 주제와 함께 욕망의 변주 혹은 변주된 욕망이란 부제가 따라붙는다. 욕망이란 뭔가. 결여고 결핍이다. 결핍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직접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절실함이 없이는, 내적 필연성이 없이는 예술도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작가 식으로 번안해 보면 이렇다. 작가의 그림은 회화적 리비도(존재론적 욕망의 회화적 버전?)를 그린 것이다. 회화의 자기실현을 그린 것이다. 회화적 질료며 물질, 행위 자체 혹은 행위의 흔적이며 존재 위로 직접 솟아오르는 무엇을 그린 것이다(작가에게 존재란 아마도 질료와 물질을 매개로 한 행위 자체 혹은 행위의 흔적으로 남겨진 것이며, 바로 그 흔적이 상기하는 무엇을 의미할 것). 그 과정에서, 말하자면 회화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욕망과 침묵이 매개가 되고 상호작용한다. 여기서 외관상 욕망은 무분별한 표출을 향하고, 확장을 지향한다. 그리고 침묵은 내면을 향하고, 심화를 지향한다. 그렇게 그 운동성의 방향은 설핏 다른 곳을 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결국에는 내면적인 것이 자기표현을 얻는 것에서 침묵과 욕망은 하나로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화가 자기를 실현한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렇듯 회화가 자기를 실현해가는 와중을 그린 것이고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행을 그린 것이고 운동성(회화의 역동?)을 그린 것이다. 비록 붙박이 그림이지만, 사실은 프로세스아트를 그린 것이다. 회화의 와중과 과정을, 이행과 운동을 그린 것이다. 그렇다고 순수회화의 역동을 그린 것은 아닌 것 같고(작가는 형식주의자도 모더니스트도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작가의 그림은 꽤나 다채롭고 질박하며 은근히 서사적이다), 일종의 존재의 생리며 생태(생명?)가 전이된, 회화적 바이털리즘이라고 명명할만한 지점을 그린 것이고 현상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작가의 그림은 무분별한 낙서회화를 연상시키고, 일종의 몸 그림에 바탕을 둔 추상표현주의를 상기시킨다. 추상표현주의는 다르게는 액션페인팅이라고도 하는데, 그 말 속에 액션 곧 행위가 들어있고, 그 행위가 바로 몸의 흔적(존재의 흔적?)인 것이며, 그 흔적이 몸 그림과 통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리고,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즉흥적이고 즉발적이고(회화적 질료 위로 직접 솟아오르는) 우연적이다. 그리고 드로잉이 강하다. 작가의 그림에서 말하자면 본격적인 회화와 드로잉은 구별되지가 않는다. 드로잉과 차별되는, 그리고 그렇게 굳이 회화적 특질 내지는 완성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이 적어도 작가의 그림에는 없다. 애초에 작가의 그림은 완성(회화적 완성 혹은 완결된 어떤 지점?)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인 것이며, 그 과정이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침묵, 회화적 질료와 존재의 흔적, 회화적 행위와 존재의 간섭이 부침하는 극적 드라마인 것이며, 그 드라마에 의해 자기표현을 얻는 회화적 바이털리즘(존재의 생태학? 존재의 역동? 존재의 생명?)인 것이다. 
흡사 회화가 자기를 실현하는 장을 빌려 존재의 생리를 투사해 그린, 그런 존재의 유비(알레고리)를 주제화한 그림이라고나 할까(알다시피 작가의 시종 주제는 존재와 사고다). 이를테면 그림은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리는, 드러내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드러내는 반복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게 흡사 자기부정을 통해서 또 다른 긍정을 얻는, 말하자면 부정의 지양을 통해서 진정한 긍정을 지향하는, 그런 존재의 유비를 그린 것 같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는 딱히 완성 내지 완결이라고 볼 만한 지점이 없다고 했다(완성된 혹은 완결된 지점이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장소일 수 있고, 그건 어쩌면 회화의 무덤일 수 있다). 사실 여기서 완성은 그림 자체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의미의 완성을 의미한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분분한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노출돼 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저절로. 결국 그림의 최종적인 의미가 귀착되는 지점은 관객이며, 그림의 결정적인 의미가 도달하는 장소도 관객 쪽이다. 저자의 죽음논의(미셀 푸코와 롤랑 바르트)를 말한 것이지만, 나아가 도대체 결정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다(자크 데리다). 마치 존재의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작가의 전작을 통 털어서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페인팅과 사진, 영상과 콜라주, 인쇄물과 라인 테이프, 이미지와 텍스트, 형상미술과 서사미술(이를테면 의료봉사 현장에 동행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이며, 철암 그리기 프로젝트와 같은), 개념미술과 설치미술, 자동기술법과 행위예술(이를테면 들판에, 그리고 폐허에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과 같은 형식논리의 지점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그리고 그렇게 재배치되고 재배열되면서 또 다른 의미의 지점들을 파생시키는, 그런 형식의 실험장 같고, 의미의 실험실 같다. 이렇듯 허다한 형식의 지점들이며 의미망(의미들의 네트워크)이 흡사 존재의 난맥상을 보는 것 같고, 욕망지도를 보는 것 같다. 존재란, 사실 욕망과 동의어이고(프로이트),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욕망은, 사실 결여의 다른 이름이고,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해준다. 차이가 있다면 작가의 경우에는 성적 리비도가 아닌, 회화적 리비도가 작동하고 있을 뿐, 리비도가 존재를 증언하고 증명하는 원리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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