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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예찬, 땅의 깨달음

고충환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처음으로 건축을 테마로 한 전시가 열렸다. 삼성문화재단 50주년 기념전시를 겸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건축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조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전시를 위해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한국 전통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 10곳을 선정했다고 한다. 해인사, 불국사, 통도사, 그리고 선암사와 같은 사찰, 조선왕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면서 유교의 가부장적 가치체계를 구현하고 있는 종묘, 창덕궁과 같은 궁궐, 수원화성과 같은 성곽, 조선 성리학의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도산서원, 한국형 정원의 전형으로 알려진 소쇄원, 그리고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건축양식이 비교적 잘 보존된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선정된 장소를 보면 각각 불교로 대변되는 정신적인 관념, 유교로 대변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념, 궁궐과 성곽과 서원으로 대변되는 정치적인 관념, 정원으로 대변되는 자연적인 관념, 그리고 사대부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주요 키워드로 고려되었음을 알겠다. 다르게는 존재론적인 문제(불교), 삶의 실천의 문제(유교), 권력의 문제(정치), 그리고 자연관(정원)과 생활사(사대부)로 봐도 되겠다. 결국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이 건축양식에 그대로 스며 있다고 전제하고, 이와는 거꾸로 건축양식을 통해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이 배어나오게 하는 것에, 그럼으로써 어느 정도는 그 자체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일종의 문화적 자질 내지 유전자로 계승되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이번 전시의 목적이 있다. 


결국 관건은 건축양식에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이 실제로 어떻게 반영되고 구현되고 있느냐는 것이고, 전시를 통해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을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전통적인 가치관 자체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란 점이다. 그래서 천지인이라는 상징체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로도 전체전시를 이런 천지인이라는 상징체계에 맞춰 세 개의 카테고리로 나눴다. 그 세부를 보면, 먼저 하늘(천)의 상징적 의미를 침묵과 장엄의 세계로 형용하고, 이를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관에 결부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불교사찰과 궁궐건축 그리고 왕실의 사당인 종묘를 포함시켰다. 다음으로 땅(지)의 상징적 의미를 터의 경영과 질서의 세계로 형용하고, 지배 권력의 통치이념과 터의 경영에 결부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궁궐건축과 성곽 그리고 관아건축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 사는 세상(인)과 관련해선 서원과 정원과 민가를 하나로 엮어 삶과 어울림의 공간이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산서원과 소쇄원, 그리고 양동마을을 중심으로 사대부와 서민의 삶과 공동체가 어우러진 한국 전통건축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는 의미를 담았다. 각각 장엄(혹은 형이상학)과 권력(혹은 정치)과 관계(혹은 매개) 문제로 환원되고 압축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으로 치자면, 땅의 상징적 의미로 하여금 터의 경영과 질서의 세계를 형용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 자체는 유교의 통치이념과 윤리관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터의 의미가 예사롭지가 않다. 여기서 터는 바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바탕은 존재의 바탕을 의미하는 생명으로 소급되고, 동시에 인간의 바탕을 의미하는 도덕으로 확장된다. 그 자체가 생태학과 윤리학, 자연과 인간학(혹은 인문학)을 아우르면서 넘나드는 것인데, 보통 집을 지을 때 먼저 터를 닦는다거나 터를 다진다는 표현의 이면에는 이런 실천논리가 상징적인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터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의미부여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전통건축에는 이처럼 본에 대한, 바탕에 대한, 근본에 대한 삶의 사유며 지혜가 깃들여 있다. 전시주제에서조차 하늘과 사람을 제쳐두고 굳이 땅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 것(땅의 깨달음)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전시주최측은 전통건축이 갖는 이런 상징적 의미를 주명덕(해인사와 양동마을), 배병우(선암사와 종묘), 구본창(통도사와 소쇄원), 김재경(수원화성), 서헌강(불국사), 김도균(도산서원) 6인의 사진작가로 하여금 사진으로 기록하고 재해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11권의 사진집으로 출간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건축(전통건축)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전시를 구현하는 미디어는 사진인 셈이다. 그만큼 사진은 이번 전시에서 메인에 해당하는 주요 형식이고 매체다. 메인에 해당하는? 단순한 사진전시가 아니라 전통건축을 찍은 사진으로 처음부터 기획된 전시며, 그런 만큼 다른 부수적인 형식장치들이 사진과 더불어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단순한 아카이브 전시가 아닌 만큼 사진작가들로 하여금 미학적 개입을 허용하고 열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미학적 개입이 적극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데, 처음부터 특정 건축물을 재현하도록 한정 기획된 전시였고, 여기에 전통건축물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인덱스(사진의 자기 지시적 기호, 롤랑 바르트 식으론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미 결정화된 기호를 의미하는 스투디움)가 강해서 미학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카이브 전시라면 모르나, 현대미술로는 좀 역부족인 면이 없지 않았나 싶다. 이를테면 부드러운 벨벳 같은 질감(배병우), 마치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두드러져 보이는 사물대상의 물성(주명덕), 건물 내부에서 외부를 찍는, 그래서 원근감과 함께 흡사 무대를 보는 것 같은 시점설정(구본창), 그리고 땅의 시점에 맞춘 수평적인 사진과 같은 미학적 개입과 연출이 발견되지만, 이를 통해서 결국에는 한국 전통건축의 아우라를 캐내고 재발견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선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미를 찾아서, 와 같은 테마전시에나 어울릴 것 같은 전시가 되었다. 사진의 내용이며 수준보다는 전시자체의 개념과 관련된 문제이지 싶다. 


이번 전시는 주제가 전통건축이고, 이를 구현하는 메인 형식이 사진이라고 했다. 전시주제가 건축인 만큼 사진 이외에 이러저런 부수적인 형식장치들이 전시를 위해 도입되는데, 그 중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전통건축을 소재로 한 각종 고미술품이다. 이를테면 국보 제249호 동궐도, 경기감영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동국대지도, 한성도, 김홍도의 규장각도,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한필교의 건축도 모음집인 숙천제아도 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동궐도가 흥미로운데,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그림으로서, 전통적인 가옥이 목조인 탓에 혹 화재로 소실되더라도 원형 그대로 재건할 수 있게 했다. 요새 식으로 치자면 건축 설계도면으로 보면 되겠다. 부감법으로 그린, 그래서 흡사 미궁 혹은 미로와도 같은 그림이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표상하는 것 같다. 권력의 표상성은 두 가지가 키워든데, 하나가 위계질서고, 다른 하나가 은폐다. 누가 권력의 주체인지 알리기 위해 권력의 주체는 자신을 중심에다 설정하고, 그 중심을 중심으로 다른 주체들을 주변에다 배열하는 공간적 방식을 취한다. 배당받은 공간에 따라 계급이 결정되는 공간의 위상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는지 모르게 행사되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미로 같은 궁의 이면에는 자기를 숨기면서 드러내는 권력이,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게 동궐도는 중심성이 강한 구도(권력의 주체를 상징하는)와 함께 복잡한 세부(권력의 은폐를 상징하는)를 포함하고 있는 단순명료한 구조(통치기술과 질서의식을 상징하는)를 가지고 있고, 이는 그대로 권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권력의 메커니즘을 표상한다. 


미셀 푸코는 정신이나 관념, 가치관과 실천논리와 같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개념을 공간화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이 헤테로토피아 개념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졌거나, 일반적인 공간개념과는 사뭇 다른 의미기능을 담지 하는 공간개념이다. 궁으로 대리되는 권력의 실체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정작 그 작동방식은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동궐도로 표상되는 권력의 공간화에 대해서 권력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삼성미술관은 산하에 현대미술과 전통미술, 미술관과 박물관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 전시를 위해 고미술품을 도입할 수 있었고, 현대미술과 전통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를 수가 있었다. 사실상 이런 경계 넘나들기 유형의 전시를 순수한 자력만으로 성사시킬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미술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 자체 삼성미술관의 장점이며 특징으로 보아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는 최근 현대미술의 전시행태와도 부합하는 면이 있어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박물관 속 미술관 혹은 미술관 속 박물관의 개념을 매개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리고 그렇게 박물관을 현대미술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전시행태가 세계적인 추세랄 수 있고, 이로써 전통과 현대미술 공히 풍부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삼성미술관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박물관 입장에서는 현대미술과의 교류를 통해 박물관을 활성화할 수 있고, 주제의식의 빈곤으로 허덕이는 현대미술의 입장에선 전통적인 문화를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현대미술을 위한 또 다른 콘텐츠 개발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경우라고 보인다. 모르긴 해도 오래된 미래, 이를테면 미래는 진즉에 태동되고 있었다고 보는 관념은 이럴 때를 위해 예비 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90년대 고증을 거쳐 제작한 경복궁과 육조거리 모형, 부석사 무량수전의 실물크기 모형, 양동마을 무첨당의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목조건축의 실물크기 모형의 유첨당(김봉열)과 같은 각종 전통건축모형이 전시를 뒷받침하면서 공간감과 현실감을 더했다. 그리고 여기에 각종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전시 자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를테면 우동선의 디지털아카이브 근대를 기억한다, 박종우의 장엄한 고요, 석굴암의 축조과정을 3D로 재현한 영상과 더불어, 전통목조건축의 배치를 영상으로 조작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박종우가 제작한 3채널 영상작업 장엄한 고요는 종묘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각각 종묘건축과 종묘제례가 하나로 어우러지게 했다. 3면이 영상으로 둘러쳐진 방안에 들어서면 종묘로 대변되는 장엄한 고요(아마도 종묘에 대한, 그리고 전통건축에 대한 감독의 작가적 해석을 함축하고 있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실감을 자아낸다. 지금은 실감을 주지만(아마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을 것. 살이 떨리고 피가 동하는 공감으로 치자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 아마도 머잖아 실제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증강현실도 전시공학의 한 부분으로서 도입되고 실현될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번 전시는 사찰과 궁궐, 가람배치와 정원, 건축모형과 건축유물, 미술관과 박물관, 현대미술과 고미술, 전통과 현대, 사진과 건축, 아날로그와 디지털, 불교와 유교와 같은, 때로는 형식적으로, 그리고 더러는 주제 내지 소재 면에서 상호간 이질적인 지점들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넘나드는 융복합 내지 융합형 전시를 표방한다. 그리고 표방처럼 표방이 현실화되는 현장이며 현실을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시를 둘러보는 내내 어떤 불편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는데, 완벽한 것이 문제였다. 아주 잘 포장된, 기술적으로도 완벽하게 구현된 무슨 전통건축박람회장을 관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매끄러운 이해로 인도하는 첨단의 기술마저도 디지털 기술의 실험실이며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분명 감각을 파고드는 아우라가 있었지만, 전시라는 상품을 위한 아우라였지, 예술에서 유래한 아우라는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이 전시가 아카이브라면 모를까, 현대미술 전시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유일한 현대미술일 서도호의 천 작업마저 또 다른 건축모형(좀 더 감각적인)으로 보였다. 전통을 현대적인 버전으로 재해석하고 재생산했다기보다는, 다만 재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전통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는 계몽주의에 머물러 있어 보이고, 모더니즘의 연장처럼 보인다. 

현대미술이 되기 위해선 낯설게 하기가 있어야 하고, 탈맥락과 재맥락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전제된 답안을 제시하고 친절하게 답안으로 인도하는 전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길을 잃게 만드는 전시가 되어야 한다. 혹, 전시가 아카이브 전시를 표방한 것이라면 내용적으로 충실한, 전시 공학적으로도 훌륭한, 그리고 꽤나 감각적인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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