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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희 / 동화와 신화가 들려주는 이야기

고충환

비 혹은 반 인간, 인간이라는 개념에 반하는 


손정희의 작업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엄밀하게 그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은 아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다. 현실 속 인간이기는커녕 오히려 비 혹은 반 인간들이다. 비 혹은 반 인간들? 바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인간들이다. 실재와 개념은 다르다. 인간과 인간이라는 개념은 다르다. 개념 이전의 인간이 본능과 본성, 야성과 야생을 소여한 인간이라면, 개념화된 인간(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은 그것들을 억압한 인간, 문명화된 인간, 도덕과 윤리로 무장한 인간, 사회화되고 제도화된 인간, 공리주의의 이상에 복무하는 착하고 선한 인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휴머니즘이란 미심쩍은 말로서 오용되고 남용되는 인간이다. 롤랑 바르트는 문명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명한 사실(자연적 사실)로서 받아들여마지 않는 인간이라는 개념도 사실을 알고 보면 문명적 사실(문명의 발명품)이란 점에서 신화적 사실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개념이 문제다. 인간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가 문제시될 수가 있다. 여기서 개념은 어쩜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인간을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했을 수 있다(루이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의 호명 여하에 따라서 인간은 비로소 주체로서 태어난다고 했다. 가능한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잠재적인 인간이 결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의미?).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인간만이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을 수가 있다(실존주의는 삶을 인간을 지향하는, 인간을 성취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인간을 소여 된 조건으로서보다는 목적지향의 대상으로 본다. 투쟁과 쟁취라는 조금은 살벌한 말도 그래서 나온다). 정상성과 비정상성(미셀 푸코의 성과 권력), 문명인과 야만인(에드워드 사이트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인간을 구분 짓는 근거와 기준이 모두 이런 인간을 개념화하는 과정과 맞물리고,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에 연동되고, 개념을 분배하는 제도의 관성(권력?)에 연관된다. 그래서 그들이 비 혹은 반 인간인 것은 자연스럽다. 개념과 문명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이 아닌 인간들(인간이라는 개념 바깥에 있는 인간들)이고, 반쯤만 인간들(미처 문명화되지 않은 인간들)이고, 인간에 반하는 인간들(때론 인간이라는 개념을 위반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동화와 신화에는 이런 비 혹은 반 인간들이 득시글하다. 그들은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인과론에 구애받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개념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들이고, 비 혹은 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 개념화되면서 억압된 것들, 이를테면 본능과 본성, 야성과 야생, 다르게는 욕망과 충동, 그래서 어쩌면 진정한 인간성(니체라면 초인, 그리고 미하일 바흐친이라면 전인이라고 했을)의 회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선 이런 시공간이나 인과론도(그리고 도덕과 윤리, 나아가 개념과 논리마저도) 다만 거추장스런 장애물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 장애물의 틀 밖에 있는 인간을 인간이 창조한(지어낸) 것이다. 신도 마찬가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만큼이나 인간은 신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신인동형설 곧 신과 인간이 하나라는 말은 흔히 인간이 신을 덧입은(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신이 인간을 덧입은(인간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종과 변종, 이형과 기형


손정희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런 비 혹은 반 인간들의 초상을 제안한다. 흙을 빚어 만든 도조형상을 몸통으로 하여 여기에 온갖 자질구레한 기성품들을 그러모아 같다 붙인다. 이를테면 새 깃털이나 양모, 구리선과 고무줄, 헝겊과 실타래, 방충망(날개를 대신하는), 거즈와 붕대, 목재와 금속(꼬불꼬불한 금속선으로 머리칼을 대신하는), 고무장갑(머리에 관 대신 쓰는), 말총(말 꼬리털), 천 조각을 덧대 만든 각종 봉제 조형들이다. 그 형상이 브리콜라주를 연상시킨다. 브리콜레르에서 온 브리콜라주는 원래 잡다한 것들을 한데 그러모아 특정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한 능력이나 형식적 특징을 넘어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이며 무관계한 것들을 새롭게 접붙이는 과정을 통해서 의외의 형상이나 예기치 못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그 자체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와도 통하는). 말하자면 탈맥락과 재맥락의 관점에서 봐야하고, 새로운 관계형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무슨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탈맥락은 의미가 원래 세팅되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그리고 재맥락은 그렇게 분리한 것을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접붙이고 편입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건 무슨 문제의식을 담보하는가. 왜 탈맥락과 재맥락이 중요한가. 의미가 원래 세팅되어져 있던 맥락이란 무슨 의미인가. 의미는 의미화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의미가 될 수가 있다. 문제는 의미화의 과정인 것. 일종의 통과의례 혹은 세례식에 비유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의미가 제도 속으로 태어난다. 제도의 승인(축성)을 통해서 해롭지 않은 의미, 건강한 의미로서의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다. 합리적인, 논리적인, 이성적인 의미로 거듭나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의미가 결정화되는 것은 언제나 이러저런 맥락 속에서의 일이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명인과 야만인, 정형과 비정형이 모두 그렇게 합리의, 논리의, 이성의 승인으로 의미화된 것들이다. 여기서 당연히 승인을 받지 못한 의미들도 있을 것이므로 그 승인 자체나 승인을 위해 동원되는 도구(기준) 모두가 권력적이다. 결국 브리콜레르나 브리콜라주는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한 실천논리에 연관되며,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의미화의 권력을 재편하기 위한 실천논리에 연동된다. 

그렇게 작가는 이종과 변종들에, 이형과 기형들에 주목한다. 그것들은 제도화된 사회에서 의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들이며, 의미론적 세계의 가장자리로 추방된 변방의 의미들(그리고 형상들)이다. 그렇게 이종과 변종, 이형과 기형들을 불러내기 위해 작가가 기대고 있는 서사의 원천이 동화고 신화다. 먼저 동화를 보면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그리고 인어공주가 있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대개 인내하고 견디면 호시절은 오고야 만다는 착한 여자를 테마로 하고 있다. 그 여자들로 하여금 착한 여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궁지로부터 구해주는 전령의 약속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전령이 오지 않는다면, 그래서 오지도 않을 전령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작가의 이종과 변종, 이형과 기형들에 대한 관심은 바로 여기에서 싹튼다. 전령이 오지 않는 것이 맞다. 전령이 오지 않는 것이 원작 그대로이고, 그것이 훨씬 삶답다. 처음부터 전령은 각본에도 없었고,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이데올로기에 지나지가 않았다. 바로 잔혹동화에서 까발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령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래도 삶은, 하고 일말의 반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착한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착한 여자를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삶에는 각본도 전령도 반전도 없다. 모두가 개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개념화의 과정이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의식의 착시)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 이종과 변종들이며 이형과 기형들은 그 자체로 당당할 수가 있게 되었다. 전령의 도래에 의해서 이종 이전과 이후가 판가름 날 것이므로. 그렇게 이종임을 판단해줄(이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전령이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이종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신화적 캐릭터로 치자면 판도라가 있다. 신들의 신인 제우스가 신들을 총동원해 만든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신들은 판도라를 완전하면서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다. 신들이 만든 만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지만, 그 완전한 존재가 판도라의 상자(원래는 항아리)를 열었고, 세상에 고통과 번민이 흘러넘치게 했고,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여기서 재빨리 뚜껑을 닫은 탓에 미처 세상구경을 하지 못하게 된 희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완전한 존재 속에 불완전한 존재가 들어있고, 불완전해 보이는 존재 속에 완전한 존재가 잠재돼 있다. 치명적인 유혹이며 아름다운 재앙으로 형용되는 자기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존재, 그저 여성성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인간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을 형용하는 상징적인 존재, 선과 악, 행과 불행,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는 존재의 양가성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가 없게 된 사이렌, 마찬가지로 자기를 구해줄 아름다운 목소리를 거세당해 첨탑에 갇혀 마냥 기다려야 하는 라푼젤, 오로지 자기본성에 충실할 뿐인 사티로스(무분별한 성욕을 상징하는)를 통해 신화가 실재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실재의 무엇을 숨기는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분노, 폭식, 오만, 탐욕, 색욕, 질투, 나태 등 성경에 나오는 7대 죄악을 주제화한 일련의 알레고리적인 형상들을 통해 성경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조작하는지를 까발린다. 그 과정에서 그로테스크는 자연스럽다. 바로 왜곡된, 조작된, 미처 개념화되지 못한, 의미의 변방으로 추방된, 죄의식과 단죄를 뒤집어쓴 존재의 존재다움을 표현하기에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그로테스크 리얼리티(미하일 바흐친)를 떠올리게 하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을 상기시키고,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몰(자크 라캉)을 암시한다. 모두가 이야기(동화와 신화, 개념과 이데올로기, 지식과 담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야기와 실재의 틈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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