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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6 / 조각, 감성을 깨우다

고충환




한국조각가협회가 주최하고 국제조각페스타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서울국제조각페스타가 올해로 6회째를 맞는다. 그동안 매 전시 때마다 주제를 정해 전시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 왔는데, 전문성과 함께 조각에 대한 대중친화력을 염두에 둔 기획으로 보인다. 일 년에 한 차례씩 조각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실상 국내 유일의 장이 주어지는 만큼, 이를 계기로 신진작가 발굴의 기회와 함께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조각가들의 노력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이를테면 조각을 매개로 생각을 주조하고(2014) 세상을 주조한다(2011). 조각과 더불어 놀고(2012) 꿈꾸고(2013) 맛본다(2015). 생각하는 인간(호모사피엔스), 건축하는 인간(공작인간, 저마다의 세계를 짓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호모루덴스), 꿈꾸는 인간(이상주의와 몽상가로서의 인간), 향유하는 인간(미학적 인간?)과 같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의가 다 들어있다. 모두가 조각을 매개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처럼 조각은 이미 진즉에 삶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삶의 일부였다. 다만 근대 이후 분야가 세분화되고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이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 서울국제조각페스타는 바로 이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던 현실의 복원을 꿈꾸고, 조각과 삶, 조각과 일상이 서로에게 속해져 있었던 유기적인 관계며 원형적인 상태의 회복을 꿈꾸게 한다. 

그리고 올해 전시에서 조각으로 감성을 깨운다. 조각, 감성을 깨우다, 는 전시주제가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 정의한 바움가르텐의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학문이 되기 위해선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게 객관성이다. 진즉에 이성이 그 조건을 충족시켜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음에 반해, 감성은 취미(그리고 취향)와 같은 사사로운 영역에 속한 것이라 하여 오래 동안 학문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칸트의 공통감각(호 불호에 공통점이 있다는)에 힘입어 불완전하나마 객관성을 인정받게 된다(예술은 불완전언어며 불구의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외에도 감성충동(감성)과 형식충동(이성)을 유희충동(예술)이 들어서 매개하고 화해하고 조화시킨다는 쉴러의 예술충동이론에 감성이 등장한다. 이처럼 감성은 미학의 핵심개념이며, 미학 자체가 이미 감성의 학문이다. 그리고 미학이 예술과 예술이론의 근간임을 생각하면, 조각으로 감성을 깨운다는 전시 주제는 미학의 근간이며 예술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자는 의지의 표명 내지 선언으로 읽힌다. 그리고 동시에 조각의 근본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본성(감성)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의 계기를 제안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감성이 뭔가. 비슷한 말로 감정이 있고 감각이 있다. 감정은 사사로운 기분을, 그리고 감각은 몸으로 읽고 표현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감성은 공감능력을, 특히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말한다. 자기 외부로부터 자기 쪽으로 건너오는 것들, 이를테면 타자, 자연, 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반응하는 감수성을, 타자현상을 자기화하는 공감능력을 말한다. 어쩜 진정성의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 편의상 구분해본 것이지만, 사실 감성과 감정과 감각은 상호간섭적이고 상호내포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하나같이 몸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읽고, 몸으로 표현하고, 몸으로 반응하는 것. 다르게는 본능과 본성, 야성과 야생과 같은 타고난 천성이며 자연성으로 봐도 되겠다. 그러나 이런 자연성(몸성?)은 근대 이후 삶의 질이 점차 문명화되고 제도화되고 사회화되면서 억압된다. 특히 경제제일주의와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에 의해 지지되는 자본주의 이후 자연성은 삶의 변방으로 내몰리는데, 이걸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라고 부른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술이 잉여의 전형적인 한 경우로서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은 불완전언어며 불구의 언어, 비정상언어며 변방의 언어를 매개로 소통을 꾀하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이성의 언어(정상성 언어)를 빌려 명명되고 기술되고 호명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돌아온 예술이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이며, 예술이 자기를 표현하는 형식이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이다. 억압된 몸이 예술을 빌려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억압된 감성이며 몸 현상을 조각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 조각도 그렇지만 현대미술은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갈아탄다.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과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대상성에서 의미론과 기호학을 위한 대상성이 강조되는데, 계몽주의의 이성의 도구화 이후, 그리고 미술 내부적으론 개념미술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창작의 시대가 담론의 시대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현대미술은 철학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현장에서 조각이 사라지고, 몸이 사라지고, 감성이 사라지고 있다. 짐짓 과장해서 말해본 것이지만, 현대조각은 협의의 의미와 광의의 의미가 공존한다. 협의로 현대조각은 직조에 한정되지만, 광의로는 현대미술치고 조각 아닌 것이 없다. 사실상 현대미술의 거의 모든 형식의 지점들이 조각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 조각의 이름 아래 수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그건 어쩜 이미 조각과는 다른 무엇(조각의 확장?)이 되었다고 봐도 되겠다. 해서, 상대적으로 현대미술에서 직조는 조각의 순혈주의를 위한 보루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각에서의 순혈주의가 뭔가. 조각의 본성에 천착한 직조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가 있다. 직조가 가능하기 위해선 재료와 소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형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해란 이해 자체(논리적 이해? 개념화하는 능력?)라기보다는 감각적 이해를 말하며 몸이해를 말한다. 여기서 스킬을 생략한 채 바로 감각적 이해며 몸이해 쪽으로 건너갈 수는 없다. 직조는 몸으로 직접 만들어지는 것이며, 몸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 감성이 결정적임은 물론이다. 몸이 감성의 집이기 때문이다. 몸의 현상학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감성이 자기를 실현하고, 잠자던 감성이 일깨워진다. 그렇게 나의 감성이 일깨워지고 너의 감성이 일깨워지는 것에서 공감이 생긴다. 나의 감성이 너의 감성 쪽으로 넘쳐흐를 때 공감이 생긴다. 직조가 가능하기 위해선 소재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바로 너에 대한 이해며, 대상에 대한 이해고, 세계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조각으로 감성을 깨운다는 주제는 감성이 잠자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조각을 매개로, 직조를 매개로, 공감능력을 매개로 잠자는 감성을, 억압된 감성을, 잊힌 감성을 일깨운다. 


본 전시 1) 삶, 인간의 숲 

아마도 조각의 소재로 치자면 인체가 가장 오래된 경우일 것이다. 그 역사는 피디아스의 비너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코레(여자)와 코우로스(남자)의 시절로, 신과 인간이 동거했던 시절로 소급된다. 그 시절 최초의 조각가인 샤먼은 신상을 빗어 풍요의 여신을 모셨고, 인신공양 대신 인형을 만들어 신에게 바쳤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조각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지만(실제의 희생양을 대신하는 것인 만큼), 정작 그 생기는 조각 외부로부터 온다(여기서 생기는 닮은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감?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유래한? 이처럼 진즉에 조각은 신적인 형상, 신으로부터 유래한 형상, 신에 대한 형상이었다. 여기서 형상은 에이도스 곧 신에 걸 맞는 형상, 신 자체인 형상, 완전한 형상을 의미한다. 돌 속에 신이 들어있고, 이미 완전한 형상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그 신이 뭔가. 육화된 신이며 인간의 몸을 덧입은 신이다. 신인동형설에서 신은 인간을 그리고 인간은 신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신이다. 그리고 독일관념론에서 신은 물자체(칸트)로, 계몽주의에서 정신(헤겔)으로, 낭만주의에서 타자(랭보)로 대체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주의에서 물신으로 거듭난다. 결국 조각가들이 신으로 조각한 것은 사실은 인간을 조각한 것이었다. 인간의 속사정을 신에게 투사하고 이입한 것이었다. 주술, 영감, 물자체, 정신, 타자, 그리고 물신은 신의 다른 이름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부리는 변신술의 다른 지점들이었다. 

인간 속에 타자가 살고 있다. 욕망이다. 여기서 욕망은 욕구와는 다르다. 욕구는 생리적 현상이어서 충족시킬 수 있지만, 욕망은 원초적인 결핍이어서 충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의식, 리비도, 죽음충동, 맹목적인 의지, 부조리와 같이 인간의 결핍을 증언하기 위해 호출되는 개념들이 욕망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런 결핍의식 없이는 예술도 없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상실된 것에 바쳐진 어떤 절실함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상실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니체는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삶은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했다. 허구적인 세상을 짓는 일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물신은 기의 없는 기표, 욕망 없는 욕망, 욕망을 생산하는 욕망이다. 상대적인 결핍, 추상적인 결핍, 허구적인 결핍, 결코 고갈되지 않는 결핍, 퍼내면 오히려 그만큼 채워지는 결핍, 그 자신이 결핍인 욕망을 생산하는 욕망이다. 그 욕망은 엄밀하게 타자의 욕망이다. 나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렇게 나는 욕망하는 나(타자)와 욕망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자아)로 분리된다.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로서의 나(페르소나)와 그 주체를 쳐다보는 나(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그리고 불교의 진아가 그 뒤에 숨는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이중분열과 다중분열은 어쩜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고, 그 자체가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 내지 증표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들은 저마다의 삶을, 인간을, 신을, 정신을, 물신을, 욕망을, 결핍을, 타자를 조형한다. 


본 전시 2) 자연, 치유의 숲 

자연의 표면적 의미는 동물과 식물, 꽃과 나무, 숲과 풍경과 같은 감각적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는 이런 감각적 대상을 존재케 한 원인이며 원동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를 피직스(자연)로, 그리고 후자를 나투라(자연성)로 구분한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전언에서의 자연 역시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이 아닌, 원인으로서의 자연성에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이다. 스피노자로 치자면 능산적 자연(소산적 자연과 비교되는)의 회복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그게 뭔가. 자연은 무엇이고 자연성은 무엇인가. 또한 그 관계는 어떠한가. 그건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의 관계와 같고, 음과 양의 관계와 같고, 한 몸의 양면과도 같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과 같고, 부분이 없으면 전체가 있을 수가 없는 것과 같고, 부재가 없는 존재가 없는 것과 같고, 무가 없는 유가 없는 것과도 같다. 그걸 짝패라고 부른다. 이처럼 존재는 부재와 함께 할 때, 유는 무에 의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온전해지고 자연스럽다. 그걸 하이데거는 존재의 존재다움이라고 부른다. 
존재는 존재다울 때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상태, 원래부터 그렇고 스스로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그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여기서 자연을 살아 있는 것 곧 생명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은 움직인다. 모든 존재는 이행 중에 있다. 그게 뭔가. 운동성이다. 그래서 감각적 자연의 원동력을 다름 아닌 운동성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생성에서 소멸로, 소멸에서 생성으로,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밑도 끝도 없이 무한순환 반복되는 운동성이 바로 생명현상이고 자연성이다. 그러므로 자연에선 이런 이행을, 과정을, 생명을 암시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존재가 유래하고 되돌려지는 원천을, 존재론적 원형을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형상을 통해 비형상을, 가시를 통해 비가시를 암시하는 기술이 관건이다. 

현대인의 특징이 여럿 있지만, 그 중 상실감으로도 특징된다. 현대인은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그리고 자연을 상실했다. 특히 자연은 존재가 유래한 존재론적 원형과도 같은 것으로서 고향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현대인은 그런 고향을 상실했고, 자연을 상실했고, 원형을 상실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도구화, 진보에 대한 신념과 인간주의,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물신이 이 상실감을 견인하는데, 자본주의는 세계를 상품화하고 자연마저 상품화한다. 그래서 원래 자연이 있던 자리에 인공자연을, 유사자연을, 의사자연을, 시뮬라크라를 대신 들어앉힌다. 물신은 동물원과 식물원, 관광지와 휴양림을 넘어 사람들의 의식마저 가상으로 변질시킨다. 이런 가상, 이런 도저한 상실감을 뒤집어놓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래서 예술은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된다. 상실한 원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된다. 그렇게 원래 자연이 품고 있던 것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범신론과 물활론, 주술과 신비, 어둠과 악, 두려움과 경외감, 그리고 침묵과 치유의 계기를 되불러오는 것이 된다. 


본 전시 3) 조각, 물성과 구조 

모든 존재와 사물과 현상에는 본질이 있다. 존재와 존재, 사물과 사물, 현상과 현상을 구별 짓게 해주는 그 존재, 그 사물, 그 현상만의 고유한 성질이 있다. 그렇게 문학의 본질(재현과 서사)이 있고, 음악의 본질(소리)이 있고, 미술의 본질(조형)이 있다. 그렇게 회화의 본질(평면)이 다르고, 조각의 본질(입체)이 다르다. 그렇게 장르적 특수성에 근거해 사물대상의, 예술의 본질을 강조한 것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다. 그렇다면 왜 본질을 강조하게 된 것일까. 본질을 강조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지금까지 조각은 조각이 아니었다. 인체였고 풍경이었다. 재현이었고 서사였다. 기념비였고 이데올로기였고 프로파간다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조각이 자신에 주목했다. 조각이 조각에 주목했다.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것이란 점에서 메타조각이고, 스스로를 반성한 것이란 점에서 자기반성적 조각이다. 

그건 그 속에 비평적 기능을 포함하는데,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조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해법이 물성(칼 안드레)과 구조(도날드 저드)다. 물성과 구조야말로 조각을 회화와 구별하게 해주는 조각만의 특질이고 본질이다. 그리고 물성과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서 좌대가 사라졌다. 조각이 좌대에서 내려온 것은 이중적인데, 조각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조각을 현장에 연장되게 했다. 여기서 현장은 현실과는 다른 것으로서, 조각에 의해 창조된 현실, 조각에 의해 매개되고 변형된 현실, 조각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 현실, 조각의 일부인 현실, 조각적인 어떤 사건으로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갖는 현실이다. 그렇게 조각은 물성과 구조만으로 이미 충분히 조각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 고유의 성질이 있고 본질이 있다는 발상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표면적으로 복잡해 보이는 그리고 외관상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회문화현상(이를테면 풍습과 관습, 가계와 족보와 같은)의 이면에는 상호간 개연성을 갖는 반복적인 기본패턴이 발견되는데, 그걸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라고 부른다. 이런 사회적 구조주의를 예술에 전용하고 적용해본 경우(예술적 구조주의)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관계를 더할 수가 있겠다. 이것과 저것, 부분과 부분, 조각과 공간, 조각과 관객과의 관계 말이다. 그 관계로부터 긴장감이 파생되고 역학이 작동한다. 긴장감 자체가 역학의 일종으로서, 조각을 공간(그리고 공간조각)으로 확장하게 해준다. 그래서 어쩜 조각은 역학의 기술이며, 공간의 조형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특히 관객이 개입되면서 조각은 조각으로부터 상황논리로 변질되는데,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연극적 상황?)이라고 부른 것이다. 현대미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관계의 기술)이다. 사물의 의미는 사물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발생하고 배열에 의해 결정된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조각의 본질은 물성과 구조를 아우르고, 관계를 매개로 본질주의로부터 비 혹은 탈 본질주의로 넘어간다. 순혈주의로부터 비 혹은 탈 순혈주의로 확장된다. 


특별전 1) 아리랑 어워드 

아리랑 어워드는 (주)크라운해태가 작가를 선정 지원하는 전시다.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메세나 운동의 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아리랑 어워드라는 명칭은 전통적인 아리랑에 연유한 것으로서 장르적으로 국악과 공연 그리고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편으로, 형식적으로 소리와 춤사위가 조각의 조형과 만나지는 접점(공감각)을, 그리고 내용적으로 아리랑으로 대변되는 한국적 미의식의 현대적 계승을 지향한다. 
그 취지에 부합하는 경우가 이정주의 작업이다.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를 자른 단면을 어슷하게 쌓아나간 그의 작업은 위로 가면서 점차 좁아지는 구조가 뿔을 연상시키고, 단면들이 쌓이면서 만든 층이 뿔테(나무로 치자면 나이테에 해당할)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휘몰아치면서 상승하는 구조가 운동성과 함께 율동감을 자아낸다. 아마도 아리랑의 선율 혹은 춤사위를 조형한 것일 터이다. 
최소한의 조형요소로 치자면 점을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점은 조형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고, 의미론적으로 존재가 유래하는 근원이며 단위원소(세포, 모나드, 단자)에 해당한다. 신한철의 작업은 바로 이런 사실에 착상된 것으로서, 그의 작업에서 점은 크고 작은 원형으로 대체된다. 크고 작은 원형들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시키는 그의 작업은 마치 세포가 증식하고 존재가 확산되는 생명현상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일부 타공 기법을 도입해 만든 조형의 표면에 난 구멍은 아마도 숨이 들락거리는 숨구멍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호흡을 매개로 자가 증식하는 생명현상이며 생명의 본성을 조형하고 있었다. 
추상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윤석의 작업은 대개 유기체며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만개한 꽃잎 같은, 새 깃털 같은, 나비 같은, 곤충 같은, 알 수 없는 유기체의 기관 같은. 단위구조에 해당하는 단편들이 하나로 포개지면서 모이거나 펼쳐지는 양상에 따라서 이러저런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을 보면 레이저 커팅에 의한 조각조각을 일일이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인데, 정교하고 기계적인 형태가 마치 미래에서 온 기계생명체 같다. 기계도 유기체처럼 숨 쉬고 생각하고 욕망한다는, 소위 욕망기계를 떠올리게 한다. 
돌을 그 예로 치자면, 조각이란 돌을 깎아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태를 얻는다. 장성재의 조각은 바로 이런 조각의 원형에 충실한 작업을 예시해준다. 어떤 형태를 특정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돌을 깎아나가다 보면 여하튼 어떤 형태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고 조각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며, 형태는 사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미리 형태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모든 가능한 형태를 포함하고 암시하는 결과를 낳는 것에서 역설이 생긴다. 이를테면 타제석기나 마제석기와 같은 도구의 원형을 연상시키고, 돌이 품고 있을 에너지와 같은 존재와 생명의 원천을 떠올리게 한다. 


특별전 2) 한국 현대조각의 태동전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현재에는 과거가 있기 마련이다. 조각도 마찬가지. 한국 현대조각의 태동전은 그렇게 한국현대조각의 원로작가들을 모셨다. 올해 처음 열리는 이 전시는 앞으로 정례화 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현대조각의 여명기를 통해 미술사적인 해석과 재해석이 용이할 것 같고, 신과 구를 한자리에서 비교해 봄으로써 그간 한국현대조각이 변화해온 양상과 상호영향관계를 조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인체를 소재로 다루는데, 인체는 가장 흔한 소재인 만큼 가장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중국 고사에 보면, 사람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고 귀신을 그리는 것이 가장 쉽다고 했다. 흔한 소재는 친근한 만큼이나 서툰 구석이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대번에 드러나 속일 수가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는 말도 있다. 사람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려도 그릴 것이 남아있다. 아마도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람을 그리고 조각하는 이유며 당위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윤영자는 여체의 아름다움을 추상화한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외적이고 내적인 아름다움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내적인 아름다움이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외화 되고 승화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를테면 기다림과 망(잊다) 같은 제목이 그런데, 전통적으로 여성스러움의 전형을 예시해주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런가하면 추상화가 진척되면서 여인이 안고 있는 애기(모자상)가 알로 환원되기도 하는데, 아마도 기다림과 망으로 나타난 여성스러움의 전형이 생명과 잉태라고 하는 존재의 원형으로 승화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근래에 작가는 인체를 한자 체로 변형시키는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전뢰진은 인체를 빌려 전설과 설화 속 잊힌 얼굴을 되불러온다. 그의 조각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동일시되고, 애초에 그것들이 서로 다르지가 않다. 나무와 산, 구름과 식물 모티프와 같은 자연 소재와 인간이 의미비중 상 경중이 없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도 차별도 없다. 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나무가 되는, 구름과 인체가 구분되지 않는 설화 혹은 신화적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인간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자연이라는 대척점을 전제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이상향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돌은 형태를 가둔다. 돌의 본성이다(다른 소재는 돌만큼 형태를 가두지는 않는다). 강태성의 조각(예컨대 소녀를 다룬 성장과 해풍)은 정적이면서 동적이다. 정적이면서 동시에 동적일 수는 없다.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돌의 본성 탓에 모순이 아니다(변증법적 지양?). 겉보기에 돌은 정적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 동적인 걸 숨겨놓고 있다. 돌이 가두고 있는 형태(돌의 본성)일 터인데, 그게 뭔가. 생명력이고 역동성이고 파토스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정적이면서, 왠지 알 수 없는 힘으로 동적이다. 정중동이다. 파토스(특히 해풍이 품고 있는 문학적 상상력에 연유한)가 응축된 명상이다. 
인체를 빌려 명상의 계기를 열어 놓고 있는 최종태의 조각은 단순하고 금욕적인 형태로 한국현대조각에서 뚜렷한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 명상에 잠기거나 기도하는 소녀상은 고도의 추상적 형식이며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소한으로 표현된 소녀의 실루엣은 다소곳하게 감은 눈이 아니라면 거의 추상조각과 구분되지가 않는다. 한편으로 이처럼 단순하고 명상적인 형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종교적인 정신세계와도 통하는 것이어서, 이를 형상화한 성상조각이 작가의 조각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기도 한다. 


학술 세미나/ 한국 현대조각의 흐름_한국조각가협회를 중심으로 

모더니즘과 후기모더니즘을 구분하는 근거는 분분하다. 그 와중에서도 대개는 모더니즘을 장르적 특수성이 강조되는 경우로, 그리고 후기 모더니즘을 탈장르 경향이 뚜렷한 경우로서 구별한다. 이런 연유로 현대미술에서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을 따져 묻는 일은 기껏해야 미술대학 내에서의 커리큘럼 상으로나 겨우 그 명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며, 이는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더니즘이나 후기 모더니즘 논의는 담론 상에서의 일이며 현장과는 일정한 차이를 갖기 마련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 역시 자의적인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런 현실(담론과 현장의 차이)을 반영이라도 하듯 장르를 가름하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견되는데,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이 직조로 축소되고 그 특수성이 강조된 것이다. 조각이 뭔지 분명해진 것이다. 덩달아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며 물성에 대한 감각이 귀해지면서 오히려 전에 없이 소중해진 것이다. 

한국조각가협회는 이런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며 물성에 대한 감각의 보루이며, 정통적인 조각 특히 직조의 중추랄 만하다. 1985년 창립한 이후 2008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한국조각가협회는 국내 최대의 조각가 단체로서 현재 전국 1000여명의 회원 조각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직조에 관한한 주요작가들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런 연유로 이번 세미나에선 한국조각가협회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조각의 흐름을 개괄해보고자 한다. 대략 인간에 대한 해석, 자연에 대한 해석, 조각의 본질에 대한 해석, 이태리 까라라 이후(정통적인 조각가 단체인 만큼 협회에는 유독 까라라 출신 작가들이 많다), 그리고 조각의 확장 순으로 살피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스케치 정도는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해석. 인간(인체)은 가장 흔한 소재인 만큼 가장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얘기지만, 사람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고 귀신을 그리는 것이 가장 쉽다고 했다. 흔한 소재는 친근한 것인 만큼 서툰 구석이나 억지스러운 부분이 단번에 드러나 속일 수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표현의 지평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예를 보면 소소한 일상(이정자)에서부터 거의 추상을 방불케 할 만큼 눈에 띠게 양식화의 과정이 진척된 경우(탁연하)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다. 그 스펙트럼 위에서 인체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변주된다. 이를테면 작가들은 저마다 인체를 빌려 내면화의 경향성을 강조하기도 하고(김수현), 가족 간의 유대를 강조하기도 하고(김행신, 민복진), 모심과 여심으로 나타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하고(윤영자), 종교적인 이념과 더불어서 명상의 계기를 열어 놓는다(박휘봉, 최종태, 김효숙, 홍순모). 

특히 민중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박휘봉의 조각은 해방신학과 함께 레비나스의 타자론(윤리적 공감 내지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의 얼굴)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인체를 소재로 한 최종태의 조각은 단순하고 명상적인 형태로 한국현대조각에서 뚜렷한 개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단순하고 명상적인 형태는 종교적인 정신세계와도 통하는 것이어서 성상조각이 작가의 조각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기도 한다. 최종태의 기도하는 소녀상이 금욕주의를 반영한다면, 김효숙의 조각은 감정의 표출을 반영한다. 위를 향해 내민 왜곡된 양손이 신을 향한 작가의 염원과 갈망을 말해준다. 테라코타로 형상화된 거친 질감의 그리스도가 신의 존재와 함께 인간적인 외상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그리고 홍순모의 조각은 특히 그 발색 효과가 인상적이다. 잡석을 재료로 한 어눌한 듯, 무기력한 인물의 표정이 서민의 전형을,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인간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홍순모의 조각에는 대개 성경구절이 제목으로 인용된다). 

그런가하면 전뢰진과 고정수의 조각은 한국적인 지역성과 특수성으로 나타난 전형적인 형식을 실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전뢰진의 조각은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자연의 동일시를 보여주며, 애초에 그것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나무와 산, 구름과 식물 모티프 등의 자연 소재와 인간의 의미비중에 있어서 그 경중이 없다. 주체와 객체의 차별과 구분이 없다. 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나무가 되며, 구름과 인체가 구분되지 않는 설화 혹은 신화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인간의 근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굳이 자연이라는 구분된 개념(인간이 대상화한 객체로서의 자연)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이상향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고정수의 조각은 청석 고유의 물성과 함께 특유의 돋을새김 효과가 두드러져 보인다. 모가 없는 풍만하고 둥그스름한 여체에 가해진 균질한 표면 질감이 작품을 한눈에 읽히게 하는 통일된 시각적 경험을 유도하는 한편 고요하고 정적인 정서를 불러일으켜 혹자는 작가를 한국의 마욜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간은 인문학적 개념이다. 욕망과 가치관 같은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개념이다. 그 반영 여하에 따라서 인간을 소재로 한 조각은 각각 현실주의(강관욱, 구본주, 이성재의 무기로 변신한 신체, 설총식의 풍자와 해학, 삶의 현장을 투견과 서커스에 비유한, 그 비유가 하이데거의 투쟁을 떠올리게 하는 박찬용,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초상을 소에 빗댄, 그 비유가 현대인의 초상에도 들어맞는 박민섭), 실존주의(류인, 배형경, 안경문, 안재홍), 그리고 명상조각(박상우, 중력 무중력, 그림자의 그림자, 불교와 선사상의 김영원, 전항섭의 신전, 김선영의 소금과 정화)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물론 이외의 다른 분류도 가능하지만. 여기서 현실주의는 사실주의와 다르다. 사물대상에 대한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태도가 사실주의라고 한다면, 현실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천적 참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현실주의보다 그 폭이 넓고 깊다. 더 보편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명상조각은 내면을 지향하고 때로 그 지향성이 종교적인 경지에 이른다.  
이외에 인간을 소재로 한 경우로서 홍애경, 오상욱, 김효숙(테라코타), 이영섭(발굴), 박승모(알루미늄와이어), 강태성(정중동의 파토스가 느껴지는), 임형준(나팔로 변신한 몸), 강민석(몸의 기억), 이철희(모나드의 집적으로 구조화된 신체)의 경우가 흥미롭다. 그리고 이환권(왜곡된 신체)과 김일용(파편화된 신체)의 조각이 인체를, 인체표현을 확장시킨다. 

자연에 대한 해석. 자연을 소재로 한 경우로는 크게 생명주의(안병철, 김태순, 양태근, 이윤숙, 안치홍, 발아를 꿈꾸는 씨앗 같은, 비상을 꿈꾸는 새 같은 이운식), 자연주의(이재효), 유기적 형상(이종애, 강신덕, 박태원, 이윤복, 황인철), 치유와 힐링(강효명)으로 나누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한인성, 방준호(바람에 눕는 나무), 호해란(선인장이 자라는 집), 김성복(호랑이와 도깨비 방망이), 구자영(달팽이), 이규민(달팽이), 김선구(말), 서옥재(동물), 이길래(소나무)의 경우가 주목된다. 

조각의 본질에 대한 해석. 조각의 본질에 천착한 경우는 굳이 사물대상을 재현하지 않더라도 구조 자체, 물성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조각(적)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고 이는 흔히 추상조각(박석원, 양덕수, 이영길)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앵포르멜과 물성에 천착한 박석원의 조각이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예시해주고, 폐목을 재구성한 양덕수의 조각이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동고동락했었을, 그의 손때며 입김이며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 폐목들이 정감을 자아내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외에도 도태근, 변숙경(면과 면이 접합되는), 신한철(세포처럼 자가 증식되는 원), 이수홍(안과 밖 그리고 사이)의 작업이 조각의 본질 중 특히 구조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이에 반해 물성은 재료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경우를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빛(이성옥, 최태훈의 프라즈마 기법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철 구조물 사이를 관통해 흐르는 빛, 심영철의 빛의 정원, 김연의 수면에 일렁이는 빛, 박근우의 빛을 머금은 돌), 용광로 철 슬러지(성동훈), 거대한 수세미(김정희), 유리(이상민, 김형종, 이후창), 그림자(엄익훈), 한지 캐스트(김희경, 손인환), 실리콘(나진숙), 활자(노주환), 돌(돌을 깎는 행위와 과정 자체가 중요한 장성재)과 같은 재료 고유의 물질적 성질이 조각을 결정하고 유형화한다. 

이태리 까라라 이후.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조각가협회 작가 중엔 유독 까라라 출신 작가가 많다. 심인자, 유영교, 한진섭(해학과 유머), 이종빈, 박헌열(빛을 머금은 숲), 전용환, 조병섭(유기적 형상), 한기늠, 민경욱, 박신애, 백진기, 최성철, 김종희(이태리 밀라노 브레라), 조은희(이태리 밀라노 브래라), 박경환(로마 국립미술학교) 등등. 미켈란젤로의 조각으로도 유명하지만 세계 최고의 대리석 산지이기도 해서 특히 돌을 다루는 조각가들에게는 그만한 곳이 없다. 성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문 내지 통과의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경향을 보자면 단연 인체가 많고, 사실적 재현으로서보다는 인체를 양식화해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집과 풍경이 인체와 어우러진, 그리고 그렇게 어우러진 풍경이 서정적 정감을 자아내는 소위 풍경조각도 곧잘 발견되는 점이 흥미롭다. 인체의 유형화와 풍경조각의 전개양상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조각의 확장. 그리고 최승호(아이러니), 김범수(초현실주의), 유재흥(나무로 만든 종이봉투), 정진아(똥, 분변학), 양홍섭(주형 혹은 주물조각), 심병건(프레스 압축조각, 프레스 압력을 이용한), 이윤석(기계생명체), 이원경(음각)의 작업이 조각의 확장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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