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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효 / 구(求), 자연의 원형적 형상

고충환

자연과 더불어 걷다. 이번 전시의 주제다. 여기서 자연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우선 질료와 물성으로 나타난 사물대상의 감각적 성질을 의미하고 에너지와 기와 같은 원동력을 의미한다. 변화와 이행 같은 운동성을 의미하고 생과 사가 무한 순환되고 생성과 소멸이 거듭 반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이데거 식으론 개별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 혹은 존재 자체가, 노자로 치자면 의미화 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의 미처 분화되지 않은 원초적 존재 상태가 자연과 통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것과 비교되는 경우를 흔히 자연스럽다고 한다. 자연이란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아마도 자연은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의미가 태도가 될 때 의미는 이즘이 된다. 자연주의가 되고 생태주의가 되고 바이털리즘이 된다. 전시(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5.4-7.3)는 이재효를 자연주의 조각가로 정의한다. 자연주의 조각가로서 걸어온 25년 역사를 정리한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짚어낸 자연주의 조각의 주요 형식 지점들이 예시되고 있고, 이를 통해 자연의 의미가 제시되고 있다. 

그 형식은 주로 기하학적인 형태를 띤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형 비정형의 원형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원형상은 그 자체 완결된 형태로 닫혀 있거나 호를 그리며 열려있기도 하고, 공간과 어우러져 구조가 강조되는 경우로 현상하기도 하고, 때로 터널과 같은 원통형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자연을 기하학적인 형태며 원(구)으로 환원하는 것인데, 사실 그 형상은 마치 세포와도 같은 자연의 최소단위이며 자연의 원형적 형상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자연의 기하학적 환원은 다름 아닌 자연의 원형적 형상을 되찾는 행위이며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단위구조는 심플하다. 작가에게 심플한 구조는 군더더기가 없는(말로 치자면 정곡을 찌르는) 작업으로 구조 자체, 형태 자체, 물성 자체에 접근하게 해주는 구실이며 계기가 되고 있는 탓에 중요하고도 결정적이다. 비록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공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원형적 형상을 발굴(발견?)한 것이어서, 그리고 그 형상이 자연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이어서 자연스럽다. 

이런 기하학적 환원과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형식적 특징으로는 구조와 반복과 집적을 들 수 있다. 각각 나무와 낙엽, 돌과 못과 같은 하나의 단위구조를 반복 집적시키는 것. 말하자면 최소한의 단위구조를 반복 재생산하는 것, 최소한의 단위구조가 모여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조형으로 확장되는 것, 그렇게 확장된 조형이 조각을 확장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전혀 다른 공간경험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공간경험은 자연과 관련해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을 가공한 것인 만큼, 그리고 자연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한 것인 만큼 자연 자체와는 사뭇 다른 경험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자연의 원형을 캐낸(자연의 원형을 닮은) 것인 만큼 자연 자체와 대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연 자체와는 다르다는, 그리고 동시에 자연 자체와 대면하고 있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빠지게 만든다. 

양가적인 감정 자체는 친근함과 낯섦, 의외성과 재확인이 이중적이고 복합적으로 중층화된 감정으로서 자연을 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에 기인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을 지각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고,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이때 변화하는 쪽은 관객의 입장인 것이며, 자연은 다만 처음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연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형식이며 자기를 실현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은 종잡을 수가 없다. 자연은 이렇다 혹은 저렇다 하고, 자연을 지각하고 정의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형식의 스펙트럼은 알고 보면 그 선입견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사물대상의 의외성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럼으로써 선입견을 재고하게 하는 계기와 관련이 깊다. 작가는 바로 그 선입견을 건드리면서 자연의 다른 형식이며 지각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안된 다른 지각방식 중 하나가 무중력이다. 공중에 떠 있는 나무 공,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벽면에 걸린 나무덩굴, 멀리서 보면 밤하늘에 아롱거리는 별자리 같은 헤아릴 수 없는 못의 단면들, 수천 개의 자잘한 돌멩이가 매달려 만들어낸 인공터널, 그리고 수천 장의 매달린 낙엽으로 이루어진 낙엽주렴이 그렇다. 

돌멩이와 나무 그리고 못은 그렇다 치고 낙엽은 의외의 소재다. 작가의 전형적인 작업으로 알려진 것인 만큼 친숙하지만, 사실 낙엽 자체는 더욱이 매스를 중요시하는 조각에서 친숙한 소재는 아니다. 낙엽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부패와 소멸과 같은 자연현상을 자연스런 과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아일랜드의 한 숲속에 가면 작가의 나무 구 작업이 놓여있다. 외진 곳인 만큼 찾는 사람도 없고 처음부터 굳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눈 밖에서, 의식 밖에서, 세상 밖에서 그는 저만의 생을 살아 갈 것이다. 이끼와 먼지와 세월을 주민 삼아 저만의 삶을 겪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이다. 그렇게 이따금씩 사람들의 의식에 파장을 일으키다가 종래에는 그 자신 이끼와 먼지와 세월의 한 주민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작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소재다. 심지어 담배꽁초마저도. 소재들 중엔 일회적인 것도 많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다. 기록물이 아니라면 실물을 접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작가의 경우에 유독 아카이브에 충실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동시에 그 자체가 작업의 영역을 확장시켜주는, 하다못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버먼트 스튜디오 시절에 작가는 눈 작업을 했고 고드름 작업을 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나 고드름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그 가장자리를 가지런하게 다듬은 형태의 존속기간 내지 유효기간은 다만 햇살이 비치기 전까지다. 일회적인 것들, 단명 하는 것들, 누군가가 저를 기록해주지 않으면 기억에서마저 잊힐 것들, 이 운명적인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연미술이며, 자연미술가들이 자연미술에 마약처럼 빠져드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의미에서의 자연미술은 정작 작가에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프로젝트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환경에 맞춘 경우들이지만, 그저 임기응변에 능한 재치로서보다는 평소 작업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며 의식이 반영된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이재효,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설치전경






이재효,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설치전경



작가의 조각은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자연조각, 형태와 구조를 최소화한 것이란 점에서 미니멀리즘 조각, 그러면서도 재료의 물성을 고스란히 살려낸 것이란 점에서 물성조각으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 아니 이 모든 조각의 지점들이 하나로 합류되고 종합된 경우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가 닿은 지점들마다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은 것이 놀랍다. 어쩜 작가가 추구하는 형식은 이 모든 형식의 지점들 밖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는 성남아트센터가 개관 3년차를 맞아 새로 마련한 동시대미감전의 첫 전시로 열린 것이다. 각 동시대이슈전과 함께 격년제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각각 동시대미감전은 소위 대표선수를, 그리고 동시대이슈전은 동시대성을 담보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초대 전시로서 이재효 작가의 25년 조각사를 되짚은 것은 적절해 보인다. 사실 이재효 작가에게 되짚는다는 수식을 쓰기에는 아직 젊다. 지금까지 작가가 보여준 성과가 괄목할만해서이겠지만, 이번 전시가 향후 작가가 보여줄 성과(아니면 새로운 시작)를 위한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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