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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윤 / 숲에 입문하는, 원초적 자연과 교감하는

고충환


작가의 작업실 옆에는 숲이 있다. 그 숲을 방문하는 것이 작가의 일과가 되었다. 숲은 하나의 세계다. 일상 속에 둥지를 튼 비일상적인 공간이며 일탈적인(일상으로부터 탈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마치 일상 위로 떠있는 섬과도 같다고나 할까. 섬은 뭍과는 달리 스스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는 않는다. 다만 이따금씩 저를 찾는 사람들(숲의 순례자들?)에게 잠시잠깐 자기를 내어줄 뿐, 섬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섬은 없다. 옛날에 성소가 있었다. 세속적인 법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도둑이 성소 안으로 도망가면, 사람들이 그를 잡을 수도 벌할 수도 없었다. 세속적인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정화된다고 여겼다. 전혀 다른 세계로 입문한다고 믿었고, 속에서 성으로 이행한다고 믿었다. 


그 경우는 다르지만 숲이 그렇다. 숲은 비록 일상의 한 부분이지만, 실상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일상 속의 바깥이라고나 할까. 숲의 순례자는 이런 전혀 다른 세계며 일상 속의 바깥으로 입문하는 것이며, 거기서 그는 원초적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정화된다(숲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입문의식이며 정화의식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정화된다? 이건 그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의 존재이유라고 밝힌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숲에 들어가는 것, 거기서 원초적 자연과 교감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전혀 다른 세계에 입문하고 정화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예술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전혀 다른 세계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삶의 질이 점차 기능화 되면서 잃어버린 세계며 잊힌 세계다. 예술은 바로 이렇듯 상실한 것들을 되불러오고 원형(존재의 원형 혹은 존재론적 원형)을 회복하는 것에 그 존재의미가 있다. 


A day of wood. 숲에 들어가면 이처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적막감과 적절한 어둠이 자기 내면에 집중하게 만든다. 자연과의 교감이 쉽게 일어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의 촉감, 나뭇잎을 흔드는 빛과 어둠의 희롱, 발끝 위로 전해져오는 낙엽 밟는 소리, 이름 모를 들꽃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덤불들, 껍질이 벗겨진 채 하얗게 표백된 나무토막, 옛날 샤먼이 토템으로 머리에 썼음직한 사슴뿔을 닮은 나뭇가지, 뱀이 벗어놓고 간 허물, 주인 없는 거미줄, 얕은 개울가에 핀 수초, 투명한 젤리 속에 심이 박혀있는 개구리 알과 도롱뇽 알, 개울 속에 가지런한 자갈들, 자갈 위로 실선을 그리며 한가로운 물고기들, 불어오는 바람에 주름을 만드는 수면과 그 위로 부서지는 빛 알갱이들. 






숲은 순례자에게 원초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생판 처음 보는 것 같은 모습을 열어 보인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에다 비유했다. 비록 예술로 옮겨가기 이전의 상태이지만, 이런 세계의 맨살과의 교감이야말로 이미 예술적 행위로 봐야하지 않을까(예술은 무엇보다도 교감의 문제이며 감수성의 문제이다). 작가는 그 교감을 작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A day of wood라고 불렀다. 숲에서의 하루이지만, 숲에서의 나날들로 읽어도 무방하다. 교감이란 자연보다는 인성에 속한 문제이고, 작가에게서 자연 쪽으로 건너간 것과 관련이 깊다. 최소한 간주체 혹은 상호주체의 문제이고, 자연과 작가, 주체와 주체, 세계와 세계가 만나지면서(상호소통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에서는 재현보다는 분위기가 강조되는 편이고,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보다는 자연과의 교감이 부각되는 편이다. 자연과 교감할 때 일어난 일이며, 그 일의 흔적을, 그 색감과 질감을 질료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자연채집. 교감은 감정의 일이고, 따라서 머잖아 잊히고 만다. 작가는 자연과 교감이 일어나던 그 순간, 그 사건, 그 극적인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자연을 박제화하고 화석화하기로 했다. 그 과정은 복합적인데, 그리고 붙이고 굳히는 과정이 상호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과정을 거친다. 캔버스에 연필 소묘 혹은 드로잉을 하고, 플라스틱이나 천으로 만든 조화(오브제)를 화면에다 붙여 고정시키고, 그 위에 미디엄으로 여러 차례 덧발라 화면을 고착시킨다. 그렇게 나타난 그림 속 형상을 보면, 이름 모를 들풀들, 도롱뇽 알과 개구리 알, 물고기와 물고기 비늘, 아마도 그 비늘에서 착상했을 섬세하고 촘촘한 망, 새 깃털, 뱀이 벗어놓고 간 허물, 나무껍질, 빗방울, 씨방, 나뭇가지 같기도 하고 사슴뿔 같기도 한 형태, 불가사리, 산호초, 개울 속의 자갈과 수초 등 자연에서 발견하고 숲에서 찾아낸 사물대상들이다.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열거되면서 일정한 패턴을 그려 보이는 식의 배열을 보여주기도 하고, 거즈와 망구조의 오브제를 빌려 자연의 기하학적 구조와 질감을 대신하거나 한다. 반짝이 안료나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색깔과 빛이 변하는 카멜레온 혹은 홀로그램 필름을 도입해 수면에서 반짝이는 빛 알갱이의 미묘한 효과를 표현하기도 하고, 낡은 창문틀을 액자 대신 사용해 시간의 아우라를 연출하거나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미디엄으로 덮는데(옛날이라면 레진이나 투명 폴리를 썼을 것), 여러 차례 덧바른 탓에 마치 살갗이나 피부와도 같은 (반)투명한 층이 생긴다. 그 층이 그림으로 하여금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이게 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은 박제가 되고, 자연이 화석화된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자연 모티브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정작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과의 교감을 주제로 한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미디엄이 만든 투명한 두께(살) 속에 갇힌 그림(그리고 오브제)이 때로 흐릿해 보이고 애매해 보인다. 그건 말하자면 그대로 교감의 순간과 그 순간을 되살리는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알레고리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채집된 자연 모티브는 마치 시간의 지층 속에서 캐낸 것 같은, 불완전한 기억의 침전물을 보는 것 같은 특유의 정서적 질감을 자아낸다. 


계절채집. 그리고 작가는 일련의 사진작업에서 지금까지 자연에 대한 태도와는 사뭇 다른 입장을 예시해주고 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상반되는 두 계절이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된 이질적인 사진들이다. 실제 자연을 배경으로 그 위에 조화를 배치해 찍은 것인데, 예컨대 눈 덮인 겨울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선인장이나, 수북한 낙엽 위로 원색의 꽃이 핀 것과 같은 식이다. 사진 고유의 트릭으로 인해 얼핏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실제계절을 배경으로 가짜계절을 대비시킨 것이며, 실제 꽃과 더불어 가짜 꽃을 비교한 것이다. 표면적으론 엘니뇨와 지구온난화현상에 의한 혼돈되는 계절 감각이며 그 당혹감을 표현한 것이지만, 다르게는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가 생화 행세를 하는,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도대체 오리무중이고 뒤죽박죽인 세상살이에 대한 풍자며 알레고리로 봐도 되겠다. 


한편으로 풍자는 일말의 유머 내지 위트를 동반하는데, 작가는 해골의 머리 위로 뿔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식물이 자라는, 마치 해골이 숙주라도 되는 양 움푹 팬 눈에 꽃이 피는 해골을 통해 생명의 순환을 표현하기도 했다. 자연은 내 작업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작가는 적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이 일어나는 그 순간, 그 사건, 그 극적인 현장감을 붙잡아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쩜 기능만능주의와 고도의 물질문명 사회에서 자연(강조하고 싶다면, 진정한 자연)은 가장 비생산적인 것인지도 모르고, 진즉에 변방으로 밀려난 것인지도 모르고, 이미 잊힌 것인지도 모르고, 겨우 풍문으로나 떠도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을 호출하는 작가의 작업이 새삼스러운 만큼 그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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