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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훈 / 버블맨, 비누거품놀이에서 환영놀이로

고충환



오동훈은 어린아이들의 비누거품 놀이에서 현재 자신의 조각을 위한 착상을 얻었다고 한다. 스트로를 이용해 통 속에 담긴 비누거품을 불면 크고 작은 구형이 응집된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불면 그렇게 응집돼 있던 거품이 분리되면서 비로소 온전한 원형을 이루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표면에 무지개의 영롱한 빛깔을 머금은 채 잠시잠깐 허공을 떠다니다가 이내 터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영롱한 빛깔이 다시 보고 싶어서 스트로를 연신 불어댄다. 아이들에게 그건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놀이가 재미가 아닌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이가 아닌 그 놀이를 지켜보는 어른 쪽이다. 어린아이는 현상에 빠지고 어른은 의미를 찾는다. 도대체 저 현상은 무슨 의미이지(무슨 시추에이션?). 그래서 비누거품 놀이가 유년의 추억으로 각인되는 것도, 뒤늦은 상실감을 일깨워주는 것도 어른 쪽이다. 현상이 충분히 의미화 된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어른의 눈으로 볼 때 비누거품 놀이는 환상놀이다. 자기 눈앞에 환상을 창조하고 환상을 호출하는 놀이이다(예술은 환상/환영을 창조하는 기술이다). 


어린아이는 투명하게 빛나는 영롱한 빛깔이 자꾸 보고 싶다. 어른이 보기에 그건 꼭 꿈을 눈앞에 호출하는 것만 같다. 비누거품은 꼭 꿈같다. 비현실적으로 아롱거리는 것도 그렇고, 현실보다 더 찬란한 것도 그렇고, 잠시잠깐 유혹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그렇다. 짐짓 심각하게 말하자면 인생무상의 전언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 바니타스 정물화에 연동되고, 꿈과 생시, 나비와 자기의 경계를 넘나드는(비눗방울 속에 내가 들어있는) 장자몽의 현대판 버전 같다. 삶이 꼭 그런 것이 아닐까. 삶이 혹 꿈은 아닐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삶은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혹 정작 삶을 살게 하는 힘이며 삶을 견인하는 계기가 꿈은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어린아이들의 비누거품 놀이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오동훈, Bubble man



오동훈, Bubble man

그렇게 버블맨이 탄생했다. 버블맨은 그 출신성분이 비누거품에서 온 것인 만큼 비누거품에서 그 생리며 현상이 얻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이를테면 비누거품처럼 그 최소단위가 원형이어야 한다. 비누거품처럼 가벼워야 하고, 투명해야하고, 외부환경을 되비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통 속의 비누거품처럼 원형과 원형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구조는 반복적이어야 하고, 확장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형태는 비정형적이고 비선형적이어야 한다. 비누거품이 아닌, 비누거품을 조각으로 옮긴 것인 만큼 최소한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무중력성, 투명성, 반영성, 반복성, 확장성, 비정형성 혹은 비선형성이, 그리고 비누거품이 만들어내는 형태치고 결정적인 형태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 우연성과 가변성이 버블맨이 갖추어야 할 성질이며 덕목으로서 채택되었다. 


실제로 작가의 조각에서 그대로 발견되고 확인되는 이 성질들은 현저하게 현대적이다. 작가의 조각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구를 자르고 붙여서 원형을 만든다. 크고 작은 원형들이 덧붙여지고 어우러지고 확장되면서 이러저런 형태를 만든다. 원하는 형태가 만들어지고 나면 표면을 광택 처리해 스테인리스스틸 소재 본래의 성질 이를테면 마치 거울과도 같은 반영효과를 살린다거나, 표면을 우레탄 도색으로 마감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를 보면 원형이라는 기본형에도 불구하고 같은 형상이 하나도 없다. 원형이라는 최소단위세포에서 확장된 것(시작된 것)이라는 점 말고는 형태들이 다 다르다. 주형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에디션도 없다. 작가는 3차원 입체화면을 구현하는데 남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구현된 도면 그대로를 입체로 옮긴다. 이런 프로세스를 생각하면 같은 형상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제 제작과정에서 일일이 수작업을 거치는 것인 만큼 같은 형상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똑같다는 혹은 유사하다는 느낌은 줄 수가 있겠다. 

이런 느낌 즉 00같다는 느낌은 작가의 조각에서 중요한데 특히 담론의 층위에서 그렇다. 이미 버블맨 자체가 그렇다. 버블맨이라는 사람은 실제로는 없다. 가상 인격체다. 그건 비누거품이 만들어낸 우연한 형상이 마치 사람처럼 보인다는 착상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만든 조각이 다 그렇다.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도, 개처럼 보이는 형상도, 비상하는 말처럼 보이는 형상도 알고 보면 다 사물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일 뿐 사물대상 자체가 아니다. 자기동일성을 흉내 내고 모방하고 차용하는 것일 뿐 결코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자기동일성이 뭔가. 제도가 개별주체를 호명하는 방법이고 지목하는 방식이다. 제도의 관성이다. 그리고 예술은 태생적으로 반제도적인 실천논리에서 그 존재이유를 찾는다. 말하자면 제도의 자기동일성의 논리에 대해 비동일성의 논리를 들이대고, 차이의 논리를 대질시키고, 제도의 관성을 흔들어놓는다. 여하한 경우에도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들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고, 그 존재방식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차용하고 제도의 관성을 전유하면서 차이를 생성시킨다. 마치 비누거품이 우연한 형상을 생성시키듯(예술은 차이의 기술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은 분명 눈앞에 실재하는 실물에도 불구하고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데자뷔들이고, 저기 저곳에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신기루들이고, 현실과 비현실, 실상과 허상의 경계에서 출몰한 유령들이다. 더욱이 비누거품에서 온 것이라는 출신성분이 이런 비현실성을 강화시켜준다. 이런 비현실적인 것들을 출몰시키는 것, 영락없는 실재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유의 형태도 색깔도 없는 것들, 사이와 틈새, 경계와 행간에 거주하는 것들을 되불러내는 것,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의 층위로 되불러내는 것이 중요하다(예술은 형태 없는 것들에게 형태를 주는 기술이다). 

그 형태들은 가볍다. 금속으로 만든 것이어서 실제로는 가벼울 리 없지만 작가의 감각이 가볍게 만든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표면에 광택을 내면 거울이 된다. 그 광택을 극단까지 밀고 가다 보면 거울은 불현듯 현실의 확장이 되고 실재의 연장이 된다. 그래서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 같다. 거울 속엔 반영된 현실이 들어있다. 현실과 반영된 현실이 하나의 현실 속에 공존하고 있는 현실이 현실화된다. 있을 수 없는 현실이 현실화된다. 여기서 현실은 비현실로 전화된다. 바로 현실과 비현실이 맞물린 사이와 틈새, 경계와 행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아마도 작가의 조각은 바로 그 순간을 겨냥하고 있을 것이고, 머잖아 그 순간에 맞닥트릴 것이다. 작가의 조각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감각적인 층위에서)도 현대적으로 보이는 것(담론의 층위에서)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형태들이 마치 비누거품처럼 가볍게 떠있으면서 무중력 상태를 부유하는 것 같다. 그 무중력 상태가 또 다른 제도의 관성인 중력에 저항하는 것 같고 반하는 것 같다. 제도의 관성으로서의 중력은 체제를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제도의 항상성이며 현실원칙을 말한다. 여기에 비누거품이 만든 형상이 대질되고 작가가 만든 조각이 비교된다. 비현실적인, 중력에 반하는, 부유하는, 환영적인, 비선형적인, 우연한, 가변적인, 아롱거리는, 그리고 덧없는. 조각이 이렇게까지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물질이 이렇게까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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