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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 춤추는 기운, 기가 흐르고 사유가 흐르고 욕망이 흐르는

고충환

모든 존재는 저마다 고독한 섬들이다. 그 섬 위로 비가 내린다. 그 비는 다른 섬(타자)에서 건너온 안부일 수 있고, 고독한 존재를 위로하는 단비일 수 있고, 존재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 위로 나리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내리는 비를 표현했다(비 내리는 섬). 그리고 다중감성인간에서 작가는 인간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표현한다. 아마도 세상 끝까지 볼 수 있고 세상 끝에 미친다는 천안천수상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부처의 전능이 인간에게 적용되면 욕망이 된다. 천 개의 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거머쥐는 욕망의 화신이 된다. 그렇게 작가에게 존재는 고독한 섬이고 번민의 화신이었다. 그렇게 작가에게 작업은 존재의 비의를 등록하고 기술하는 책이었다(일련의 책 오브제 작업들). 그렇게 작가의 전작은 근작을 예비하는 예고편이었다. 존재의 비의를 캐는데 바쳐진. 

기는 춤을 춘다. 개인의 일상과 국가, 민족 간의 대립과 갈등 같은 희로애락, 흥망성쇠는 다름 아닌 기가 추는 춤일지도 모른다...흐르는 시간 앞에서 인간사의 부질없음과 존재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작가노트를 옮겨본 것이지만, 작가의 관심이 거대담론에 맞춰져 있음을 알겠다.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시대에, 본질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이미지가 중요할 뿐인 이미지정치학이 진리인 시대에 작가의 포커스는 인간의 의중을 향하고 존재의 비의를 정조준 한다. 존재를 기라고 보고, 그 기를 파고든다. 그래서 주제도 춤추는 기운이다. 다시, 존재는 기다. 양기와 음기가 상충하고 부침하는, 부딪고 충돌하는, 침윤하고 스며드는 무한순환반복운동의 와중에서 존재가 태어나고 죽는다. 태어나고 죽는, 욕망하고 좌절하는, 사랑하고 질투하는 것은 존재에게는 매번 절실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 유심함(존재가 절실한 건 마음 때문이다)은 무심한 운동의 도가니며 섭리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그저 반복할 뿐이다. 그렇게 좋은 기운과 나쁜 기운이, 선한 영과 악한 혼이 교환되면서 갈등이 일고 대립을 부추긴다. 나비효과다. 내가 숨을 쉬면 세상 끝에 바람이 분다. 연기설이다. 나는 세상 끝까지 연결돼 있고 연속돼 있고 연동돼 있다. 존재의 딜레마다. 존재란 무심한 운동의 한 계기에 지나지가 않고, 그럼에도 그 계기가 운동을 작동시킨다. 유심한 존재와 무심한 운동의 관계설정을 파기하지 않는 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존재의 아이러니다. 파기할 수도 없고 파기되지도 않는 존재의 딜레마고 아이러니다. 


김민호, 관음보살상, 53x26x47cm, FRP

 김민호,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도, 106x40x135cm, FRP



그래서 작가의 작업엔 유독 부처가 많다. 인간의 번민과 존재의 비의를 표현하기에 부처만큼 적절한 표상도 없었을 것이다. 부처의 마음속에 바람이 불고 회오리가 인다. 그 격렬함이 부처의 관조적인 얼굴표정과 대비된다. 격렬한 마음과 관조적인 얼굴표정이, 파토스와 에토스가 대비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부처의 반쯤 감은 눈은 사실을 말하자면 감은 눈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눈을 감으면 내면이 열린다. 


세상이 오롯이 내면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화된 세상이 보인다. 그리고 부처는 그렇게 내면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정중동이다. 부처의 표정은 관조적이지만, 정작 그의 마음속엔 바람이 불고, 그가 보는 세상엔 번민의 격랑이 몰아친다. 이 이율배반을 작가는 눈앞에 보여준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형태도 색깔도 질감도 소리도 없는 것이어서 알 수가 없다. 더욱이 부처에서처럼 관조적인 얼굴이 방벽으로 작동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다. 작가는 그렇게 알 수가 없는 것을 인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리고 지각의 수면 위로 되불러낸다.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고, 인식 바깥에 있는 것을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기술이다. 그 기술을 위해 작가는 왜곡이라는 방법론을 끌어들인다. 왜곡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격렬함을, 파토스를, 마음속에 이는 회오리를 무슨 수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쩡한 형태를 왜곡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 속 격랑임은 표현주의에서 이미 알려진 그대로이다. 표현주의에서 표현은 원래 속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표출되고 분출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음속 격랑이 말하자면 표현인 것이고, 그것이 외화 될 때 멀쩡한 형태를 왜곡시키고 알만한 사물대상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건 어쩌면 겉보기와는 다른 사물대상의 이면을 읽게 해주고 행간을 독파하게 해주는 적극적인 독서의 한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반대로 회오리가 인다. 마음이 아닌 부처의 머리에 회오리가 이는 것. 아마도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표정을 유지하면서 짐짓 모른 채 하기에 진력이 난 것일 수도 있고, 평정심의 용량을 초과해 코드가 헝클어진 것일 수도 있고, 마음 속 회오리가 그대로 머리 쪽으로 옮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경우이건 부처에 대한 평소 선입견을 재고하게 하는 것(부처답지 않은 것)이어서 의외의 느낌을 준다. 여기서 작가는 그로테스크와 유머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로테스크는 사물대상을 그리고 특히 그 의미를 결정화하려는 제도의 관성을 깨고 사물대상의 본성에 해당하는 다의성과 다성성을 열어놓기 위한 미하일 바흐친의 핵심개념이다. 그리고 이처럼 결정적인 현실과 비결정적인 현실이 파열될 때(왜곡될 때) 유머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어, 이건 아닌데, 하는 식이다. 비결정성이 열어놓는 의외성으로 보면 되겠다. 

회오리는 마음속에만 이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도 인다. 욕망은 성기와 가슴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에만 정박하는 것은 아니다. 암은 온몸으로 옮겨 다닌다(전이된다). 이와 똑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회오리가 옮겨 다니면서 신체를 왜곡시키고, 번민이 전이되면서 형태를 변형시킨다. 부처의 사유가 흐르는 지점을 따라 때론 손이 강조되고 더러는 머리가 왜곡된다. 사유는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도 흐를 수가 있고, 그렇게 매번 다른 신체부위가 강조되고 왜곡될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 속 번민이 외화된 것이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방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의 왜곡이 그저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규칙은 입체보다는 평면을 차용(명화를 패러디)한 경우에서 더 두드러져 보인다. 소실점이 그것이다. 소실점은 원래 원근법과 이후 역원근법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 재현에서 유래한 핵심개념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소실점은 왜곡의 원천이며 진원지 역할을 하고, 특히 부처의 경우에 사유와 욕망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유와 욕망이 흐르고 부풀고 확장되는 여하에 따라서 신체도 덩달아 흐르고 부풀고 확장되는 것 곧 왜곡되는 것이다. 평면으로 치자면 피리 부는 소년의 손이 여기에 해당하고, 말이 향하고 있는 질주하는 방향이 소실점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소실점을 적용해 소리를 강조하고 방향을 암시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흥미로운 것은 왜곡도 그렇거니와 원근법과 소실점은 원래 조각보다는 회화를 재현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였다는 점이다. 이 미학적 장치를 끌어들여 작가는 조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조각을 확장한다.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현대미술의 한 경향에도 맞닿아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사열한 군대를 마치 춤을 추는 듯 왜곡시켜놓고 있는데(군무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풍자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기가 흐르는, 사유가 흐르는, 번뇌와 번민이 흐르는, 욕망이 흐르는, 이데올로기가 흐르는 여하에 따라서 사물대상의 형태를 왜곡시키면서 존재의 이면을 열어놓고 행간을 읽게 만든다. 존재 자체로서보다는 존재가 연동된 지점(일종의 인식론적 맵)을 통해서 존재를 보고 읽는 다른 방식이며 채널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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