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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 한지의 물성과 색감이 매개하는 회화적 자의식. 2016.8.

고충환


국내적으로 1960년대는 동인의 시대다.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이 모인 동인활동이 개인전보다 활발했고 주목받던 시기다. 그 중 논꼴동인이 있다. 1965년 창립 당시 남영희는 유일한 여성작가로서 동인에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대개는 남성작가들 중심으로 동인활동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여성작가의 참여는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이야 여류작가니 여성작가니 하면 구태의연한 발상이라고 하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달랐다. 더욱이 추상미술을 하는 여성작가는 한국현대미술을 선도한다는 소명의식 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그만큼 추상미술이 시대적 당위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논꼴동인 역시 추상미술을 주도하면서, 특히 자생성 내지 주체성을 고민했던 것 같다. 추상성과 주체성이 어떻게 만나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식논리는 무엇일 수 있는지 고심한 것. 여기서 추상미술은 우선은 서양화의 형식논리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소산이지만, 이보다는 회화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로 이해하는 것이 맞지 싶고, 작가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해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점, 선, 면, 색채와 같은 회화의 기본적인 형식요소에서 시작해보는 것이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치자면 이미 그 자체로 회화로서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것이고, 현상학으로 치자면 의식의 영도지점(회화의 영도지점)에다 자기(회화)를 정초하는 현상학적 에포케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작가의 경우에 이런 형식요소를 특히 면에서 찾았던 것 같다. 추상성(추상미술의 형식논리)은 그렇다 치고, 주체성은? 주체성은 일종의 원형 같은 것이다. 원형의식이다. 원형은 의식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나의 일부로서 취해져있었던 무엇이다. 아득한 시간 저편으로부터 도래해 나를 예비했고 나를 형성시켜준 유전자 같은 것이고 유전형질 같은 것이다. 미의 원형이며 미의식의 원형질 같은 것이다. 그게 뭔가. 전통이다. 그리고 작가는 한지에서 이런 전통의 원형을 보고 원형질을 본다. 한지에 전통이 온통 녹아들어있고 배어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전통이 체화된 형식 곧 전통의 질료라고 본 것이다. 이를테면 들고나는 경계가 모호한(닫으면서 열고 열면서 닫는) 창호 문이 그렇고, 하늘 높이 나는 종이연이 그렇고, 종이로 만든 각종 지함이며 생활용품들이 그렇다(그리고 여기에 조각보와 함께 계절그림 곧 세화에 이르기까지). 유년시절 허구한 날 보고 자라면서 저절로 친숙해진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질료는 물론이거니와 형태마저 면이 강조되고 있는 것들이란 점이다. 이를테면 크고 작은 면들이 어우러져 창호 문을 만들고 종이 연을 만들고 생활용품을 만든다. 결국 작가의 경우에 추상성(면으로 나타난)도 주체성(정서적 질료로 나타난)도 하나같이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며,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는 회화의 근본에 대한 자의식과 함께 작가의 유년의 추억이, 그리고 어떤 원형 내지 원형질이라고 부를 만한 정서적 경험(선험적인 경험)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지와 면 혹은 색면 구성이 작가의 회화적 바탕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 기본구조(틀)를 변주하고 심화하면서 상실된 유년을 찾고, 자기형식을 찾고, 종래에는 그 자기형식에 동질화된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렇듯 자기를 되찾는(되짚는) 행복한 그리고 지난한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이 행복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짚는 것에서 오고, 그 과정이 지난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상실한 것 곧 원형을 상기시킬 수 있는 형식(원형을 표상하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 과정에서 한지 고유의 물성이며 한지 자체의 성정은 결정적이다. 여기서 한지 고유의 성질로 치자면 한지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자체로 이미 실현된 것이라고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조형을 의식하고 만든 것이 아닌 만큼 논외로 쳐야 한다. 그렇다면 가급적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한지 고유의 성정을 작업 속에 여전히 혹은 고스란히 담보하는 것, 그러면서 한지로 하여금 조형이 되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이처럼 한지 고유의 성질이 중요한 것인 만큼 작가는 공방에서 대량생산된 한지(몰개성적인) 대신 자신이 직접 만든 한지(수제한지)를 사용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공방에다가 특별히 주문제작한 한지를 쓴다. 그렇게 제작된 한지에는 비록 가공된 것이지만 닥 섬유질이 여실하고, 균질하지 않은 표면요철 효과로 인해 자연 본래의 색감과 질감이 간직되고 있는 편이다. 적당히 거칠고 질박한 느낌이 한지 고유의 물성을 강조하는 한편,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촉각적인 경험마저 하나로 아우르게 해준다. 


한편으로 한지는 쉽게 접고 펼 수 있는 유연함이 특징인데, 작가는 그 성질 그대로 자신의 작업 속에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한지를 접고 편 위에 먹이나 안료를 입히면 접힌 부분이 하나의 선으로 되살아나고, 작가는 그 선을 조형적인 요소로서 도입하고 있는 것. 먹은 농묵보다는 담묵을 선호하는 편인데, 엷은 먹을 여러 차례 덧발라 마치 화면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은 투명하고 깊은 색감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번짐 효과에 의한 비정형의 얼룩을 조성하기도 하는데, 안료를 자기 내부에 흡수해 들이는, 그래서 안료와 일체를 이루는 한지 고유의 성질에 착안한 것이다(이에 반해 캔버스와 안료의 관계는 지지대 위에 안료가 얹히는 층 구조를 이루는 것이 다르다). 


남영희, 2015, 한지에 채색, 164x210cm



남영희, 2016, 한지에 채색, 95x63cm



이렇게 강조된 한지의 물성이란 결국 자연성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자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황토를 도입한다. 물에 가라앉혀 충분히 숙성시킨 황토 흙을 화면에 바르거나 먹이나 안료와 혼합해 그린다. 이렇게 조성된 화면을 2합이나 3합 그리고 때론 5합 이상으로 포개면서 면과 면이 물리는 보다 큰 화면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때로 여기에 안료를 올린 화면을 뒤집어 붙이는 식의 배채법이 적용되기도 하는데, 비정형의 표면요철효과와 함께 마치 빛을 한차례 걸러낸 창호 문에서와 같은 은근하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준다. 창호 문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빛을 차단하면서 들이는, 들고나는 것이,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하는, 소위 흔들리는 경계를 표현한 것도 같다. 


그렇게 크고 작은 면 혹은 색면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작업이 한지의 물성과 함께 전통적인 생활감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를테면 이불보나 치마저고리를 곱게 개 놓은 것도 같고, 자잘한 조각 천을 이어 붙여 만든 조각보를 보는 것도 같고, 오랜 회벽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자연의 성정을 닮았는데, 이를테면 미세요철이 여실한 바위의 표면질감과 그 표면에 핀 마른 이끼를 상기시키고, 녹슨 철판을 떠올리게 하고, 무두질된 가죽의 표면질감을 보는 것도 같다. 이런 전통적인 생활감정이며 자연의 성정은 다 뭔가. 그건 결국 그 속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지층에 해당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연의 질감(그리고 성정)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되짚는 것(시간을 머금고 있는 오브제?) 같은, 그런 고풍스런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꽤나 결정적인 변화를 꾀한다. 여기서 꾀나, 라고 다소간 유보적인 표현을 한 것은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작과 근작은 여전히 하나의 맥락(이를테면 면 구성의 변주)에 속하고 또한 그렇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보적이지만 결정적인 변화란 뭔가. 그건 특히 색감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전작에선 소재의 물성에 방점이 찍히고, 근작에선 물성보다는 색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전작에서의 색채는 주로 황토색과 흑갈색의 변주에 지배된다. 자연의 천성에 가까운 색채감정이다. 적어도 색감만 놓고 보자면, 그리고 인성으로 치자면 관념적이고 금욕적인 색채감정이다. 이에 반해 근작에서의 색감은 눈에 띄게 밝고 곱고 화사해졌다. 그렇다고 원색적이지는 않고(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란한 원색과 작가의 성정은 잘 매치되지가 않는다),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이다. 


보기에 따라서 물성과 질감이 강조되는 편인 전작이 남성적이라고 한다면, 색감이 강조되는 근작은 여성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작에선 아니무스(남성성)가 발현되고, 근작에선 아니마(여성성)가 자기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웬 성담론이냐고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전작에서 작가는 자기를 발현하기보다는 회화의 형식논리를 찾고 드러내는 일에 주력해왔고, 여기서 자기의 발현은 그 기획 뒤편에 비켜나 있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근작에서 마침내 그렇게 비켜나 있던 자기가 보다 적극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 매개 역할을 한 것이 색채이고 색채감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자기형식에 동질화된 자기를 찾았다고 볼 수가 있겠다. 하긴 모두가 작가에게서 유래한 것인 만큼 물성도 그리고 색감도 작가의 아이덴티티에 속한 것이지만, 그래도 물성보다는 색감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여성성의 발현 혹은 자기형식에 동질화된 자기와 함께, 근작에서 감지되는 부분이 일종의 풍경적인 회화 가능성이다. 웬 풍경? 작가의 작업이 시종 면 구성의 변주와 심화와 확장에 바탕을 둔 추상회화에 진력해온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추상과 풍경은 그 거리가 멀지 않다. 몬드리안의 기하추상이 원래 풍경을 기호화(간략화)한 것이고, 생전에 세잔은 풍경이 최종적으로 지향되는 지점으로서의 추상(원뿔과 원통 같은 최소한의 기하추상으로 환원되는 풍경)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중 근작에서의 일부 그림이 현저하게 풍경을 암시하는 편이다. 면이 크고 성근 화면보다는 자잘한 색면들이 아기자기하게 포개지고 중첩된 섬세한 화면이 그렇다. 비록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된 경우이지만 원근감이 있고 내진감이 보인다. 일종의 내면풍경의 무의식적 발현으로 볼 수 있겠고, 그 자체 작가의 자기발견(혹은 자의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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