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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 광학적인 풍경, 청색필터를 통해 풍경을 보다

고충환

perception_just looking(2012-2014). Blue scape_just looking(2015-2016). 작가 정영환이 그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에 부친 주제이다. 연도에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결정적이지는 않다. 그림 자체를 보더라도 그동안 미세한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전작과 근작을 구분할 정도는 아니다. 이처럼 미미한 차이며 변화를 도외시한다면 일정기간 하나의 주제의식과 하나의 형식을 일관되게 심화하고 변주해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따라서 그동안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미미한 차이며 변화에 대해서는 그림의 감각적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과정이며 시도로 보면 되겠다. 



정영환_Into the BlUe_ 2016_acrylic on canvas_ 91.0x60.6cm





정영환_just looking_2015_acrylic on canvas_116.7x91.0cm



모르긴 해도 이런 일관성에는 주제도 형식도 이거다 싶은 자기 확신이 일정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게 뭔가. 그게 뭔지를 밝히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관건일 것이다. 주제에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 그림을 봐도 작가의 그림은 온통 파란 풍경이다. 이처럼 파란 풍경을 통해서 본다는 것의 문제를, 그 지각작용이며 인식작용을 묻는다. 혹은 마찬가지 의미이지만, 이와는 거꾸로 본다는 것의 문제를 매개로 한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을 묻는 과정에서 파란 풍경에 도달한 것일 수 있다. 어느 경우이건 그 밑바닥에는 본다는 것의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동시에 회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시각과 재현, 보는 것의 문제와 그리기의 문제가 하나로 통하는 것. 그런 만큼 작가는 자기 그림에 대해 궁리를 하면서 동시에 회화의 문제를 궁리한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회화의 본질을 묻는 행위가 일치하는가 하면(모더니즘패러다임), 그림을 매개로 은연중 회화에 대한 자기 반성적이고 비평적인 행위를 수행하는(메타회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와 수행의 근간이 되고 있는 본다는 것(시각적인 문제)은 무슨 뜻인가. 도대체 보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우리는 뭘 볼 때 그저 보기만 하지는 않는다. 뭘 보면서 동시에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동시적인 행위이고 총체적인 행위이다. 이 행위는 거의 저절로 라고 볼 만큼 순식간에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은 구별되지가 않는다. 자기보존법칙과 항상성의 원리와 같은 동물적 수준의 감각(그 감각이 고장 나면 생존이 위험해질 수가 있다)이 그리고 감각과 관련해 그동안 축적된 경험(감각경험)이 그 작용을 견인하고 뒷받침한다. 


그 작용(보면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선택적 행위를 더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사람들은 사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보고 싶은 걸 보는?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여기서 본다는 행위를 매개로 한 지각작용과 인식작용은 욕망에 연동된다. 말하자면 보는 행위는 결코 객관적 현상이 아니다(행위 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것이며, 여기서 행위는 단순한 반응과는 다르다). 사물대상(아니면 사태)은 하나이지만 이처럼 욕망(그리고 나아가 자의식도, 환경도, 인문학적 배경도, 관심도, 그리고 이해관계마저도)이 다른 탓에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해석하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여기에 리얼리티의 어려움이 있고 리얼리즘이 항상적으로 유효한 이유가 있다. 현실에 걸핏하면 진정한, 이라는 수사적 표현이 따라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리를 하자면 본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욕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행위일 수 있다. 

시각적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재현적인 문제는? 그리기의 문제는? 알다시피 재현이란 사물대상(여기서는 외적인 것으로 한정)의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는데, 재현이란 알고 보면 주관적이고 선택적인 행위라고 본다. 이를테면 사물대상과 영락없는 닮은꼴을 그릴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에 마저도 그림과 사물대상이 일치할 수는 없다. 다만 왠지 닮아 보일 뿐. 재현이란 사물대상을 그림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이며 과정으로 본다면 화가는 그렇게 불러들여 그림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 중 한 가지 가능성을 선택하는데, 그게 기법이고 방법이다. 심지어 영락없는 닮은꼴에서도 그렇다. 여기에 예외가 있는 수는 없는 것. 앞서 재현의 대상을 외적인 것으로 한정했지만, 이처럼 외적인 것이 그럴진대 내적인 것 그리고 아예 관념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방법이 선택사항에 연동된 것임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정리를 하자면 내적이고 외적인 사물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은 무수한 표현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대상을 그린, 하나같이 다른 그림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게 보는 것도 선택적이고 그리는 것도 선택적이다. 시각도 욕망에 연동되고 재현도 그렇다. 보는 행위는 객관적 현상이 아니고 재현 역시 그렇다. 다시 곰브리치에 의하자면 재현에 표현이 끼어들고, 객관에 주관이 간섭하는 긴밀한 상호작용과 상호 간섭의 소산이며 결과가 그림(특히 그리고 흔히 재현적인 그림)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온통 파란 풍경을 그려놓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선택이라는 적극적인 행위(주관과 객관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행위)를 매개로해서 보는 것의 문제며 그리기의 문제, 그러므로 지각의 생리며 회화의 본질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뭘, 어떻게, 왜 선택하고, 또한 그렇게 선택된 국면은 작가의 그림을 어떻게 특징짓고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가.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그림은 온통 파랗다. 마치 청색필터를 통해본 광학적인 풍경이라고나 할까. 불현듯 일전에 기묘한 경험을 한 게 기억난다. 노란색 셀로판지를 붙여놓은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이었는데, 풍경이 속해져 있는 시간대는 분명 현실이지만 왠지 빛바랜 영상을 보는 것 같은, 과거로부터 현재 위로 호출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현재 위로 과거가 오버랩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처럼 색 필터(모노톤)는 현실을 왜곡시킨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한 단층을 은연중 드러낸다고나 할까.


이처럼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충실히 재현해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청색조의 모노톤이 불러일으키는 색채감정이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청색조의 모노톤은 말하자면 실제 풍경 중 작가에 의해 선택된 풍경(엄밀하게는 풍경의 단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 풍경의 지평(풍경의 깊이와 넓이)에서 대기의 빛깔이며 공기의 빛깔을 그리고 미처 어둠이 가시기 전 새벽녘 안개가 머금고 있는 빛깔을 발췌한 것일 수 있다. 여기에 다른 자연현상에서 유래한 색채감정이 덧붙여질 수 있겠고, 아예 관념적인 대상(이를테면 자연관과 같은)을 청색조의 색채감정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풍경 중에서 숲과 나무가 속해져 있는 부분만 발췌(선택)하고 나머지 부분을 삭제하는데, 그렇게 하얀 공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전통적인 회화에서의 여백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여백은 알다시피 빈 공간이 아닌 암시적인 공간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채워지고 완성되는 잠재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그림의 형식과 의미영역을 확장시키는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작가의 그림이 친근하면서 낯설다. 알만한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해놓고 있는 것이어서 친근하고, 그럼에도 실재와는 다른 청색조의 모노톤 화면(광학적인 풍경)이, 그리고 발췌되고 삭제된 풍경이 낯설다. 여기에다 작가의 풍경은 알고 보면 편집되고 재구성된 풍경이다. 편집되고 재구성된 풍경?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보이는 대상 그대로를 그린 것이 아니다. 사진과 영화, 잡지와 인터넷과 같은 각기 다른 출처에서 유래한 풍경의 부분 이미지들을 발췌해 하나의 화면 속에 편집하고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 작가가 상상으로 그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풍경(이상적인 풍경? 이상향?)을 재현해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알만한 그림이면서 동시에 아리송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물대상의, 풍경의, 자연의, 현실의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지층을 드러낸다. 표면(감각적인 풍경)을 그리면서 이면(이상적인 풍경)을 드러내고, 표면과 이면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진 풍경을 그린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실을 알고 보면 광학적인 풍경이다. 발췌된 풍경이고 삭제된 풍경이다. 편집되고 재구성된 풍경이다. 뭔가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기계적이고 미디어적인 어감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작가의 그림은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걸 맞는 풍경이고 자연이다. 현대인은 사진, 영화, 잡지, 인터넷, 프린터, 디지털, 포토샵, SNS와 같은 온갖 미디어가 생산하고 유포시킨 이미지의 범람 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에 이미지가 발췌되고 삭제되는, 편집되고 재구성되는, 그리고 그렇게 원하는 이미지를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그런 희한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이미지의 범람이 사람들의 감각에 영향을 미치고 인식을 변화시킨다. 해서 사람들은 자연 자체보다 자연 이미지에 더 친숙하고, 풍경 자체보다 풍경 이미지를 더 친근하게 느낀다.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감나고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고나 할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미지가 세상(그리고 현실을)을 대체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미디어 환경 이후 달라진 자연을 제안하고 풍경을 제시한다. 친근하고 낯선, 생경하고 이질적인, 차가운, 정적이고 고요한, 마치 세상이 정지된 것 같은,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데자뷰 같고 신기루 같은 풍경이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열어 보이는 것 같은 풍경이다. 그 풍경에선 일말의 서정성마저 감지되는데, 일종의 인공서정 내지 미디어서정으로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고 평온해지는 풍경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 풍경, 그 감정과도 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한 자연이며 풍경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일종의 유사 이상향이며 의사 유토피아에로 초대하는 그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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