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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연/ 욕망의 아이콘, 악기와 옷, 휴양지와 영롱하게 빛나는 몸

고충환


강지연은 유년시절 친구 집에서 본 그랜드피아노에 매료된다. 그래서 피아노를 그리고 바이올린을 그리고 첼로를 그리게 되었다. 이처럼 악기를 소재로서 도입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아마도 우연적일)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그 소재가 유년의 기억에 연유한 것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여기서 그 기억은 악기의 형태에 관련된 것일 수도 그리고 악기의 소리(음률)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시각(형태)적인 것일 수도 그리고 청각(소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유년의 기억과 악기를 매개시켜 형태와 소리가 상호작용하는 공감각(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청각적인)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악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강조한 심플한 화면구성이 미니멀리즘을 상기시킨다. 주로 흑과 백이 대비되거나 적색이 강조되는 색채감정을 음색으로 환원시켜보면 화려하고 장중한, 약간은 중후한 음색이 연상된다. 그리고 음질(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로 치자면 한지 고유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물성 속에 마치 소리가 스며드는 것 같은, 아니면 이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그런 내면적인 음질(질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편으로 프로이트에 의하면 악기는 여성을 상징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와 어우러져 성적관계며 성적합일상태(그 중에는 당연히 협화도 있겠고 불협화도 있을 것)를 상징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시각이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지만, 음악이 주는 감각적 쾌감을 남성주체보다는 여성주체의 성적 자질에 속한 것으로 본 전통적인 관념과도 통한다. 이처럼 작가에게 악기는 유년의 기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과거의 회상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종의 프루스트효과로 작용하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성적 아이덴티티가 투사된 반영물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서울 신사동에서 성장했다. 인근에 가로수길이 생기면서 하나둘 점포들이 들어서고 거리의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옷들을 보면서 자랐다. 제복이 옷의 사회학적 의미를 부각(이를테면 신분이나 계급을 강조)한다면, 이런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의상들은 특히 여성주체에게 욕망의 아이콘을 상징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옷을 매개로 바로 그 욕망의 아이콘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 실제 작업을 보면 주로 열린 옷장 속에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 형상을 조형한 것인데,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그대로 욕망을 투사한 것 같고, 한지 고유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이 옷의 질감과도 어울리면서 시각과 촉각이 상호작용하는 공감각을 예시해준다. 세세한 주름 하나하나, 그리고 자연스런 구김, 때로 바느질 자국마저 놓치지 않고 표현한 섬세한 손길이 정감을 자아낸다. 그렇게 옷들은 작가에게 욕망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고, 작가 자신의 또 다른 아이덴티티로 자리매김 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성장한 이후에 작가의 소재는 자연과 같은 전원이나 휴양지로 바뀐다(실제로 작품이 제작된 순서는 다를 수 있으나, 작가의 성장기 내지 연대기로 보면 그렇다). 자연이라고는 했지만, 자연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인공자연에 가깝다. 이를테면 하와이와 같은 실제로 작가 자신의 여행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일련의 그림들이 자연 자체와 인공자연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얼핏 자연 자체 같지만, 사실은 휴양지로 개발된 자연이다. 그런 만큼 휴양지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는, 어쩜 연출된 자연일 수 있다. 이를테면 발코니나 테라스에 서서 보면 탁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관, 끝도 없이 펼쳐진 백사장,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야자수와 같은 열대수종, 열대우림을 배경으로 발코니에 앉아 있거나 날아오르는 색깔이 화려한 앵무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 끝(아니면 바깥)에 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적당한 고요와 고립감에 이르기까지. 이런 장소를 미셀 푸코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를 뜻하는 유토피아와 비교해 초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장소를 넘어서는 장소, 장소 이상의 장소라는 말이다. 휴양이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된, 그리고 그 욕망에 부합하게끔 연출된 장소라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지상낙원(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는 낙원!)을 매개로 일탈을 꿈꾸고, 세상 바깥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다른 작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뚜렷한 편인 여체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다루고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조건에 주목한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양팔을 몸 안쪽으로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자세(태아자세?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자세?)가 오롯이 자기 내면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은 내면화의 경향성을 떠올리게 한다. 몸 안쪽에는 자잘한 자개조각들로 세공하듯 채워져 있어서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자개조각의 표면에서 영롱하고 미묘하게 변화하는 빛의 질감으로 대변될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상징할 것이다. 여성스러움 혹은 여성의 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욕망이며 자의식을 상징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는 내면화의 경향성이 뚜렷한 자세와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욕망이 부닥치고,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과 욕망을 억압하는 현실이 부닥치고, 현실과 이상이 충돌한다. 아마도 현실과 이상이 상충하는, 비루한 현실과 더불어 꿈을 꾸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유년의 기억과 성장기의 추억 그리고 성장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종래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일종의 개인적인 서사를 펼쳐 보인다. 그 과정에서 각각 악기와 옷이, 유토피아와 웅크리고 있는 인체에 반영된 내면화의 경향성이 매개가 되면서 그 기억이며 추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온다. 그건 무슨 성장소설 같고 사소설 같다. 그 서사는 비록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것이지만 여성의 성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나아가 인간일반의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으로 확장된다. 사람이 사는 꼴이 대개는 어슷비슷한 까닭에 쉽게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페티시 곧 욕망의 물화된 형식을 만날 수가 있는데, 악기와 옷이, 그리고 표면에서 영롱하고 미묘한 빛을 발하는 자개조각이 그렇다. 그리고 욕망의 물화된 장소를 만날 수가 있는데, 휴양지가 그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과 이상이 부대끼는 현실을, 그리고 그 현실이 꾸는 꿈을, 욕망을, 이상을 전개해 보인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은 회화인가. 보통 회화로 치자면 그린 그림을 일컫는데, 작가의 그림은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만든 그림에 가깝다. 회화성보다는 공작성이 강조되는 편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전개되는 서사 못지않게, 그리고 서사 이상으로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이 형식적인 특징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마치 종이 오려붙이기 놀이라도 하듯 한지 조각을 낱낱이 오려 붙이는 방법으로, 조각 위에 조각을 쌓는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형상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가 조형한 일련의 악기들에선 구조가 강조되고, 옷들은 주름이며 구김이 여실하고, 바다의 너울이며 야자수의 잎들이 손에 잡힐 듯 오롯하다. 사물대상의 성질에 맞춰 부각하고 강조하는 꼴이 다 다르다. 평소 사물대상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함께, 일일이 자르고 붙이고 쌓는 수공성과 공작성의 섬세한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조형은 일종의 한지 콜라주로 명명할 만하고, 이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른다. 미묘하지만 저부조 형식의 엠보싱을 통해 회화를 확장하고 자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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