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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명, 재현과 시지각 방식을 재설정하는 회화

고충환

부분과 전체 

바다는 일렁이는 수면과 수면 위에 부서지는 빛의 단면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 만큼 무작정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수면과 빛의 단면을 그리다보면 종래에는 그 그림들이 모여 바다 전체를 재구성할 수가 있을 것, 이라고 작가는 생각했다. 여기서 수면과 빛의 단면은 부분이었고, 그 부분들이 모여 재구성될 바다는 전체였다. 그리고 그렇게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이는 바다를, 바다 전체를, 바다 자체를 그릴 수가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부분을 그리다보면 전체가, 세부를 그리다보면 세상이 재구성될 수가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부분은 부분일 뿐, 전체는 전체일 뿐,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문제였다. 일단 전체에서 분리돼 나온 부분은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탈구된 그 자체 불완전한 부분으로서보다는 이미 스스로 자족적인 또 다른 전체였다. 

여기서 바다를 그리는 작가가 대면해야할 현실은 다층적이다. 인식론적 현실(관념적 바다), 감각적 현실(매순간 지금여기에서 직접 경험되는 바다), 감성적 현실(작가로부터 바다 쪽으로 건너간, 투사된, 감정 이입된 바다)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 복합적인 대상이다.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그래서 결코 고정적인 실체로서 붙잡을 수는 없는 대상이며 움직이는 대상이다. 그래서 어쩌면 언제나 부분적인 대상이며 지엽적인 대상, 오리무중의 대상이며 미증유의 대상이다. 그리고 여기에 회화적 현실이 있다. 어쩌면 바다의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순수한 색깔과 질감으로 이루어진 바다다. 여기서 바다는 다만 회화를 위한 구실이며 계기에 머문다. 그래도 여하튼 그것은 여전히 바다인가. 바다이면서 더 이상 바다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세부를 모두 그리겠다는, 모든 세부를 남김없이 다 그리겠다는 작가의 시도는 무모한 기획임이 드러났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전체를 그리고 자체를 그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이런 무모한 기획으로 인해 여하튼 또 다른 바다가 열리고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책장의 책처럼 열람할 수 있는 바다). 작가가 재현을 탈취하고 전유해 자기만의 회화를 여는 전략이고 방법이다. 

그리고 바다는 흙 그림으로 옮겨간다(변주된다). 이번에는 캔버스(엄밀하게는 캔버스 측면에 그린, 그래서 어떤 면에선 사이드스케이프를 예고하고 있는) 대신 바닥에 흙(모래)을 깔고 그 위에 바다를 그린다. 원래는 맹물로 그려야했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탓에 그나마 흔적이 어느 정도 지속되는 설탕물로 그렸다. 그래봤자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미미한 흔적마저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여하튼 애초에 이런 사라지는 그림, 휘발되는 그림, 증발되는 그림을 의도했으므로 사실은 맹물로 그린 것으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림을 작가는 왜 그렸을까. 과연 그 그림에는 모든 것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작가의 행위, 수행, 태도가 남는다(작가는 몇 시간이고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린다). 결국 예술은 수행이고, 이런 수행을 가능하게 해준 그림(어쩌면 감각적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수행이 가능해지지가 않는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어쩌면 그림(감각적 현실) 이면에 숨겨진, 그림을 매개로해서만 비로소 발현(보다 적극적으론 실현)되는 작가의 행위, 수행, 태도와 같은 비가시적 실체를 드러내기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작가의 프로세스를 모르는 상태에서, 말하자면 그림 자체를 대면할 때 그 수행은 다만 관객의 열린 의식 속에서 물어지고 답해지고 추체험될(때론 수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추체험될), 운명적으로 열린 것이다. 중요한 건 바로 이런 해석을 여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석을 주는 것이 아닌, 해석을 여는 행위가 예술이다. 캔버스 측면에 바다를 그린 그림(측면회화?)이 부분으로 전체를 그린다는 무모한 기획이었다면, 흙에다가 바다를 그린 그림(흔적그림?)은 사라질 운명의 흔적을 애써 그린다는 점에서 무상한 기획이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것은 이런 무상한 기획으로 인해 여하튼 수행이 발현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해석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재현을 탈취하고 전유해 자기만의 회화를 여는 또 다른 전략이고 방법이다. 여기서 캔버스 그림도 흙 그림도 하나같이 바다를 그린 것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바다야말로 가장 무모하고 무상한 대상이었을 것이고(누가 바다를, 바다 자체며 바다 전체를 그릴 수가 있는가), 그 자체 삶의 알레고리(무모하고 무상한 존재를 주지시키는)로 와 닿았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런 무모하고 무상한 그리기를 통해 또 다른 재현 가능성(재현 밖의 재현?)을, 헛그림을 통한 그림의 확장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사이드스케이프 

이처럼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사실은 탈 혹은 비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에 맞춰진다. 무모한 그리기와 무상한 그리기를 통해 또 다른 재현 가능성을 여는 것에 맞춰진다. 그건 사물대상을 직접 대면하고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보다는 사유과정을 통해 발췌되고 짜 맞춰지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사유의 여행이라고나 할까. 여행으로 치자면 작가는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한 편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좀체 작업실을 벗어나는 일도 없다. 이런 칩거형 작가에게 사유의 여행은 그렇다면 어떻게 실현되고 활성화될 수 있는가.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서이다. 특히 인터넷은 여행 없이 여행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게 해주고, 세상의 모든 현장을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인터넷의 출현은 창작환경을 눈에 띠게 변화시켜놓고 있는데, 구글 지도를 참조해 미지의 세계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내는 신종소설장르가 생기기도 했다. 여하튼 현실을 참조한 것이므로 현실을 담보할 수가 있고, 그럼에도 실제로는 전혀 가보지 않은 곳(경험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기도 한, 그리고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어떤 차원(펙션의 또 다른 형태?)이 열리는 것이다. 현실을 가공해 또 다른 현실을 여는 경우라고나 할까. 작가가 그렇고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발췌되고 짜 맞춰지고 재구성된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치자면 서핑과 매핑, 캡처와 프레이밍이 될 것이고, 미학적 용어로는 탈맥락과 재맥락이 될 것이다. 여기서 사물대상은 한갓 정보로 화해지고, 세계는 참조와 인덱스로 전이된다.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세계를 발췌하고 짜 맞추고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고, 현실을 가공해 또 다른 현실을 여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여전히 전형적인 회화의 아우라 그대로를 품고 있지만, 사실은 이런 인위적인 과정을 그 이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긴장감은 바로 이런 접점(인공적인 프로세스가 정작 전형적인 회화의 분위기를 밀어올리고 있는)에서 유래한다. 


사이드스케이프는 옆 풍경 혹은 곁 풍경이며, 구조적으로는 전작에서의 측면회화(사이드페인팅?)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보통 사진(정보도 그렇지만, 그리고 사진 자체가 이미 정보인)은 우연하거나 의도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소위 정면성의 법칙이 견지되고 적용되기 마련이다. 상황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기 마련이고, 이때 중요한 것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미지의 정치학과 계급 하이어라키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한 장의 사진 속에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극적인 것과 우연한 것,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이 같이 찍힌다. 여기서 작가는 중요한 것을 버리고 덜 중요한 것을 취하며, 극적인 것을 버리고 우연한 것을 취하며, 의도한 것 대신 의도하지 않은 것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원래 화면 가장자리에 있던 것을 화면 중심에 재정립한다. 그래서 그림은 마치 처음부터 다름 아닌 그것을 위한 것 같고, 그것을 의도해 그린 것처럼 보인다. 때론 뭘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회화 고유의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는 그림, 중심성과 정면성 그리고 자연성(자연스럽고 그럴 듯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그림, 사실을 말하자면 회화의 아우라 곧 중심성과 정면성 그리고 자연성을 탈취하고 전유하는 그림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잉여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잉여로 지목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예술과 종교 그리고 죽음이 포함된다. 여기서 자본주위에 대한 잉여의 관계는 이중적인데, 자본주의에 의해 배제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를 내재화한다. 그리고 예술의 무 혹은 비정형이 바로 다름 아닌 이런 대항논리의 형식이며 실천(지리멸렬한, 어떤 결정적인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나아가 모든 의미화의 기획에 반하는)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그러므로 가장자리에 있던 것(덜 중요한 것, 우연한 것, 의도하지 않은 것)을 화면의 중심에다 재정립하는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전통적인 회화의 관성(어떤 주제를 특정하고 지향하는)을 재설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잉여 곧 생산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을 매개로 생산성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관성을 재정립하고 재설정하려는 기획이며 실천논리를 정조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회화의 관성을 재설정한다고 했다. 그건 그림 속에서도 그렇고 그림 밖에서도 그렇다. 그림을 전시하는 방식이 그런데, 대개는 엽서 한 장 크기의 작은 그림들을 일렬로 연이어 배열하거나, 무슨 타일이나 벽지장식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을 채우면서 배치한다. 그런가하면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상호간 논리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크고 작은 그림들을 공간 여기저기에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걸어(때론 구석에 세워놓기도 하는) 어떤 공간풍경이라고 부를 만한 한 지경을 열어 놓는다.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의미 그 자체는 결정적이지가 않다. 배열과 배치에 연동된다. 배열이 달라지면 시지각 방식이 바뀌고, 배치가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작가는 그렇게 그림 안쪽과 바깥쪽에서 회화의 관성을 재정립하고 재설정한다. 



메모리스케이프 

그리고 작가는 불현듯 자신의 그림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비록 전쟁과 참사, 정치와 경제와 같은 사회적 현상을 다루지만 그건 엄밀하게는 발췌된 현실에 지나지 않고, 더욱이 그것도 변방인의 시각으로 본 것일 따름이다. 시지각 방식이 그렇고 그림이 그렇지만, 그리고 그 자체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이를테면 때론 현실에 대한 전혀 다른 비전을 열어 놓는 것과 같은), 그래도 여하튼 작가는 현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구실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밀양의 송전탑 건설현장, 여수의 기름 유출사고현장, 포천의 포격 연습장 폭발사고현장, 그리고 팽목항과 같은 사회적 현장을 찾고, 거기서 각종 잡다한 물건이며 쓰레기들을 수거해온다. 그리고 그렇게 수거해온 물건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 랩으로 싼다. 죽은 사람을 염하듯 죽은 사물들을 랩으로 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다. 죽은 사물들을 기념하는 것(죽은 사물들에 기념비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록 죽은 사람들은 없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물들 속에 들어있다고 봐야한다. 그러므로 죽은 사물들을 기념하는 것은 곧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다시, 죽음(생산성이 제로에 이른, 나아가 그 자체가 공공연하게 반자본주의를 증언하는)이야말로 가장 지극한 잉여라고 본 바타이유가 생각난다. 원래 그림의 가장자리에 있던 것을 그림의 중심으로 불러들여 회화의 관성을 재설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변방을 뒹굴고 있던 이름 모를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사물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작가의 행위는 사실은 잉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한데 뭉쳐진 사물 덩어리에 캔버스를 덧대고 그 위에 현장에서 취해온 풍경을 그린다. 마치 조각처럼 매스를 가지고 있는 그림, 마치 입체처럼 사방에서 볼 수 있는 그림, 말하자면 조각회화 혹은 입체회화와 같은 경계 위의 회화를 통해 재차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회화의, 조각의 전형성을 탈취하고 전유해 자신만의 회화를 열어놓는다. 지금까지 여러 번 회화가 죽었다가 다시 복귀하기를 거듭했지만, 작가에 의해 소환된 회화는 재현과 시지각 방식과 같은 회화의 관성(관습?)을 재설정한 것이란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경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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