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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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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스펙트럼_섬, 너라는 섬에 가고 싶다

고충환


컬러는 색채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시 주제에 부친 컬러스펙트럼은 다채로운 색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성격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섬은 전시가 열리는 대부도 유리섬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사람들 저마다 하나쯤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섬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컬러스펙트럼 - 섬>이라는 전시주제는 대부도 유리섬을 찾는 관객들에게 현대미술의 다양한 성격이며 경향을 제공한다는 표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작가들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섬에 관객들을 초대함으로써 관객들 역시 자신의 섬을 새삼 재발견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좀 더 의미심장하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섬은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을 의미한다. 고향일 수도 있겠고, 유년시절의 추억일 수도 있겠고, 존재론적 원형일 수도 있겠고,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상실감이 응어리진 아니면 앙금으로 굳어진 것이 섬이다. 창작이란 어쩜 그런 지극한 그리움(결여 혹은 결핍의식)이 섬으로 고착된 응축물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들은 저마다의 그리운 섬에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여기에 전통이라는 이름의 섬이 있다. 전통은 시간의 섬이다. 빛바래고 색 바랜 퇴적물의 섬이다. 세계의 저편으로부터 이쪽으로 유령처럼 시간들이 출몰하는 섬이다. 이기숙, 금영보, 최정윤, 그리고 김시현이 이 섬에 속한다. 산천초목과 숲 같은 자연을 매개로 존재의 생명력을 표현한 이기숙의 그림은 반추상적인 화면과 양식화된 표현, 빗살문양과 부챗살문양 그리고 땡땡이문양 같은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모두가 어우러져 마치 분청자기를 연상시키는 표면질감과 색감으로 전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영보의 그림 속에선 호랑이와 호랑이, 호랑이와 새가 서로 노닐고 어우러진다. 표정도 상황도 유아스런 천진함과 함께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설화 내지 민화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서사를 재해석해 자기화한 것으로 보인다. 최정윤의 아이콘은 검이다. 작가에게 검은 폭력의 도구로서보다는 정신을 상징하고 이성을 상징한다. 현대는 흔히 상실의 시대로 인식된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시대정신을 상실한 시대에 정신을 지키고 이성을 재건하기 위해 아득한 청동기시대로부터 검이 현재 위로 호출된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녹슨 검이 세월의 녹을 떨쳐내고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을, 그 소명의식이 실현되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김시현은 전통적인 보자기를 극사실로 그린다. 특히 색동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보자기는 귀한 물건을 고이 싼다는 점에서 복을 상징한다. 작가는 그렇게 복을 그리고 그 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근작에선 복을 넘어서는 경우로 보자기의 의미를 확장한다. 이를테면 표면에 코카콜라 로고가 프린트된 보자기로 부처를 싼다거나, 전통적인 색동천으로 사모트라케의 니케를 싼다거나, 군복을 상징하는 얼룩무늬 위장문양이 프린트된 보자기로 꽃을 든 여인을 싼다. 차용과 문화충돌 그리고 반전과 같은 미학적 장치를 끌어들여 주제를 심화시킨다. 지복상징으로부터 사회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로 보자기의 사용법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참여 작가 중 컬러스펙트럼이라는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이 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이미 섬이고, 여기에 저마다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섬을 닮았다. 흔히 상실감에 따른 보상심리를 자연에 기대하는가 하면, 자연에서 위로받고 치유 받는 경우들이 많다. 아마도 존재의 모태며 자궁과 같은 자연의 상징적 의미(자연은 존재의 어미다)와도, 그리고 자연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포용력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재효의 작업이 그렇다. 그러나 작가의 조각을 자연 자체로 보기는 어렵다. 자연을 가공해 인공적인 조형물을 만드는데, 주로 나무와 못 같은 재료를 가공해 만든다. 생긴 꼴이 각양각색인 나무의 꼴 그대로를 살리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집적시키고, 그 단면을 잘라 그렇게 자른 단면이 전면(표면)으로 돌출되게 만든다. 고른 표면 속에 고르지 않은 이면이 숨겨져 있는(그 자체 존재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크고 작은 원형과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들고, 더러 항아리와 유선형과 같은 자연적인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나무를 불에 태워 숯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무수한 못들을 박고, 그렇게 박힌 못들의 표면을 그라인더로 갈아낸다. 그러면 숯과 못이, 어둠과 빛이 대비되는 극적인 효과가 연출된다. 칠흑 같은 어둠 위로 빛 알갱이들이 아롱거리는 것 같은, 밤하늘에 별빛이 점멸하는 것 같은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불과 열을 견뎌낸 것이란 점에서 연금술적인(화학과 주술이 결합된?) 측면이 있다.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를 매개로 하나의 모듈 내지 단위가 반복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궈내는 자연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리고 형식논리가 있다. 추상과 반추상으로 범주화되며, 그 자체 미술 고유의 문법에 착안한 경우다. 그림이 떠올려주는 재현과 서사보다는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에 천착한 경우다. 한편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추상이 무언가를 암시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인간은 의미론적인 동물이고, 모든 사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야마는 동물이다. 심지어 한갓 점이며 미미한 얼룩에서마저. 그러므로 모든 의미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철저하게 무의미한, 완전한 추상같은 그림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수묵의 번짐 효과를 살린, 허허로운 여백의 묘미를 살린 그림이 바다 위의 섬을 상기시키고, 바다 위 허공을 나는 갈매기를 상기시키고, 정적인 가운데 잠재적인 움직임을 품고 있는 정중동과 같은 내면풍경을 상기시킨다(강영희). 몸으로 밀어낸 붓질(몸그림? 액션페인팅?)이 감각의 공간화를 암시하고(오형숙), 파토스와 에너지를 실은 존재의 생명력을 암시한다(최행숙). 얼핏 형식요소로 어우러진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숨겨진 의미가 보이는 그림들이다. 여기서 숨겨진 의미를 캐내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리고 이로 인해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이 섬들, 이를테면 전통에도, 자연에도, 그리고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에도 속하지 않는 섬이 있다. 외딴 섬이다. 그만큼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노춘석의 경우가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달리는 말과 인체와 같은 알만한 소재여서 친근하고, 그 소재를 재현하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아서 낯설다. 작가의 그림에서 붓질은 형태를 구축하는 일에 종사하기보다는 형태를 해체하는 일에 복무하는 것 같다. 그렇게 그림에서 형태는 해체되는 것처럼 보이고, 구축과 해체 사이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사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를 찾아보자면 입체파와 미래파를 들 수가 있다. 이 가운데 작가는 미래파에 가깝다. 입체파가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것은 한 면이 아닌 사통팔방에서 사물대상을 다 볼 수 있는 시각의 확장에 기인한 것이고, 미래파가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것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 추이, 과정을 하나의 화면에 압축된 형태로 펼쳐 보이기 위한 동시성의 표현 때문이다. 입체파가 공간 확장을 꾀하고 있다면, 미래파는 시간 확장을 추구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짧은 붓질이 겹겹이 중첩되고 포개진 동작이 잠정적인 움직임을 암시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림은 사물대상의 고정된 한 순간만을 포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랬다. 여기에 작가는 시간, 추이, 과정 그리고 움직임을 도입해 회화를 확장한다. 


우리 모두는 섬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는 외로운 고도(외딴섬)들이다. 여기에 창작은 더 그렇다. 창작이 관객과 만나지는 순간은 짧다. 그 짧은 순간에 비해 창작의 대부분은 철저하게 저만의 세상 속에 갇혀있다. 관객 없는 혈전으로 저마다 저만의 허깨비와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전통이라는, 자연이라는, 형식(혹은 형식논리)이라는, 그리고 시간(그리고 움직임)이라는 허깨비들이다. 이런 허깨비들이 비로소 의미를 덧입게 되는 것은 관객과 만날 때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들은 저마다의 섬에로 관객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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