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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무의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형상, 서사, 풍경

고충환

김명규는 얼룩을 그리고 얼룩으로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에서 얼룩은 결정적이다. 그 자체 얼룩이 변주된 경우랄 수 있는 물방울도 마찬가지. 구조적으로 작가의 그림은 뿌리기와 흘리기 그리고 여기에 얼룩과 물방울이 상호 연동된 경우로 나타난다. 먼저 뿌리기와 흘리기를 통해 바탕화면을 조성한다. 처음에 화면은 그저 무분별해 보이는 흔적과 얼룩과 자국을 보여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말을 터는데,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가 그림의 표면 위로 자기의 일부를 내어준다. 수사적 표현을 써 본 것이지만, 사실은 자유연상기법이다. 그저 무분별해 보이기만 했던 얼룩과 얼룩이 서로 스미거나 충돌하면서 어떤 형태가 연상된다. 그리고 그렇게 연상적인 형태가 또 다른 연상적인 형태를 부른다. 형태가 형태를 부르고, 의미가 의미를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 확장되면서 알만한 그리고 아리송한 형태가 찾아지고 의미가 찾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진 형태를 작가는 재차 자잘한 물방울로 뒤덮는다. 애써 찾아낸 형태를 덮어서 가린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작가의 그림은 무정형의 화면 가운데서 형태를 찾고, 그렇게 찾아낸 형태를 물방울 패턴으로 중첩시킨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게 중첩된 화면은 그리기와 지우기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잠정적인 형태를 찾았던 전작과 통하고, 그 과정이 변주 적용된 또 다른 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룩과 물방울 패턴이 작가의 그림을 구축한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얼룩과 물방울은 말하자면 모나드, 단자, 모듈, 의미소가 된다. 얼룩과 물방울이 모이면서 형태도 덩달아 구축이 되고, 흩어지면서 형태 또한 해체가 된다. 구축과 해체가 상호 내포적이고 상호 연동적이다. 구축된 형태 속에 해체가 있고, 해체된 형태 속에 구축이 있다. 얼룩도 물방울도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얼룩은 무규정적이고 물방울은 비결정적이다. 작가의 그림도 덩달아 무규정적이고 비결정적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무규정성과 비결정성을 회화의 조건으로 삼고 그림의 지표로 세운다.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마구 흐르다가 맺힌 자국들, 서로 스며들다가 굳은 흔적들, 서로 화합하거나 충돌하는 색깔들, 분방한 드로잉과 가장자리 선으로 형태를 규정하거나 면을 채우는 중첩된 선묘, 표면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며 아롱거리는 총총한 물방울들,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한 형태들, 그리고 나무와 숲과 물이 있는 풍경. 

작가의 그림은 상호간 이질적인 층위들이 분별되게 그리고 때로 무분별하게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고 있고, 형식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차이나는 레이어들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진다. 추상과 구상, 알만한 형상과 아리송한 형태, 그 자체 형식논리가 강한 기법과 재현적인 묘사, 그리고 우연성과 필연성이 그 경계를 넘나들고 허물면서 아우러지는 그림이 친근하고 낯설다(캐니와 언캐니). 알만한 형상이기에 친근하고, 그것이 재현되고 재구성되는 방식이 이질적이어서 낯설다(여기서 재구성은 관계를 의미하며, 새로운 관계형성을 통해 차이를 생성시키는 것은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생생하다고나 할까. 

생생한 비현실성? 알만한 형상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보면 볼수록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치고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얼핏 군인과 투구를 쓴 병정, 여자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 말과 사슴 같은 동물들, 그리고 나무와 숲과 같은 자연풍경이 있지만, 사실은 어떤 대상을 특정해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어떤 대상같이 보일 뿐인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들이다. 이런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들이 질 들뢰즈의 00되기(리좀과 함께 생성철학의 핵심인)를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의 00되기는 선입견으로 굳어진 의미며 형태를 전유하는 흉내 내기를 통해서 사실은 차이를 생성시키는(모방을 흉내 내는 척하면서 사실은 모방을 배반하는), 그럼으로써 결정적인 의미며 형태를 요구하는 제도의 관성에 반하는 실천논리가 되고 있다. 때로 결정적인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나아가 아예 존재치고 어떤 결정적인 의미로 한정되는 경우가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미처 의미화 되지도 특정의 의미로 한정되지도 않는 것들을 제도의 관성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며, 다의적이고 다성적인(미하일 바흐친), 차이 나는 의미며 다른 목소리들의 다발을 포함하는 존재 본래의 생리가 발현되고 생성되도록 그 계기를 열어주는 것이다. 00되기는 말하자면 다만 00처럼 보일 뿐인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를 매개로 존재 본래의 비 혹은 무규정성(생명성? 운동성? 이행성?)을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본성을 회복한 사물대상들이, 비록 현실을 닮아 있지만 사실은 비현실적인 사물대상들이 생생하다. 이런 생생한 사물대상들이 어우러진 아리송한 풍경이 꿈을 암시하고, 꿈이 열어 보이는 비전에 매료되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을 상기시킨다. 초현실주의자에게 꿈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다. 현실을 옥죄던 억압의 고삐가 풀리면서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 꿈인 것이며, 현실에 더해 억압된 현실을 포함하는 만큼 그 자체 비현실이기는커녕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이다. 이런 연유로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몽환적인, 환상적인, 장식적인, 그리고 비현실적인 생생한 풍경은 이렇듯 억압된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며 형식논리로 보면 되겠다. 그 형식은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탓에, 비 혹은 무규정적인 탓에 마치 하이퍼텍스트처럼 사실은 그 서사가 밑도 끝도 없고, 흡사 하이퍼링크처럼 상호간 이질적인 것들과 마구 접속해 매번 다른 관계망을 생성시킨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자동기술법(무의식으로 그리기)과 자유연상기법(의식의 흐름 곧 의식이 흐르는 대로 그리기),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링크를 매개로 서사와 서사, 의미와 의미, 형식과 형식이 자유자재로 접속되고 분절되고 생성되고 확장되는 꿈(그리고 때론 기억)의 서사를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차이를 생성시키는,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그 밑바닥에 얼룩이 있다. 얼룩은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바탕이며 그림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마구 흐르다가 맺힌 자국들, 서로 스며들다가 굳은 흔적들, 그리고 표면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며 아롱거리는 총총한 물방울들마저도, 나아가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한 형태들까지도 알고 보면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형태치고 얼룩 아닌 것이 없다.

얼룩은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다. 미처 형태를 얻지 못한 선형태다. 자기 속에 가변성의 변수를 잉태하고 있는 가능적인 형태 곧 가능태다. 이런 가능한 형태가 어우러지면서 투구를 쓴 병정처럼도 보이고, 사람처럼도 보이고, 사슴처럼도 보이고, 풍경처럼도 보인다. 가변성의 변수에 연동된 것인 만큼 그 풍경은 지금 다만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항상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이고 미완의 것에 머문다. 비록 지금 어떤 풍경처럼 보이지만 언제 어떻게 다른 풍경으로 변질될지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은 모두 그렇게 해체 가능성과 재구성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생생하고 불안정하다. 사실은 존재의 생리가 그렇고, 작가의 그림은 마치 존재의 생리를 그림으로 옮겨 그린 것처럼 생생하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얼룩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형태, 다만 암시적이고 잠정적인 형태가 조르주 바타이유의 무규정적인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바타이유에게 무규정적인 것은 자본주의의 상품화의 기획에 반하는 실천논리가 되고 있다. 들뢰즈의 생성철학이 의미를 결정화하려는 제도의 관성에 반하는 것(무의미함으로 해서 의미 있는 것)이라면, 바타이유의 무규정성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논리에 비생산성의 논리(비생산적인 것임으로 해서 생산적인 것)를 대질시킨다. 생산성을 위해 모든 존재는 기꺼이 상품이 되어야 하고, 상품이 되기 위해선 그 의미며 꼴이 규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 의미며 존재방식이 무규정적이라면? 가변적이라면? 비결정적이고 잠정적이라면? 그래서 바타이유는 무규정성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위반을 보고, 예술의 가능성을 본다. 얼룩이 꼭 그렇다. 얼룩은 말하자면 규정적인 것에 대한 위반이고, 무규정적인 것의 표상형식이다. 그리고 다시, 얼룩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얼룩으로부터 태어나고 얼룩 속으로 죽는다. 모든 존재는 먼지(그 자체 작은 얼룩인)에서 유래했고 먼지가 돼 사라진다. 모든 존재는 무규정적인 상태로 태어나 재차 무규정적인 것으로 되돌려진다. 어쩌면 존재가 유래한 최초의 카오스는 알 수 없는, 잠정적인, 거대한 얼룩 덩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 모든 것이 있고, 없다. 그 속에 세상 전체며 자체가 다 들어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랜 성벽에 난 얼룩을 보면서 전쟁을 보고, 홍수를 보고, 세상풍경을 본다. 심지어는 성당의 종소리마저 듣는다. 보면서 들으니 공감각이고, 보는 것을 통해 듣는 것을 유추하니 상상력이다. 작가는 바로 그런 얼룩을 그리고, 얼룩이 흩어지고 모이는 생리를 따라 세상 모든 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내면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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