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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킴/ 쌓이는 것들, 흐르는 것들, 덧없는 것들

고충환

마티스는 회화의 본질은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색채가 표현이라고도 했다. 회화란 결국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색채가 자기표현 곧 회화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노년에 더 이상 그림 그리기가 어려워졌을 때 색종이 오려붙이기로 그림을 대신했던 색채 화가다운 말이다. 바니킴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색채다. 현란한 원색에 주저함이 없고, 오방색의 분별되거나 무분별한 수용에선 몸에 밴(체화된) 색채감정이 묻어난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계획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고, 개념적이기보다는 즉흥적인 색채감정이 생의 환희(바이털리티)와 내적 에너지의 자유자재한 분출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온갖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들, 자국이며 흔적들, 화면을 내지르는 거침없는 붓질들, 그리고 질박한 마티에르가 어우러진 화면이 표현주의를 떠오르게 하고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표현주의는 다른 경향성의 회화에 비해 주체와 세계와의 연동성이 긴밀한 편이다. 세계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표출되는 편이다. 이를테면 세계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어두우면 그림도 어둡고, 세계감정이 밝으면 그림도 빛난다. 표현이란 원래 주체의 내면에 속한 무언가가 외부로 표출되면서 자기표현을 얻는 것을 말한다. 원래 주체의 내면에 속해져 있었던 무엇? 바로 기, 에너지, 파토스, 약동하는 생명 그리고 억압된 욕망(리비도?)과 같이 그 자체 비가시적이고 비결정적인 그리고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운동성) 것들이 자유자재로 흐르면서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내면풍경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그 풍경은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재현으로서보다는 추상에 가깝다. 그래서 추상표현주의다. 추상표현주의란 액션페인팅을 말하며, 다르게는 몸 그림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액션페인팅 자체가 몸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추상은 형식논리에 속하고, 표현은 주체의 내면에 속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과 주체가 서로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상호작용하는, 추상과 표현이, 형식과 내면이 상호간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들어지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처럼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색채는 질감에 연동된다. 색채와 질감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화면이 그림을 결정한다. 색채만큼이나 질감 역시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질감과 관련해선 회화와 함께 작가의 화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판화(판법)에 대한 남다른 이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그린 그림(페인팅)과 찍어낸 그림(프린팅)이 하나의 화면 속에 중첩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첩되면서 서로의 경계 너머로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얼핏 그 차이를 가름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만큼 이질적인 경우를 하나의 유기적인 화면 속에 어우러지게 만드는 작가의 남다른 조형능력으로 봐도 되겠다. 그림에서 보면 격자 형태의 망구조나 화면을 가로지르는 섬세한 줄무늬 패턴이 그렇다. 흔히 회화를 직접적이라 하고, 판화를 간접적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게(찍어내게) 만들어주는 중간 매개체가 요구되는데, 그게 판이고 엄밀하게는 판각된 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도 당연히 이런 망구조나 줄무늬 패턴을 가능하게 해준 판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목판이나 고무판 아니면 실크와 같은 매개 역할을 해주는 판이 있어야 하지만, 작가의 그림에선 이런 판이 없다. 판이 없다? 판이 없는 채로 프린트된 이미지를 얻는다? 사실은 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판을 대체했다. 생활용품이며 건축자재를 파는 몰에서 구입한, 그 이면에 격자 형태의 망구조나 줄무늬 패턴이 각인된 고무패드로 판을 대신한 것이다. 판을 레디메이드로 대체한 것인데, 판화 혹은 판법의 확장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판화를 찍으려면 판과 함께 프레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의 경우에는 판도 없고 프레스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판을 레디메이드로 대신한 것처럼 작가의 몸이 프레스를 대신한다. 말하자면 고무패드의 요철 부위에 잉크(안료)를 칠한 연후에 그걸 화면에다 대고, 직접 화면 위에 올라서서 밟아 누르는 과정을 통해서 프린트된 이미지를 얻는다. 평소 판화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생활 속에서 예술의 계기를 찾는 예술에 대한 유별난 관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서, 작가의 그림(페인팅)은 유독 몸 그림에 가깝다고 했다. 여기에 프린트된 이미지(프린팅)마저 몸으로 찍어냈다. 이쯤 되면 작가의 그림은 몸을 도구로 사용해 그린 그림이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온몸을 던져서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회화와 판화, 페인팅과 프린팅이 어우러져 작가 고유의 화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여기에 사진이 부가된다. 사진? 도대체 작가의 그림 어디에 사진이 있는가? 작가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데, 사실은 크기와 사정에 맞게 재단한 롤 형태의 인화지에다 그린다. 인화지에는 이미 특정의 이미지가 인화돼 있는데, 자기 그림을 부분적으로 확대 인화한 이미지다. 일종의 자기차용을 수행한 것인데, 여기엔 단순히 차용된 원본에 따른 저작권 문제를 피하기 위한 것 이상의,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탑재돼 있다. 이를테면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론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으로 뒷받침되는 일상성 담론에서 자기차용(혹은 자기반복 혹은 자기복제)은 결정적이다. 워낙에 작가의 그림 자체가 추상적이고, 여기에 부분을 확대한 것이며, 이처럼 원본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원본 이미지가 흐려지면서 망점이 깨지는 현상이 더해지면서 인화된 이미지는 그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비정형의 얼룩이며 흔적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도 얼룩처럼 보이고, 인화된 이미지도 흔적처럼 보인다. 다만 프린트된 이미지가 기하학적 형태며 정형화된 패턴으로 그 비정형 혹은 무정형성을 일정정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얼룩과 흔적으로 나타난 유기적인 화면으로 생명이 흐르게 하고, 망구조로 나타난 기하학적 패턴으로 화면 내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화면에선 회화와 판화 그리고 사진과 같이 상호간 이질적인 장르며 기법의 층위들이 상호부침하거나 삼투되면서 특유의 화면질감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에선 이처럼 비정형 혹은 무정형이 특징이다. 특징이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추상적이지는 않다. 꽃과 나무, 산과 바위와 같은 자연소재로부터 이따금씩 집과 같은 기하학적 패턴이 변주된 형태에 이르기까지,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화면에는 각종 알만한 형상들이 마치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화면 속에 포치해 있다. 알만한 형상들이지만, 그 자체 재현적인 문법으로서보다는 일정정도 추상화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추상화된 형상들이 비정형의 얼룩이나 흔적 그리고 자국과 어우러진다. 보기에 따라선 형상 자체보다는 이런 얼룩이나 흔적 그리고 자국이 주제인가도 싶다. 얼룩들이 어우러진 화면이 암시하는 어떤 분위기, 아우라, 질감이 주제인가도 싶다. 무슨 말인가. 회화와 판화와 사진이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비정형의 얼룩과 기하하적 패턴 그리고 무분별한 붓질이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유기적인 화면이 일종의 겹 구조(레이어 구조)로 나타나고, 이를 매개로 그 자체 비가시적인 실체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감정과 시간처럼 쌓이는 것들에, 바람과 대기처럼 흐르는 것들에, 순간적인 인상처럼 덧없는 것들에 형태를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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