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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호, 플록코트를 입은 낭만주의자

고충환

비닐봉지. 비닐봉지가 날아다닌다. 세계 도처를 날아다닌다. 정처 없이 날아다닌다. 그렇게 비닐봉지는 오지에도 가고 도시에도 간다. 평화로운 곳에도 가고 분쟁지역에도 간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비닐봉지는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흩뿌리는데, 씨앗이다. 생명의 씨앗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무슨 인격체마냥 비닐봉지의 시각에 포착된 세상을 보여주고 비닐봉지가 본 세계를 보여준다. 생명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는 전도사로 의인화된 비닐봉지를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서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정처 없는 삶의 알레고리 같고, 빈 봉지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의 공수래공수거를 변주한 것도 같다. 

또 다른 작업에서 비닐봉지가 실내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비닐봉지들이다. 선풍기의 바람에 반응하면서 비닐봉지들이 코너에 몰려 있는 것도 같고 웅성거리는 것도 같다. 그렇게 뜻 모를 소리로 웅얼거리면서 이따금씩 꽤 높게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코너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게 꽤 높게 날아오른 비닐봉지가 영상으로 재현된 둥근 달을 스치면서 달 표면에 패턴을 만들고 달그림자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부친 제목(달빛 소나타)마냥 꽤 낭만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굴삭기들이, 가습기가, 하이웨이와 자동차 모형이, 그리고 여기에 하늘을 나는 아톰과 같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끼어들면서 낭만적인 풍경은 그로테스크한 정경으로 변질되고 소나타는 레퀴엠으로 전환된다. 실제로는 하나같은 모형들이지만 근접 촬영한 영상이 실물처럼 보이고, 저보다 큰 키로 벽면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낯설게 보인다. 그렇게 어떤 굴삭기는 연신 물을 퍼내고 다른 굴삭기는 뻥튀기(웬 뻥튀기?)를 퍼내지만 대부분의 굴삭기들은 그저 헛 삽질을 반복해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가습기가 뿜어내는 연무가 마치 건물굴뚝이 뿜어내는 오염물질 같다. 아마도 무분별한 개발과 경제드라이버를 풍자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동차 모형이 미친 것 같은 속도로 하이웨이를 내달린다. 그렇게 내달려봤자 한정된 틀 안을 무슨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맴돌 뿐이다. 아마도 더 이상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고삐 풀린 속도경쟁을 풍자한 것일 터이다. 이 모든 을씨년스런 정경 위로 아톰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닌다. 여기서 아톰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구원하러온 정의의 사잔지 아니면 미친 세상에서 파견된 감시잔지가 불분명하다. 
그렇게 작가는 저 홀로 선한 빈 봉지의 눈에 비친 무슨 세기말적 풍경 같은 세상풍경을 보여준다. 그 배경음으로 랩소디가 음울하게 깔리는 무슨 느와르 영화 속 한 장면(흔히 뒷골목에 비닐봉지가 굴러다니는) 같은 세상풍경을 예시해준다. 

십 원짜리 동전. 하늘에서 십 원짜리 동전이 비처럼 솟아져 내린다. 마치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신을 맞아들이는 디아나를 그린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 같다. 때로 십 원짜리 동전은 눈에 띠게 천천히 떨어져 내리면서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고 아롱거리는 것이 환상적이고 신비스럽다. 환상적이다? 신비스럽다? 바로 아우라다. 물신이다. 재화는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재화를 꿈꾸고 대박을 꿈꾼다. 여기에 국내외 정치사의 단면들이 배경화면으로 흐르면서 오버랩 된다. 영상 속 선남선녀들이 재화를 약속하고 대박을 약속한다.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지상낙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애초부터 지키지 못할 빈말임이 드러나고 허언임이 폭로된다.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없었다(유토피아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란 의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약속한다? 이로써 작가는 일장춘몽의 부질없음(꿈 깨!)을 주지시키고, 정치적 선동과 거짓말의 덧없음(거짓말 하지 마!)을 주지시킨다. 

뻥튀기. 이번에는 하늘에서 뻥튀기가 솟아져 내린다. 건물 뒤에 숨은 뻥튀기 기계로부터 무슨 총이라도 쏘듯 느리게 때로 빠르게 연신 뻥튀기를 하늘로 쏘아댄다. 그렇게 수북이 쌓인 뻥튀기를 사람들이 와서 먹는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 사람들을 먹였다는,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였다는 성경의 오병이어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 식량문제, 정당한 분배와 관련한 정의의 실현문제를 주제화한 것일 터이다. 여기에 뻥튀기와 관련한 작가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최초의 발상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작업에서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포장용기로 뻥튀기를 포장한다. 가장 값 싼 것을 가장 값 비싼 용기로 포장한다? 여기서 작가는 아이러니를 건드린다. 사람들은 프라다에 주목하지, 누구도 뻥튀기에는 관심조차 없다. 여기서 프라다는 실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프라다 포장지며 프라다 로고면 충분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건 한갓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알맹이고 실재다. 알맹이가 있고서야 포장지가 의미가 있고, 실재가 있고서야 상징이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로써 작가는 누구도 실재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시대, 이미지를 좇고 겉보기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풍자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거나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새삼 되새기게 만든다. 

생각하기. 그리고 작가는 각각 밥그릇을 발로 차는 행위에 대하여, 허물어진 건물에 대하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한 템포 쉬면서 엄숙한 자세로 생각한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끊고 정중한 태도로 생각에 잠긴다. 다시 밥그릇을 발로 찬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를 반복해 보여준다. 왜 작가는 죄 없는 밥그릇을 발로 차는가. 그리고 자기가 찬 밥그릇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작가의 이 작업은 역설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 즉 밥그릇을 발로 차는 작가의 행위는 사실은 밥그릇을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연탄을 발로 차지 마라는, 너는 저 연탄처럼 자기 몸을 불살라 다른 누군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준 적이 있느냐고 연탄을 발로 차는 사람을 질책하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먹고사는 문제는 그저 존재를 연명하기 위한 일차원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존엄에 속한 문제라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얼마 전 멀쩡한 건물이 무슨 피사의 사탑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작가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지금 그 건물은 첨단의 해체공법으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실없이 반문해오는 것도 같고, 심지어 소음도 먼지도 없는 것이 무슨 게 눈 감추듯 뚝딱인 것도 같다. 현실과 초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이미 초현실이고, 초현실이 진즉에 현실이었다. 황금시간대에 속하는 저녁뉴스가 온통 이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성과 비이성의 차이가 지워지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상으로 도배돼 있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치부는 가급적 빨리 숨기고 가리고 지워지고 사라져야 한다. 작가는 그 치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작가는 한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같은 사람들(노부부?)의 모습을 기록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읍내에 있는 주민 센터나 노인정에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것일 터이다. 일상은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똑같은 일의 연속이고 반복이다. 그러나 사실은 똑같지만 똑같지가 않다. 미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반복속의 차이, 그 속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살고 실천하는 일의 소중함을 주지시킨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리고 굳이 몰라도 상관이 없는 익명적 주체들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일이 어떤 경건함(무슨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서와 같은)마저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일련의 설치미술을 통해 환경오염으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에 대하여,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새 시대(아마도 환경이 눈에 띠게 개선된 시대)가 열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환경을 주제화한 한편, 그 주제를 실제 환경 속에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지예술로 볼 수가 있겠다. 

주로 영상이지만, 작업 속에서 작가 이경호의 모습은 한결 같다. 목을 덮어서 가린 긴 뒷머리와 깃을 세워 입은 플록코트가 시대착오적인 수도승 같은 인상을 준다. 나만 그런가. 여하튼. 짐짓 진지하고 경건함마저 자아내는, 시대에 대한 입장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낭만적(혹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을 떠올리게 만든다(리얼리스트가 아니고?).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은 비닐봉지와 십 원짜리 동전, 뻥튀기와 밥그릇 같은 하찮은 것들, 별 볼일 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 일상을 사는 문제, 그리고 환경과 같은 평범한 문제를 고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문제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이런 소외된 것들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 모든 삶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다. 밥그릇을 발로 찰 때(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도, 건물이 붕괴될 때(시대가, 사회가 허물어질 때?)도, 일상이 중계되고 환경이 재앙에 처했을 때도 그곳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있었다. 스스로를 현장의 증언자이며 시대의 목격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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