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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섭, 기억의 재구성과 재구성되는 현실

고충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 말을 동시대적 버전으로 옮기면 호랑이는 죽어서 모피를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사진을 남긴다는 말로 고쳐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 이후 자연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도구적 자연관이 가속화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고, 삶의 행태가 낱낱이 관찰되고 기록되고 보존되는, 그렇게 삶의 세목이 고도로 시스템화 되고 인덱스화 되는, 심지어 그리고 그렇게 개별주체의 무의식마저 파고드는 사진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도구적 자연관과 사진적 현실은 서로 공모관계에 놓인다. 도구적 자연관이 자연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듯, 사진적 현실 역시 삶의 행태를 욕망을 위한 도구로 변질시킨다. 그기에 자연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자연성과 본성, 야성과 야생과 같이 소여된 것 곧 저절로 주어진 것은 철저히 배제된다. 최소한 시스템으로 인덱스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스템 바깥에는 인덱스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 

사진 이후 현대인의 삶은 온통 사진으로 시작해서 사진으로 끝난다. 백일사진이며 돌 사진 이전부터 사진은 존재를 기록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인큐베이터(아니면 산후조리원)와 자궁 속으로까지 기록은 소급된다. 그리고 죽을 때 나아가 죽은 이후에마저 영정사진이 고인을 위해 그리고 고인을 추억하려는 산 사람을 위해 남겨진다. 인식 이전단계부터 인식의 불이 꺼진 이후에 이르는 삶의 전 과정에 사진은 따라붙는다. 이런 집요함을 생각하면 삶이 사진으로 시작해 사진으로 끝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 한마디로 무차별적으로 세계를 도구화하는 툴로 치자면 사진만한 것도 없다. 

이를테면 작가 김경섭의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흔히 가족모임 때도 사진을 찍고, 소풍을 가도 사진을 찍고, 관광지에 가도 사진을 찍는다.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가족이 모이고 소풍을 가고 관광지를 찾는 것 같다. 사진이 없으면 가족모임도 소풍도 관광지도 없다. 사진이 아니면 누군지 어떠했는지 심지어 어딘지조차 막막해지고 아득해진다. 여기서 사진은 기억과 만난다. 기억을 위한 장치를 위해, 대신 기억해주는 장치로서 사진은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살가움, 소풍에 동반되는 들뜬 기분, 그리고 관광지에 수반되는 놀이(아니면 기념비성?)는 증발되고 오로지 증거와 증명을 위한 차가운 현실만 남는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삶은 사진을 매개로 다만 증거와 증명을 위한 무미건조한 현실로 변질된다. 삶이 사진적 현실로 변질되고 대체되는 것. 

너무 차가운가. 너무 무미건조한가. 개인적으로 사진은 따뜻한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차갑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사진 속 현실은 사실은 일종의 여백으로 작용하고, 그 여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온기가 발생하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역설적 현실 아니면 역설적 표현(사진을 사진이게 해주는 미학적 근거며 가치는 사진 속 여백 곧 가시적 현실이 아닌 비가시적 현실에서 온다는 점)으로 뒷받침되는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김경섭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은 한눈에도 그 출처가 사진에서 건너온 것임을 알게 된다. 대개는 풍경이 등장하고 그 풍경을 배경으로 모티브에 해당하는 이러저런 인물들이 중첩되는 것이 그렇고,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정면을 의식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정면성의 법칙?) 사람들이 그렇다. 사진 고유의 전형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그렇게 그림에는 작가의 유년이 등장한다. 누구든 한번쯤 겪거나 목격했을 사고 장면이 등장한다. 대개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감정표현이 어색한(인색한?) 탓에 지금도 여전히 어렵기만 한, 터미널 앞에서 작은 가게를 했던,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등장하고, 이러저런 가족사진이 등장한다. 작가 자신의 군 복무 시절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등장하고, 소녀시절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엄마의 소풍장면이 등장한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흡사 개인사적인 삶의 순간들을 보는 것 같고, 익명적인 주체 아니면 무명씨들의 삶의 계기들을 보는 것 같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 사는 꼴이 어슷비슷한 탓에 누군가의 혹은 아무나의 사진앨범을 들춰 보는 것 같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그림들을 왜 그렸을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싶었던 것일까(자기반성적인 계기?). 아니면 익명적인 주체들의 익명적인 삶에 기념비적인 성질을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일까(보통의 삶에 바치는 오마주?). 혹은 우리 모두는 한 장의 사진 속에, 한 권의 사진앨범 속에, 한 편의 영화 스크린 속에 이미 들어와 있어서 저마다의 삶을 연기하고 전시하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일까(스펙터클 소사이어티?).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 모두가 이유이며 구실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차제에 작가의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계기들로 볼 수도 있겠다. 

다시, 그렇다면 이게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여기가지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읽은 것이고, 작가의 그림에는 이보다 더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작가가 그림 속에 인용하고 처리해놓고 있는 사진들은 사실은 하나같이 실패한 사진들이다. 왠지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하고,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은 것처럼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바로 모호한 그리기와 짜 맞추기 곧 편집의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이 속해져 있는 과거를 그린 것이고, 과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기억을 그린 것이다. 사진을 매개로한 기억을 그린 것이고, 기억을 왜곡하고 간섭하는 현재를 그린 것이고, 기억(과거)과 욕망(현재)의 상호작용을 그린 것이다. 여기서 가다머의 지평융합 개념을 전용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기억을 재생한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현재의 간섭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기억이 속해져 있는 지평(과거)과 간섭이 작용하는 지평(현재)이 합치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왜 기억을 간섭(그리고 왜곡)하는가. 그리고 기억을 간섭하는 현재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기억을 간섭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자기에게 이로운 기억을 부풀리고 해로운 기억은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워진 기억이 트라우마가 돼 무의식 속으로 잠수를 탄다. 그래서 욕망이다. 욕망이 기억을 과장하고 각색하고 변장하고 전치하고 편집하고 삭제한다. 흐릿한 기억은 말하자면 시간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보다는 주체(그리고 타자)로 하여금 기억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욕망의 방어기제(방해 작용 그리고 때론 보상작용)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욕망이 봉해놓은 기억의 실체가 실재계를 이루고, 실재계는 억압된 욕망인 탓에 멀쩡한(사실은 멀쩡해 보일 뿐인) 현실의 암적 존재 혹은 암울한 그림자가 된다(슬라보예 지첵은 실재계를 불모의 사막에 비유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기억의 재구성과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외관상 사적 서사며 전기를 테마로 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회화로 보이지만, 그건 다만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작가의 그림에 대한 입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사적 서사며 전기에 해당할 사진들을 매개로 사실은 기억을 그리는 것이며, 기억작용(기억의 운동성)을 그리는 것이며, 기억된 현실(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기억은 과연 사실인가.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었는가. 기억은 혹 착각은 아닌가. 그래서 종래에는 기억이 착각으로 착각이 기억으로 자리바꿈된 나머지 기억과 착각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착각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진을 매개로한 작가의 그림은 이런 기억과 관련한, 그리고 기억에 의해 지지되는 현실(기억이 없으면 현실도 현실인식도 없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일들, 작용들, 사건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나는 오로라를 보았다고 유년의 작가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사후에 밝혀진 일이지만(사후판명성), TV나 잡지 같은 매체를 통해 본 것을 실제로 본 것이라고 생각(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기억 속에 잡지도 매체도 없다. 그렇다면 오로라를 보았다는 기억은 어떻게 무엇에 의해 지지되고 그 근거가 마련되는가. 혹 처음부터 근거가 없었다면 오로라에 대한 기억은? 그 기억의 실체는? 일련의 기억 시리즈(임의로 붙여본 것이지만, 여하튼)를 시작하게 된 동기에 해당하는 이 그림에서 오로라는 그리고 그 실체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오로라는 말하자면 이후 기억을 그린 작가의 그림 전체를 지지하고 관통하는 상징적 사건이고 장면에 해당한다. 여기서 오로라는 이상을 상징한다(다르게는 욕망으로 봐도 되겠고, 때론 그 부정형으로서의 외상이 형성되는 경로도 크게 다르지가 않다). 아마도 어린애다운 이상을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른이라면 유토피아를 이상으로 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어른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여기서 오로라의 실제 유무는 중요하지가 않다. 문제는 욕망이다. 욕망이, 이상이, 외상이 왜 무엇과 어떻게 들러붙는지를 따져볼 일이다. 그건 개인차에 따라서 사물에, 사람에, 사건에, 풍경에, 장면에 각각 들러붙는데, 이로써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꿈꿀 수 있는 공간을 축조하는 것이다(그 자체를 무의식의 건축술로 부를 수도 있을 것). 

착각을 기억으로 고착시키는 것은 말하자면 욕망이다. 이러한 사실이 적용된 느슨한 예를 작가가 개인전을 열고 주변사람들을 전시에 초대한 상황을 상상(사실은 무의식적 욕망?)해 그린 그림에서 엿볼 수가 있다. 전시장에는 일가친척들이 초대되었다. 아마도 다른 누구보다도 더 일가친척들에게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작가는 잭슨 폴록과 같은 거장도 초대했다. 작가 역시 폴록 같은 거장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폴록에 대한 오마주? 그런가하면 라운드 걸도 초대를 받았다. 정글과도 같은 예술 판에서 아마도 작가도 다른 누군가처럼 승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 기계적인가. 이건 엄밀하게는 착각도 기억도 아닌 트렌드 아니면 단순한 상상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상상 역시 알고 보면 욕망이 느슨한 형태로 실현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 경우가 다르겠지만(이를테면 부정적인 경우) 외상을 은폐하는 것, 은폐하면서 드러내는 것, 숨기면서 사실은 구원을 요청하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작가는 아버지와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 일가와의 관계, 동료들과의 관계 그리고 때론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경우일 것인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낸다. 드러낸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이때의 드러냄은 이중적이다. 사실은 드러내기와 숨기기가 때론 느슨하게 그리고 더러는 숨 막히게 중첩되고 포개져 있어서 그 실체가 쉽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작가가 현재 그려놓고 있는 그림만 놓고 보면 그 실체가 그나마 좀 잡히는 편이지만, 모르긴 해도 이 문제에 작가가 더 깊이 파고드는 순간, 그래서 무의식에, 심연에, 억압된 욕망의 실체에, 실재계에 대면하고 직면하는 순간, 때론 작가 자신에게마저 그 실체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미처 인식하지 못할 뿐 일정 부분 이미 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작가의 개인사를 넘어 사회적 무의식, 역사적 무의식, 원형적 무의식, 존재론적 무의식에 당도할 수도 있다. 그 자체 작가에게 펼쳐진 미지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고, 앞으로 작가의 그림이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고편으로 봐도 되겠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런 예상되는 전개를 기계적으로 답습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억답게, 착각답게, 무의식답게, 욕망답게, 종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답게 모호한 그리기와 중의적 그리기 속에 있는 것, 때론 우연한 노이즈가 끼어들면 끼어드는 대로 내버려두면서 가는 것이다. 일관성은 중요하지가 않다. 일관성은 기껏해야 이미 알려진 사실을 재확인시켜줄 수 있을 뿐, 결코 미지의 영역을 열지도 미답의 영토에 가닿지도 못한다. 중요한건 기억을 매개로 매순간 일회적인 사건이며 장면을 여는 일이다. 기억의 재생을 구실 삼아 현실인식을 확장시키는(하이데거라면 세계의 개시라고 했을)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사진은 결코 현재를 붙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죽은 것들(최소한 죽을 운명에 처한 것들), 부재하는 것들, 흔적으로서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 시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들(엄밀하게 사진 속 과거는 시간이 아닌 시간의 흔적이다), 의미화 되지 않는 것들(푼크툼)만이 사진의 왕국에 거주할 수 있다. 존재증명에서 사진의 위상을 찾은 전통적인 입장과는 비교되는 경우란 점에서 바르트의 고유성이 있고 독창성이 있다. 기억을 되불러오기 위한 구실로서 사진을 참조하는 김경섭의 그림그리기는 어느 정도 이런 바르트의 사진에 대한 입장과 일맥상통한 것이어서 흥미롭다. 모호한 그리기와 중의적 그리기를 통해 한때 존재 했었을 존재의 흔적이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가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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