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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훈, 상실을 앓는 세대에 보내는 냉소와 위로

고충환


미운 오리 새끼가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나중에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가 아닌 백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행복을 되찾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다. 어려운 일(이를테면 남과 다른)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보상을 받고 행복을 되찾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모든 동화는 교훈적이다. 그리고 교육적이다. 교육용이라는 말이다. 아이들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걸 맞는 건전하고 건강한 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거짓?)고 꾸며낸 이야기(음모?)라는 말이다. 너무 부정적인가? 아님 냉소적인가? 이처럼 동화 다시읽기를 통해 원작이 은폐하고 있는 거짓과 음모를 캐내고 발굴하는 것이 잔혹동화다. 원작을 가리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걷어내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진실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직면하게 된 현실은 어떤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따돌림 받을 만한 이유가 되고, 그 따돌림은 끝내 보상 받지 못한다. 나아가 자위마저 자신을 배반하는데, 알고 보면 다르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혹 남과 다르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고 오만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함부로 꿈 꿀 일이 아니다. 섣부른 기대도 접는 게 상책이다. 오리는 오리일 뿐 끝내 백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뭔가 싶은가? 욕이 나오는가? 그래서 오히려 조광훈의 작업은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설득력을 얻는다. 백조인줄 알았던 미운 오리새끼가 결국 미운 오리새끼가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오는 자의식과 자기발견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백조를 꿈꾸다가 좌절된 세대 이야기가, 건전하고 건강한 시민이 되고 싶지 않은 세대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다. 세대 이야기? 작가는 동화를 비틀어 그 속을 까 보이면서, 동화를 세대 이야기로 확장한다. 순진무구한 아이를 계승한, 꿈이 좌절된 아이를 계승한 냉소적인 청춘남녀들의 이야기로 보편화시킨다. 그들에겐 여전히 아이가 내재화돼 있고, 아이는 알다시피 순진무구하고 불안정한 존재다. 세상에 때 묻기 쉽고 상처 입기 쉽다.

여기서 세상은 어떤 세상을 말하는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다. 모든 가치가 상품적 가치로 환원되고, 오로지 상품적 가치만이 진정한 가치로서 인정받는 물화와 물신(페티시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처럼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모든 개별주체는 저마다의 상품적 가치를 증명해야할 신성한 의무를 가진다. 작가의 작업은 그 신성한 의무 앞에서 냉소적인, 엉거주춤한, 그리고 때로 소극적으로 반항할 뿐인 소심한 세태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연민을 자아낸다(개인적으로 연민은 예술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 끝내 백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오리와 앵무새가 등장할 뿐. 미운오리새끼는 그렇다 치고 앵무새는 뭔가. 앵무새는 알다시피 남이 한 말만하고 똑같은 말만 한다. 자기 말이, 자기 생각이, 자기의식(자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무뇌아? 무감아? 굳이 발설하지 않아도 알만한 미운오리새끼와 더불어서 또 다른 냉소적인 캐릭터일 수 있다. 지금여기의 천민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청춘남녀들의 초상일 수 있다.


캐릭터라고 했다. 캐릭터는 개별적인 것을 매개로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설정된 연극적 장치며 미학적 장치다. 미학적으로 캐릭터는 전형과 통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캐릭터를 내세워 키 재기를 통해 저마다의 상품적 가치를 가려내기에 혈안인, 천민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청춘남녀들의 보편적인 초상을 대리하게 한다.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한 편의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다. 그 자체가 상황극 또는 상황조각과 통한다.


그 연극에는 알다시피 미운오리새끼와 앵무새가 등장한다. 사실은 미운오리새끼와 앵무새 가면을 쓴 캐릭터가 등장한다. 가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에서 가면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작가의 작업에 민낯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이처럼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옷으로 몸을 가리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때로 옷에 달린 모자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그리고 여기에 지퍼로 온몸을 가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전형적인 방어 자세다.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누군지 알 길이 없으니 익명성이다. 익명성 뒤에 숨는 것이다. 익명성? 바로 가면의 속성이다. 가면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의 초상에 부합한다. 마치 기계부품처럼 저마다 도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똑같은 얼굴, 똑같은 성질, 심지어 똑같은 개성으로 그 역할에 부합하는 것이야말로 제도가 요구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시민의 초상이다. 바로 너의 욕망에 부합하는 나, 사실은 너의 욕망이 만든 나, 페르소나, 제도적 주체며 사회적 주체, 개성이 거세된 익명적인 초상이다.


여기서 익명성 뒤에 숨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뭐가 숨는가. 바로 아이덴티티다. 진정한 자기며 억압된 자기다. 자크 라캉은 너는 결코 나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가면 뒤에 숨어 있으니 본 적이 없을 수밖에. 바로 존재의 민낯인데, 그걸 들키면 바로 끝장이고 아웃이다. 다시 라캉을 인용하자면 쾌락원칙이 존재의 민낯인데, 존재가 그 쾌락원칙을 발현하고 실현할 길이 없으니(억압된 욕망) 속으로 곪아 터질 수밖에. 그렇게 존재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열된다. 그러므로 이중분열이며 다중분열은 부조리한 인간의 보편조건이 된다. 방어 자세를 보여주는, 여기에 익명성 뒤에 숨는 캐릭터들을 형상화한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지금여기를 사는 청춘남녀들의 초상을 넘어 분열적인 인간,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적인 초상을 예시해준다.


그렇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가리고 있으니 도대체 누군지 알 길이 없고,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물 건너간 것인가. 이대로 끝인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숨겨놓고 있다. 잘 안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대개는 손가락을 기호처럼 사용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인데, 잘 보면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손가락 욕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욕과 같은 방어적이고 반어적인 경우로 손가락 기호를 사용하는데, 욕을 하고 있는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움켜쥔 채 엄지를 척하고 들어서 보여주는 식이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래, 네 똥 굵다고 욕하는 식이다. 이런 손가락 기호는 지퍼 끝에 달린 손잡이 장식(펜던트)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서 보여준다거나(욕), 상대방에게 손바닥을 보여준다거나(거부), 합장하듯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보여준다(애원? 기원? 읍소?). 온몸을 가리고 있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분명 이런 손가락 기호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향해 수신호(SOS)를 보내고 있는 것이고, 그 신호란 것이 대개는 절박(읍소)과 냉소(욕)가 이율배반적으로 중첩된 것이어서 씁쓸함을 자아낸다.


청춘남녀들의 이런 이율배반적인 초상은 말할 것도 없이 순진무구하고 불안정한, 그래서 세상에 때 묻기 쉽고 상처 입기 쉬운, 그에게 내재된 아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를 미성숙하다고 탓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건 미성숙이 아닌, 반성숙이다. 미성숙과 반성숙은 다르다. 미성숙은 현상이지만, 반성숙은 입장이며 태도의 표명이다. 그 입장은 문제의식을 포함하며, 그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본주의의 아이콘을 작업 속에 도입해놓고 있다. 황금색과 레드카펫과 계단이 그것이다. 여기서 황금색은 말할 것도 없이 황금만능주의를 상징하며, 레드카펫은 승자들만의 리그를 표상한다. 그리고 계단은 이처럼 황금을 거머쥔 승자가 되고 싶으면 졸나게 빡빡 기어 올라오라는 자본주의의 냉엄한 주문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이 모든 형상을 코일링 기법으로 조형해놓고 있다. 흙을 길게 말아, 그렇게 말린 흙을 위로 쌓아올리면서 원하는 형태를 빚어 만드는 것이다. 도자기를 제작할 때의 전형적인 기법이지만, 이처럼 서사적인 형상, 더욱이 세부가 오롯한 형상, 그리고 여기에 때로 등신대를 훌쩍 넘는 형상을 그런 식으로 빚어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형감각은 기본이거니와, 여기에 시종 전체 형태에 대한 감을 유지해야만 한다. 기법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도조를 통해 도자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조각과의 접점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자체가 새로울 건 없지만, 작가의 작업은 그 모색의 과정에 한 의미 있는 방점을 찍을 것 같다. 그 만큼 완성도도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도 작업에 대한 태도에 남다른 데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을 앓는 세대(작가도 그 세대에 속한다)가 세상에 보여주는 냉소를 대리수행하면서, 동시에 그 상실을, 그 냉소를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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