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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 모더니즘 사용법, 미술사 사용법

고충환

김정명은 모더니즘 세대에 속한다. 보통 그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은 이거다 싶은 하나의 형식을 파고들어 심화하고 변주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지가 않다는 점에서 의외고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이 예시해주는 의외성은 심지어 후배작가들 못지않게 예외적이고 후배작가들보다 더 예외적이다. 그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는 이행성과 복수성으로 특징된다. 끊임없이 형식의 지점들을 옮겨 다니고 의미의 지점들을 가로지르면서도 그렇게 가닿는 지점들마다 하나같이 완성도가 높다. 그리고 그렇게 열어놓는 지평들이 예나 지금이나 시사해주는 것들이 많다.

그는 국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소개되기도 전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 이미 타고난 체질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 그는 모더니즘의 성과를 사용하는 것(모더니즘 사용법?)에서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찾았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였고, 탈장르(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와 탈형식(조각과 오브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논리(의미의 밑바닥에서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와 탈경계(미술사 다시읽기)에서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찾았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 근대의 자의식을 재해석하고 자기화하는 것에서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후기근대주의자였다. 하나같이 작가의 복수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예술가적 주체의 성분들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는 넓고 깊다. 그 넓이와 깊이를 집대성하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의 장식장>과 <머리> 시리즈다. 이번 전시는 <내 마음의 장식장>과 <머리> 시리즈가 중심이 되는, 그리고 여기에 소품 내지 에스키스에 해당하는, 그 자체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중심 작품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이는 작품들, 그리고 여기에 일련의 회화작품들이 부수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작가의 전모를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작가의 전모를 다 보여준 것에 진배없는 구성이 되도록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 중 <내 마음의 장식장>을 보면 장식장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은 장식장의 외관을 하고 있다. 칸이 질러진 장식장은 동시에 책을 꽂을 수도 있어서 혹자(강선학)는 책가도라고도 부른다. 장식장으로 부르든 책가도로 부르든 중요한 것은 작품에 내재된 내용이며 메시지일 것이다. 각각 그림과 사진, 모형과 오브제 위에 채색한 소품들로 이루어진 그 내용을 보면 작가가 구사하는 예술적 문법 중 결정적이랄 수 있는 차용의 결정판을 보는 것 같다. 패러디 특히 서양미술사의 패러디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시녀들에 출연한 벨라스케스의 개, 변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마르셀 뒤샹, 브랑쿠지의 키스, 클레스 올덴버그의 주머니칼, 요셉 보이스의 모자,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초현실주의 작가 머릿 오펜하임이 모피로 만든 커피세트로 점심을 들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서기,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마릴린 몬로를 그리고 있는 얀 베르메르, 앤디 워홀의 캠벨스퍼깡통,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와 사춘기, 신사실주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분신 나나, 자유구상의 필립 거스통,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중세 초현실주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자신의 군무 그림을 관처럼 쓰고 있는 마티스, 그리고 여기에 피카소, 프란시스 베이컨, 모딜리아니, 에곤 슐레, 오스카 코코슈카, 막스 에른스트 등등.

장식장을 장식하고 있는 미술사의 아이콘들이 실로 어지럽다. 더러 빈 칸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칸들을 채우고 있는 아이콘들의 양이 어지럽고, 외관상 개연성 없이 차출되고 배열된 것 같아 어지럽다. 앙드레 말로는 사람들은 저마다 상상의 미술관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했다. 저마다의 미적 기준을 가상의 미술관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이 작업은 우선은 작가의 예술가적 기질을 건드린 미술사에서 건너온 파장들일 것이다. 영향사의 맥락에 속하는 것들이고, 상호영향사의 차원에 놓이는 것들이다. 여기서 작가는 미술사에 대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읽기를 시도하고 있고, 종래에는 미술사의 사용법을 제안하고 있다.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읽기? 가다머의 지평융합개념을 전용한 것이다. 미술사를 읽을 때 지평융합이 일어나는데, 원작의 지평과 원작을 읽는 주체의 지평, 과거시제와 현재시제의 지평융합(상호간섭)이 일어난다. 그래서 원작 그대로의 원형을 어떤 식으로든 훼손하지 않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읽기는 불가능하다. 미술사가 그렇고 모든 종류의 역사서술이 다 그렇다는 사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장식장의 구조를 보자. 장식장은 하나의 모듈이 반복 재생산되는 칸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다. 미술사를 분류하고 정의하고 유형화하는 인문학적 틀이다. 미셀 푸코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르고 토마스 쿤이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시대마다 시대들이 있고, 그 시대들을 지배하는 지식체계다. 푸코는 그 체계가 헤게모니의 결과라고 본다. 체계와 체계들이 우열을 타투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헤게모니를 쥔 체계가 승인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체계들이 도태되는 것이다. 하나의 체계가, 하나의 미술사가 그 자체 객관적이어서 승인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을 권력체계 곧 권력과 등가로 보는 것이고, 여기에 미술사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읽기에 따라서 무수한 다른 미술사들이 가능해지고, 근본적으로 미술사는 모든 종류의 다른 읽기에 노출돼 있다. 작가가 미술사를 차용해 현재화하고 자기화한다는 기획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기식의 미술사 읽기, 자기만의 미술사 읽기, 그래서 사람들 저마다 저만의 미술사 읽기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미술사는 현재화되고 자기화 된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읽기를 통해 매번 다른 의미를 수혈 받고 재생되는 미술사, 그리고 그렇게 매순간 거듭나는 미술사를 겨냥한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미술사는 흘러간 꽃노래나 먼지를 뒤집어쓴 박제 신세를 면하고 항상적으로 살아있을 수가 있게 된다. 작가가 패러디를 통해 미술사 사용법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처럼 작가가 미술사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읽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구도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미술사 읽기를 받아들이는 대신 저마다 저만의 방식으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읽기를 할 수가 있다. 더욱이 작가 자신마저도 하나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읽기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모르긴 해도 칸을 채우는, 그래서 칸과 칸들이 연결되는, 의미와 의미가 연계되는 미술사 아이콘들의 종류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상황논리에 따라서 크게 혹은 작게 달라지는 것 같다. 미술사에 개입해 생기를 불어넣고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엔 그저 미술사를 살아있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념미술 이후 미술은 의미론이 되었다. 의미와의 싸움이며 새로운 의미의 제안이 되었다. 여기서 의미란 그 자체 결정적이기보다는 상황에 연동된다.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칸들은 미술사를 정의하는 상황들(의미론적 틀들)에 해당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미술사도 달라진다. 현대미술을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변적이지만 가변적인 채로 매번 결정화되는, 그리고 그 결정화가 계속 갱신되는, 그런 종류의 읽기가 하이퍼텍스트에 연동되고 하이퍼링크에 연장된다.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미술사 책(외관상 장식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은 아무데서나 읽어도 상관이 없고 아무데서나 끝내도 무방하다. 어떤 부분을 읽든 어떤 식으로든 다른 부분과 접속되고,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마구 접속된다. 원하기만 한다면 끊임없이 새롭게 접속되는 네트워크의 망들(의미론적 망들)을 찾아내는 무한지적유희(?)에 빠질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무작정 열린 의미들, 서사들, 이야기들에 빠져들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미술사를 빌려 오독의 의미놀이에 초대하는 것이다(예술에 관한한 오독은 없다. 어쩜 의식적인 오독, 적극적인 오독은 진즉에 죽은 창조의 재생된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이런 의미들의 배열과 배치, 의미들의 네트워크와 링크는 전부다 알고 보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작가는 그 머릿속 사정을 작업으로 옮겨 놓는데, 그게 <머리> 시리즈다. <내 마음의 장식장>과 함께 <머리> 시리즈를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보는 이유이다. 여기에 작가의 전작을 <머리> 시리즈 속에 녹여낸 것도 그 이유에 한몫을 한다. 앙드레 말로는 사람들 저마다 상상의 미술관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했지만, 그렇게 이고 다니는 것이 어디 미술관뿐이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사람들의 의식(그러므로 머리)을 도서관에다 비유했고, 스테판 말라르메는 자신을 해묵은 책들로 가득한 서재에다 비유했다. 그렇게 머리는 의식과 생각, 도서관과 서재와 통한다.

<머리> 시리즈를 보면, 작가는 <머리-꽃들에게 경의를>에서 중세 초현실주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에게 경의(오마주)를 표한다. 아마도 꽃(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꽃(자연)으로 구조화된 사람의 머리(온통 머릿속이 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로 표현할 줄 알았던 화가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머리-로고>에서는 명품 브랜드를 좇는 현대인의 물신주의와 페티시즘으로 나타난 무분별한 욕망과 허망함을 상징했다. 드러난 욕망과 숨겨진 허망함이 한 몸으로 착종된 것이란 점에서 바니타스의 현대판 버전으로 볼 수가 있겠다. <머리-내 마음의 장식장>에서는 미술사와 상호영향사를 소재로, 미술사에 등장하는 각종 아이콘들을 머리 형태의 선반에다가 아카이브로 재구성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작품 <내 마음의 장식장>과 통하고, 그것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작품 <머리-손>을 보면 손들이 속이 빈 머리를 감싸고 있는 형국인데, 모아 쥔 손으로 성당 없는 성당을 표현한 로댕의 작품 <대성당>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재능을 상징할 것이다. 도구를 상징할 것이다. 더불어 머리를 감싸고 있는 손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란 의미의 공수래공수거의 전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편으로 작가의 전작이 <머리> 시리즈 속에 녹아들어있다고 했는데, 달랑 손가락만으로 사람의 온갖 형태와 형편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손가락>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차용과 함께 작가의 또 다른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변태와 변신의 원형 격에 해당하는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포켓>에서 포켓은 비움과 채움을, 욕망과 욕망의 덧없음을, 욕망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상징한다. 채우면 채울수록 비워지고, 비우면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역설을 표현했고, 욕망에 대한 작가의 평소 관념을 표현했다. 표면적으로는 욕망을 테마로 한 것이란 점에서 <머리-로고>와 통한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머리-말풍선>에서 작가는 머리를 말풍선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언어, 말, 지식을 표상할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 작업인 <말풍선>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데, 만화에서 차용한 사각 프레임 속 말풍선으로 이루어진 회화적인 조각이고 평면적인 조각이고 세상에서 가장 얇은 조각이다. 여기서 빈 말풍선은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미디어(모든 미디어는 소통의 매개체다)가 첨단을 구가하는 시대에 오히려 소통이 전에 없이 문제시되는 역설적인 현실을 표상한다. 흥미롭게도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차가운 미디어와 따뜻한 미디어로 구분하는데,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오히려 인간소외가 심화되는 현실을 보면, 모든 미디어는 일단은 차가운 미디어로 볼 수도 있겠다. 더러 말풍선이 똥 덩어리 모양으로 변주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빈말, 헛말, 안 해도 될 말, 상처 입히는 말을 의미할 것이다.

전작과의 관계 속에서 볼 때 그렇고, <머리> 시리즈 자체로 치자면 작가는 이미 전작에서 12개의 인간사를 테마로 한 <큰머리> 시리즈를 선보인 적이 있다. 의미론적으로 이번 작품과 겹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각각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물들, 문명의 쓰레기들, 명품 브랜드들, 상, 대중문화를 다룬 만화 캐릭터들, 성, 종교와 신앙, 별자리, 책들, 손가락, 포켓, 12지를 테마로 한 것이다. 인간사를 다룬 것이면서 동시에 문명비판적인 작가의 관념이 스펙터클로 승화된(생각하는, 골몰하는, 고뇌하는 거대한 머리들)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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