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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 정처 없는 길,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고충환

김광우/ 정처 없는 길,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사람들은 흔히 삶을 연극에 비유한다.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삶을 책에다가 비유한다. 자신을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곰팡내 나는 책들로 가득한 서재에 비유한 말라르메처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삶을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에 비유하기도 한다. 분명 고독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꿈에 비유하기도 한다. 삶을 일장춘몽과 같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공수래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비유도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이처럼 삶에 대한 비유들이 많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길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삶은 길이고, 여정이고, 여로다. 그저 길이 아니라, 자기(불교로 치자면 진아 곧 진정한 자기)를 찾아 떠나는 길이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된다. 인간을 향해 가는 길이 삶의 지향이고 목적이다. 그 길에서 존재는 장애물도 만나고 조력자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사연이, 서사가, 예술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은 이야기(서사)가 되고, 이야기(서사)의 기술이 된다. 길 위에서의 이야기(서사)가 된다. 

김광우는 자신의 작업을 길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길을 응시하면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쌍방향 순환적 통행방법을 모색하는 여정 그 자체라고 말한다. 자연이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듯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는 삶, 자연이 인간에 인간이 자연에 서로 속해져 있는 상호 내포적이고 상호호혜적인 삶, 그리고 그렇게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여정이다. 여정 곧 길을 삶의 메타포로 본다면, 삶에 대한 입장이며 태도의 표명으로 봐도 되겠다. 


길 없는 길 


여기에 길 없는 길이 있다(2016. 길 없는 길 프로젝트). 길 없는 길? 길이 없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이 없는 길은 이미 길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겠기 때문이다. 모순이다. 모순이라기보다는 역설이다. 삶이 그렇고 예술이 그렇다. 그럴듯하게 말해 삶도 예술도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해 매번 길이 없는 길을 가는 것처럼 막막한, 매번 처녀지고 매순간 미답지여서 막막한 것이 예술이고 삶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처녀지며 미답지 앞에 선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막막한 심정으로 길 없는 길 위에 선다. 

그렇게 찾아간 아이슬란드 스카가스트론드 해안에 사는 현지인들에게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숨은 사람 곧 히든피플이라는 요정 이야기다. 그는 숨겨진 동굴에 살면서 커다란 바위의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숨은 사람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여졌을 것이다. 자연에 숨어서, 좀 더 그럴듯하게는 자연에 동화된 나머지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때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한다. 그 전설에 착안한 작가는 해변에서 채집한 새 깃털이며 낚싯줄 그리고 철조망을 얼기설기 엮어서 가파른 해안 절벽에다 가상의 창을 만들었다(숨은 창). 절벽을 요정의 집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집과 창은 공교롭게도 마치 커다란 바위에 파묻힌 듯한 아이슬란드 전통가옥의 집과 창을 닮은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작가는 산 정상에서 신성한 기운을 느낀다. 산양들만의 신성한 땅을 상상하며, 산에서 채집한 양털과 철조망을 엮어 마치 양이 웅크린 자세로 잠든 것 같은 형태의 거대한 뭉치를 설치했다(잠든 양). 현지인들이 양들을 방목하고 있고, 마침 산정상의 평평한 대지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 깃털을 꽂아 자신이 새로 환생했다고 느낀다(환생). 원초적인 자연의 주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자유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길 없는 길은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원초적 자연의 신성한 기운을 호흡하게 하고,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길 없는 길은 역설이라고 했다. 여기에 역설이 아닌, 말 그대로 길 없는 길이 있다(2011. 길 없는 길. 국제바깥미술전. 경기도 가평 자라섬). 작가는 북한강변에서 전 대통령의 죽음을 기리는 소리 없는 굿판을 벌였다. 꽁꽁 언 강바닥을 가로질러 길을 내고 그 길이 없는 길 위로, 더 이상 길이 아닌 길 위로 혼을 불러들인다. 간이 가스 가마를 설치해 흙으로 만든 돌을 구워냈는데, 그 돌이 마치 사자의 심장 같다. 그 심장 위로 정화를 상징하는 소금과 순백의 눈이 푸시시 소리를 내며 타고, 촛불집회를 상징하는 노란 파라핀이 녹아내리고, 화장을 상징하는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그 주검의 흔적 위로 사자를 기리는 국화 200 송이가 드리워진다. 사자의 혼을 부르는 일종의 초혼의식을 행한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길도 없다. 그렇게 길이 없으니 길 없는 길이라고 했고, 그런 만큼 이 말은 역설이 아니다. 혹 길 없는 길은 작가의 막막한 심정을 대신한 것일 수도 있겠다. 


장소 특정적인 길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길 없는 길은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고, 때로 막막한 심정을 투사한 존재론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장소 특정적 길이 있다. 자라섬에 가면 자라길(2009. 바깥미술회. 경기도 가평 자라섬), 버몬트에 가면 버몬트길(2011. 미국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사가미에 가면 사가미길(2008. 일본 사가미하라시 사가미 호수), 하는 식이다. 특히 사가미길에서 작가는 호숫가에서 호수 안쪽으로 연이어진 하얀 길을 냈다. 하얀 길은 작가의 다른 길 작업에서도 곧잘 엿보이는 경우로서, 길을 하얗게 뒤덮기 위해서 현장에서 채취한 자연재료와 인공소재가 동원된다. 하얀 모래와 하얀 흙, 하얀 소금, 하얀 깃털, 하얀 양모, 그리고 하얀 천과 같은. 그 상징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순수와 정화 그리고 재생을 상징한다. 문명 이전의 처음상태로 자연을 되돌리는 제의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의 발길 닿는 데가 다 길이다. 장소와 운명을 같이하는 길이다. 그래서 장소 특정적인 길이다. 이처럼 지역을 특정한 길이지만, 매번 다른 길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그 지역을 다시 찾아 다시 길을 낸다 해도 그럴 것이다. 매번 다른 길이고, 매순간 일회적인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상상력이 머물다간 자리마다 다른 길이 날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낸 길이지만, 동시에 지역적 특수성이며 장소 특정성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반영된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발길은 프랑스 부르고뉴 느와에 마을에 가 닿는다(2015. 느와에 길 프로젝트). 그 마을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내부에다가 토기질 백색점토로 만든 속이 빈 거대한 돌 형상을 설치한다(교회 속의 빈 돌). 흙으로 만든 돌이지만, 영락없는 돌이다. 교회는 문명을 상징하고, 돌은 자연을 상징한다. 아마도 문명과 자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생명 혹은 생태공동체적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는 오래된 빨래터가 남아있다. 15세기에 지어진 이후 1960년대까지도 빨래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작가는 인근의 채석장 주변에서 채집한 석회석으로 삼단의 돌계단을 만들고 흙으로 만든 돌을 난간에다 설치했다(하늘계단). 그리고 다리난간에서 돌을 물속에 빠트려 강으로 사라지게 했다. 돌의 다른 생을 꿈꾸며 그렇게 했는데, 거듭나고 순환하는 존재의 고리, 윤회와 환생에 대한 작가의 관념과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미국 네브라스카 마큇마을을 찾는다(2009. 마큇 길). 버려진 마구간에 길을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시켰다(이 작업에는 시간의 길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마구간을 전후로 땅을 파내 길을 내고, 그렇게 파낸 흙을 쌓아 길을 연결시켰다. 그렇게 시간을 공간화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낸 길 위에 깃털을 깔아 죽은 마구간을 재생시킨다는 상징적 의미를 더했다. 그리고 마구간 내부 바닥에는 현장에서 채집한 자생 꽃과 산화물 조합으로 만다라 형상을 재현했다. 대개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만다라 형상 혹은 그 변형되거나 변주된 형태는 작가의 작업에서 곧잘 나타나는 형상인데, 우주를 상징하고,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고, 에너지의 원천을 상징하고, 재생과 환생을 상징한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명상에로 이끄는 도상학적 장치로 보면 되겠다. 

보기에 따라서 만다라 형상은 카펫 혹은 자리처럼 생겼고, 실제로도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예컨대 2014년 이란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 이러한 포맷이 명상을 위한 전형적인 자세, 좌선 곧 중심성이 강하고 가장 정적인 자세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명상에로 이끄는 계기로서 만다라와 카펫의 형태적 유사성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이다. 물론 의미론적인 상관성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카펫을 만다라의 도상학적 의미가 생활철학이며 생활감정 그리고 생활오브제와 결부된 경우로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여하튼. 의미가 서로 부합되고 합치되는 것은 대개는 의미론적인 상관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처럼 때로 형태적 닮은꼴이 차이를 넘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바로 그런 경우로 보면 되겠다. 

한편으로 작가의 이 작업은 땅속을 파내 길을 내고 그렇게 파낸 흙을 다시 땅 위로 쌓아 길을 낸다는 점이, 음(움푹 파인)과 양(봉긋하게 솟은)을 대비시킨다는 점이, 대지를 조형적인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일종의 대지예술로도 보게 해준다. 음과 양을 대비시킨다는 점만 놓고 보면 이사무 노구치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처럼 대지예술로 치자면 <무명석>이 단연 주목된다(2008. 오스트리아 와츠버그). 암반지대로 된 자연 속 무명지대를 배경으로 한 작업으로서, 땅을 파내 그 속의 바위가 드러나게 한 것이고, 그렇게 파낸 흙과 돌과 풀들을 바위 주변으로 둥그렇게 쌓아 바위를 감싸게 했다.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원형상은 그곳이 일종의 성소 곧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말해주는 일종의 표식행위로 볼 수도 있겠다. 역설적이게도 무명석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노동을 매개로 무명의 존재가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의 노동이 매개가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무명지대가 예사롭지 않은 곳으로 탈바꿈되는, 무명(부재?)이 유명(존재?)으로 전이되고 노동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 보면 땅 위에 중첩되면서 퍼져나가는 파문을 그린 작업(두 개의 웨이브. 2007. 오스트리아), 탈색된 파래와 같은 현장에서 채취한 자연소재로 검은 모래 위에 하얀 선을 그린 작업(2013. 제주도 우도 검멀레 해변)이 대지예술을 예시해주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무명의 것들, 익명의 것들 


한편으로 작가는 길을 내는 대신 길 위에다 이런저런 제단을 조성하기도 한다. 여기서 길과 제단은 외관상 다른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길이란 것이 알고 보면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고, 실제로 길을 낸다기보다는 상징적으로 길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대개 인간과 자연,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연결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고, 사자의 혼을 불러들여 위무하는 초혼의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다른 세상과 세상을 연결시키고 매개시켜주는 무당이 된다. 그 전형적인 경우가 사자의 죽음을 기리는 경우(2011. 길 없는 길. 국제바깥미술전. 경기도 가평 자라섬), 그리고 죽은 동물의 영혼을 위로하는 경우(2015. 삶과 죽음을 위한 동물 위령비, 익숙한 수수께끼. 바깥미술 서울대공원전)가 되겠다. 

사자를 위한 길과 사자를 부르는 초혼의식,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무당으로서의 작가가 혼연일체가 된 일종의 제의로 볼 수가 있겠고, 그 제의를 매개로 평범한 장소가 범상치 않은 장소(성소?)로 탈바꿈되고 제단으로 화한다. 제단은 말하자면 작가의 의식이 향하는 길의 변형되고 변주된 또 다른 한 형식이며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발길이 가닿는 곳마다 길이고, 작가가 여는 길마다 제단인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각각 물의 제단(2014. 영흥단)을, 그리고 불의 제단(2014. 이곡단. 바깥미술전)을 보여준다. 인천 영흥도 수해해변에 현장에서 채취한 돌과 조개를 쌓아 물의 제단을 조성했는데,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제단이 물 위로 드러났다가 재차 물속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해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치 제단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드는 것 같고, 이 세상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것 같다. 그리고 경기도 가평 자라섬의 꽁꽁 언 북한강변에다 철사와 갈대 그리고 잣 껍질을 이용해 구조물을 설치한 후 불에 태워 불의 제단을 조성했다. 그 이면에는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세계의 원초적인 4원소에 결부된 신화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이, 그리고 그 원초적인 물질이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작가의 작업을 보면 유독 북한강변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다.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작가는 진즉에 바깥미술회(바깥미술회는 굳이 한겨울에 바깥전시를 고집하는데, 여기에는 순결한 면이 있다)를 중심으로 자연미술, 생태미술, 대지예술과 같은 현장성이 강한, 일회적인, 그래서 기록과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전에 없이 요구되는 그런 작업, 어쩌면 태생적으로 반제도적인 작업으로 일관해왔고, 그러면서도 생명지향적인 역설적인 작업(그 이면에 제도를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 깔려있다는 점에서)으로 자신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왔다. 그 행보는 중간자며 매개자 곧 무당에 다름 아니었고, 수신과 수행 곧 진아를 찾는 지난한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여기에 서있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있다. 익명의 마른 꽃잎과 양털과 새 깃털이 작가를 맞아 친구가 되어주는, 무명의 물과 바람과 공기와 흙과 불이 아득한 전설을 전해주는 길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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