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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관계와 사이가 교차되는, 우연과 필연으로 짜인

고충환

김희진/ 관계와 사이가 교차되는, 우연과 필연으로 짜인 



공유(지난번 전시주제이기도 한 공유는 더불어 가진다는 의미로, 형식개념으론 더불어 어우러진다는 의미의 조화로 번역될 수 있는), 관계, 연결, 접속. 그리고 사이, 차이, 틈. 김희진의 회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며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다. 앞선 주제의식은 실제로 작가가 근작에 부친 주제 connection으로 나타나고, 뒤따르는 주제의식은 작가가 자신의 그림 속에 숨겨놓고 있는 gap이란 영문자 텍스트로 나타난다. 세세한 차이를 갖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어슷비슷한 개념들이지만, 그 중 관계와 사이가 다른 개념들을 견인하고 수렴하는 핵심개념임을 알겠다. 관계가 표면에 나서고 사이가 그 뒤를 지지하는 인식론적 구조로 볼 수 있겠고, 관계는 언제나 사이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개념임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작가는 은연중 예술의 핵심개념을 정의해놓고 있다. 즉 예술은 관계의 기술이라는 정의가 그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관계의 기술일 수 있다. 존재로 치자면 주체 없는 타자는 있을 수가 없고, 타자를 전제하지 않은 주체는 무의미하다. 주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인 타자다. 주체와 타자의 상호작용성과 상호 간섭성 그리고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론 상호내포성의 관계 속에서 모든 존재는 비로소 성립하고 살아진다. 의미로 치자면 그 자체 결정적인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의미를 결정한다. 어떤 관계 속에 놓일 때 비로소 의미는 결정된다. 그렇게 관계는 의미의 전제가 된다. 그런 만큼 관계가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 살고 있다.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다 그렇다. 그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소통이 되고, 비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불통이 된다. 소통은 말하자면 정상적인 관계, 좋은 관계의 전제이면서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예술은 소통을 따지고 관계를 파고든다(예술은 소통이고 관계다). 그러므로 어쩌면 삶을 파고든다. 소통과 관계의 변수 가능한 지점들을 탐색하고 예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 삶의 두 축인 소통과 관계의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는 것이다. 

결국 김희진의 작업은 그 형식실험에 바쳐진 것이고, 그 변수가능성의 표상형식을 전개 혹은 예시해놓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단독자로서의 개념보다는 사이를 전제로 한 관계개념을 형식실험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의 평소 성향과도 무방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예술에 대한 입장과 세계관이 은연중 반영된 경우로 봐도 무방하지가 않을 것이다(예술은 거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그 표상형식을 형식실험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작가의 주제의식(사이를 전제로 한 관계개념)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물성이 강한 편이다. 아마도 작가의 회화적 기질로 봐도 될 것인데, 작가는 이런 물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어슷비슷한 때론 차이가 현저한 형식들을 하나의 화면 속에 불러들인다. 다른 형식과 다른 기법이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면서 물성을 강조하고 차이를 파생시킨다. 작가는 그렇게 중첩되고 다중 복합적인 화면의 질감을 선호하고, 그 물성과 질감이 암시하는 화면의 울림(내적울림?)을 즐긴다. 때로 여기에 일상의 주변에서 채집된 이러저런 오브제들이 도입되기도 하는데, 파쇄 된 책이 도입되고, 단추가 도입되고, 스탬프가 도입되고, 스티커가 도입되고, 스프링이 도입된다. 그리고 여기에 일종의 소 가구 형태의 틀을 짜서 캔버스를 대신하거나 보완하기도 한다. 

그렇게 붓질과 나이프 질이 어우러지고, 그림과 텍스트가 어우러진다. 근작에서 보자면 스포이트를 이용해 캔버스 위로 흘려 내린 물감의 흔적과 흔적이 어우러진다. 그 자체 날실과 씨실에 비유할 만한 일종의 격자구조를 만드는, 망구조를 만드는, 느슨하고 촘촘한 직물구조를 형성시키는 자국과 자국이 어우러진다. 의미로 치자면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진다. 일정한 지점과 간격을 전제하고 스포이트로 물감을 흘려 내리는 것은 필연이지만, 그렇게 흘러내린 물감이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자국으로 맺힐지는 전적으로 우연의 몫이다. 그건 우선은 회화적 형식실험이며 시도에 속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삶은 말하자면 우연과 필연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직물이며 망에 비유할 수가 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비극을 예비하기도 하고, 우연한 사고가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하고, 가로막힌 벽이 예기치 못한 일로 스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고 삶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주제의식에 견주어볼 때 그림에서의 격자구조는 무엇보다도 관계를 표상하고 관계의 망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선 비정형의 자국과 자국이 어우러지고 흔적과 흔적이 어우러진다. 우연과 필연이 어우러지고 운명과 상처가 어우러진다. 그림과 오브제가 어우러지고, 그림과 변형된 틀(일종의 변형캔버스?)이 어우러진다. 특히 변형된 틀의 경우, 그림은 더 이상 회화적 평면에 머물지 않고 공간으로의 확장을 암시한다. 혹은 예비한다. 그렇게 입체와 평면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느슨해진 공간, 확장된 공간 자체는 조형공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실 공간(평면 위에서의 허 공간과 비교되는), 생활공간으로의 확장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비록 평면이지만, 은연중 공간감을 그리고 공간에로의 확장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회화적 평면 위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은 말하자면 이러저런 조형적인 형식실험으로 볼 수 있겠고, 나아가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 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이런 관계에 대한, 어우러짐에 대한 형식실험은 단독 그림보다는 일종의 모음그림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같은 크기 아니면 어슷비슷한 다른 사이즈의 그림들이 무슨 모자이크나 퍼즐처럼 한자리에 놓이는 것인데, 주제로 치자면 관계개념에 가변적인 상황논리를 더한다. 가변적인 설치작업으로 가변적인 상황논리(예상되는, 때론 예기치 못한 삶의 변수)를 대리하고 표상케 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관계의 형식실험은 회화적 평면을 넘어, 그림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차원이며 경계를 아우른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림이 전시되는 공간으로, 실 공간으로, 어쩌면 현실공간으로 확장된다. 엄밀하게는 확장된다기보다는 암시되고 있는데, 언제든 실제 공간설치작업으로 실현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전시공간에는 일종의 역학이, 비가시적인 역학이 작용하고 있다. 모티브와 모티브, 오브제와 오브제, 사물과 사물, 사물과 관객, 그림과 그림, 그림과 관객이 놓이고 움직이는 여하에 따라서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긴장감이 조성되고 공간상의 강밀도(강도와 밀도)가 조절된다. 평면상에서의 형식실험이 그대로 공간으로 확장 적용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배열이 달라지면 의미가 달라지고 배치가 달라지면 공간에 대한 감각경험(조형예술의 경우 시지각경험)이 달라진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이런 공간 확장을 매개로 배열과 배치의 기술을 실험하는 형식실험의 장일 수 있고, 그 장의 예시일 수가 있다. 작가가 굳이 연이어 같은 전시공간을 고집하는 남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전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에는 전시공간과 일체를 이룬, 공간연출 자체가 작업인 작업을 지향하는 작가의 작업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관계의 미학, 어우러짐의 미학을 매개로 조형성을 획득하고 현실성을 획득한다. 마찬가지 말이지만 조형적 시도와 현실성을 매개로 관계의 미학을, 어우러짐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외적으로 보아 추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이렇듯 언제나 삶의 표상형식으로서의 추상이란 점에 작가의 작업의 특정성이 있고 미덕이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형식요소 혹은 성질, 이를테면 질료와 질감 그리고 물성은 말하자면 삶의 경험에서 길어온 것이란 점에서, 그 몸이 기억하는 감각(혹은 감수성?)을 그림으로 체화한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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