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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크리틱/ 사소한 것은 없다

고충환

포커스 크리틱/ 사소한 것은 없다


홍순명_장밋빛 인생. 대구미술관. 9.26-2018.1.7

김을_Twilight. 갤러리 기체. 10.26-12.02



최근 2명의 중견작가가 전시를 열었다. 2016년 제17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한 홍순명 작가의 수상작가전이 그 하나이고, 같은 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에 노미네이트된 김을 작가 전시가 또 다른 하나이다. 마침 두 작가가 연배도 비슷하거니와 성향도 비슷해 이참에 하나의 지면에 놓고 비교해볼 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두 작가 모두 갤러리 쪽보다는 대안공간 중심으로 이력을 쌓아왔고, 제도권 미술의 전유물로 여겨진 경합이나 수상제도와는 거리가 있는 독자적 행보를 보여 왔다. 일부러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예술은 고독한 작업이다.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처한 현실이 그런 만큼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두 작가 모두 이런 현실에 남다른 내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내성이 작업을 신뢰하게 만든다. 여기에 두 작가 모두 사소한 것, 엄밀하게는 제도가 사소한 것이라고 진단한 것에서 새로운 의미부여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 사람은 제도가 장밋빛 인생을 약속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억압한 것들을 되불러오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집짓기와 드로잉 같은 사소한 형식을 사소하지 않은 형식에 대질시킨다. 


홍순명은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 수로만 치자면 거의 30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출품했다. 출품된 작품의 양만 놓고 보면 스펙터클을 떠올리기 쉬우나, 실상은 정반대다. 스펙터클이란 말은 전시를 위한 전시, 보여주기 위한 전시, 쇼 비즈니스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전시라는 부정적 함의를 갖는다. 그러나 홍순명의 작업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런 스펙터클이다. 세상의 모든 풍경을 스펙터클 화하려는 자본주의 기획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질 들뢰즈 식으론 스펙터클 되기, 스펙터클 흉내 내기를 통해 스펙터클의 허구를 폭로하고 내파 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회화를 시작한 이후 근 10여 년간의 작업이 망라돼 있다. 그런데, 작가가 회화에 빠지게 된 계기가,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재미있다. 엽서를 보고 그리기 위해 엽서만한 크기의 캔버스 1000개를 주문하면서, 무작정 그리다 보면 뭐가 되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무작정 물결을 그리다 보면 나중엔 그 물결그림들이 모여 결국 바다 전체를 그릴 수 있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흔한 말로 집요한 그리기와 함께, 특히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을 뒤집는 전복이 있다.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전혀 다른 관점이 있다. 

먼저 <사이드스케이프>를 보면, 인터넷을 서치하면서 그럴 듯해 보이는 장면을 취해서 회화로 옮겨 그린다. 옮겨 그릴 때 장면의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배경을 그리고, 우연하게 찍힌 가장자리 부분을 확대해서 그린다. 그래서 그림 자체로는 도대체 뭘 그렸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림을 그린다. 원래 주제가 있는 그림을 주제가 오리무중인 익명적인 그림으로 탈맥락화한 것이다. 보도사진은 주제를 정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은연중 무엇이 주제가 될 만하고 주제가 될 만하지 않은지, 무엇이 사소하지가않고 사소한지를 구분하고 그 구분을 학습시키는 경향이 있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학습된 주제의식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옆을 보고 주변머리를 보면 사태의 핵심이 보이고 진실이 보인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그렇게 인터넷을 서치 하다가 작가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메모리 스케이프>로 형상화된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사회적인 문제로 첨예화된 지역을 찾는다. 밀양 송전탑 시위현장, 여수 기름유출 사고현장, 그리고 각종 재개발현장과 같은. 현장에서 이러저런 오브제들을 실어와 얼기설기 엮어서 어떤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을 캔버스 천으로 덮씌운다. 현장에선 분명 의미 있는 오브제들이었을 것이지만, 그걸 조형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도무지 기능도 의미도 알 수가 없는 오리무중의 익명적인 형태가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사건 현장에서 발췌해온 풍경을 그린다. 그래서 그 자체 익명적이면서 동시에 사건 현장을 암시하기도 하는, 익명적이면서 익명적이지가 않은 조형을 제안한다. 아마도 제목으로 보아 사물들은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이 터진다. 사건이 터진 이후 작가는 수차례 팽목항을 찾는다. 갈 때마다 해변에 떠밀려온 이러저런 오브제들을 한 차 가득씩 실어온다. 그러면서 혹 그 사물들이 사건현장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죽은 누군가의 물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일이 투명한 랩으로 감싼다. 그리고 그렇게 감싼 것들을 진열하면서 <사소한 기념비>라고 이름 붙인다. 원래 일상의 사소한 사물들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된 이 일련의 작업들은 죽은 사물들에 바치는 제의를 상징한다. 사람이 죽으면 천으로 감싸듯(염) 죽은 사물들을 랩으로 감싸는 것이다. 그러므로 랩으로 감싼 오브제들은 어쩌면 죽은 아이들을 대신하는 분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는 사람들을 퍼즐게임에 초대한다. 세월호를 소재로 그린 엄청난 수의 작은 캔버스 조각 그림들을 관객들로 하여금 하나의 큰 그림으로 짜 맞추게 한 것이다. 세월호에 대해서 언론들마다 온갖 말들을 쏟아내지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 종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추체험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장밋빛 인생>이 있다. 4대강 개발과 방산비리 문제,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과정에서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문제, 식민 제국주의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무려 6000만 명의 토착민을 살해하고 부를 축적한, 그리고 그 부로 지금까지도 장학금을 지급하는 광산거부 세실 로즈의 이율배반을 다룬다. 작가의 사회적 관심이 시공을 초월해 역사에 대한 재독서로까지 확장 심화되고 있음을 알겠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장밋빛 인생을 약속하면서 정작 뒤로는 비리를 일삼는, 장밋빛 인생을 구가하기 위해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권력의 허위를 그리고, 잿빛 현실을 장밋빛으로 포장하는 언론의 위선을 그린다. 그러므로 장밋빛 인생이라는 제목은 역설적 표현인 것이고 아이러니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김을은 드로잉의 한 형식으로서의 집짓기를 예시해준다.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작가의 재치가 번뜩이는 평면 드로잉이 없지 않지만, 특히 이런 집짓기에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작가의 미니어처 집짓기는 홍순명 작가의 스펙터클한(?) 전시와 비교된다. 마치 소인국을 보는 것 같은 이러저런 집들이 있는 풍경이 세계의 축도 같고 일상의 축복 같다. 축복? 홍순명 작가가 사소한 것들을 지목하고 재단하는 제도의 폭력에 주목하고 있다면, 김을 작가는 사소한 것들과 더불어서 꿈꾸는 사람 같고 몽상가 같다. 작가의 드로잉이 촌철살인의 비틀기로 사회적 통념을 갈파하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데, 심지어 집을 짓고 있는 작가에게선 삶에 대한 긍정과 위안 그리고 따뜻함마저 묻어난다. 

이를테면 막돌 위에 아마도 핀셋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렸을 벽돌집이 중세요새를 상기시키고, 그 첨탑에 보이는 창문 안에는 평생을 그 속에 갇혀 살았을 수인에 대한 전설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작품 자체가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또 다른 경우로는 가구를 대지 삼아 그 위에 이러저런 집들을 배치한 풍경(가구풍경?)이 있는가하면, 때로 창문틀마저 집을 위한 터가 되어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집들의 주민으로서 세계 도처의 벼룩시장을 전전하면서 구한 인형들, 미니카, 때로 프린트된 상표가 여실한 과자상자가 어우러지게 한다. 작가의 드로잉이 비틀린 세상을 향해 한 번 더 비틀어 보여준 것이라면, 이 작은 집들이 있는 풍경은 마치 작가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아마도 작가에게 벼룩시장은 중요한데, 그 자체가 전혀 다른 역사,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이다. 그 역사와 시간과 책 속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자 같다. 시간 여행자 같다. 때로 인형이 낯설 때도 있지만, 그 집에선 심지어 냉소마저도 긍정할 것 같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홍순명 작가가 사소한 것들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면, 김을 작가는 사소한 것들에 애정을 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새삼 알게 된 김을 작가의 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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