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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미술관 특별기획전, 내일을 위한 오늘

고충환

2017 신미술관 특별기획전, 내일을 위한 오늘 



예술을 위한 12개의 아포리즘 혹은 좌표 


경제제일주의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자본주의는 그것들을 시대의 변방으로 내모는데, 조르주 바타이유는 그렇게 변방에 그어진 금을 금기며 터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죽음을 지극한 금기라고 보고, 그 대상에 예술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예술에 대해 이런 금기에 대한 위반을 주문한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에서 예술의 당위성을 찾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죽음이니 하는 말들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않다. 경제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변방으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 최근 미술대학들이 경제성도 없고 효율성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축소되고 통폐합되고 아예 폐과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경제성이 떨어지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12개의 아포리즘이 있다. 혹은 속물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헐벗은 정신들을 위한 좌표들이 있다. 


고헌, 스크래치 혹은 상처. 고헌은 알루미늄 표면을 연마해 스크래치를 만든다. 금속성 재질의 표면에서 발광하는 스크래치는 빛에 반응하는 그림이며 빛이 그린 그림일 수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가변적인 패턴을 만드는 것. 여기서 금속성 소재를 몸으로 치자면 그 표면에 난 스크래치는 상처일 수 있다. 그 상처는 스크래치와 마찬가지로 가변적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해관계 여부에 따라서 다중적인 의미를 생산하고 다의적인 의미로 읽히는 것. 누구도 상처에 대해서 일의적인 의미로 단정하거나 단언할 수는 없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스크래치는 상처와 통한다. 너무 깊이 숨어있어서 그 자체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처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루전의 형태로 불러내고 가시화한 것이다. 그렇게 스크래치는 상처를 표상한다. 혹은 스크래치는 상처의 표상형식이다. 


김경섭, 불완전한 기억의 재생. 김경섭은 어릴 때 오로라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오로라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에게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기억한다. 이후 실제와 기억의 차이, 실제와는 무관한 기억의 자족적인 성질, 그 자체 또 다른 실제를 만드는 기억, 그 자체 또 다른 현실인 기억이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부추겼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 현실은 사실은 기억을 되불러와 그 기억이 만들어준 현실을 그리는 것이므로 엄밀하게는 현실을 그린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실은 기억과 현실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간섭하는 애매한 지점을 그린다. 불완전한 기억과 불완전한 현실이 서로 삼투되는 모호한 현상을 그린다. 기억을 도구로 하여 여차하면 깨지고 말 의심스러운 현실을 그린다. 


김정희, 유목민을 위한 빨간 집. 김정희는 숲속에 유목민을 위한 빨간 집을 지었다. 유목민은 정처 없이 옮겨 다니는 삶을 산다. 현대인 역시 디지털 기기의 도움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삶을 산다. 예술가 역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는 지양의 삶(부정을 통해 긍정을 얻는 삶)을 산다. 유목주의자 질 들뢰즈에게 유목은 말할 것도 없이 사유의 유목을 의미했다. 그 사유의 유목이 예술가의 자기부정과 통한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들뢰즈는 디지털기기로 무장한 디지털노매드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보면 현대인은 디지털노매드와 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유목민이 현대인이 예술가가 하나로 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디지털은 개별주체를 위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의 무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디지털의 양가성이다. 숲속의 빨간 집은 그런 현대판 유목민인 디지털노매드의 양가성이 움트는 불온한(?) 집 같다. 


김주희, 소소하거나 잡다한 일상. 김주희는 일상을 그린다. 화가들이 일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원래 화가들은 형이상학과 역사 진리와 진실 같은 거대담론을 그렸다. 그리고 이후 개별주체의 개별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저마다 자기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 작은 이야기며 미시서사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미술은 온통 자기일상, 자기경험, 자기생각, 자기서사, 자기고백으로 넘쳐난다. 그리고 그 형식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낙서며 거리의 미술이다. 개별주체의 존재방식이 제도의 그것에 반하는 것이므로 자연스레 찾아낸 형식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이후 낙서는 제도권 안으로 진입하면서 드로잉이 되었고, 거리의 미술은 거리의 미술대로 제도권미술과는 다른 저만의 형식을 찾았다. 작가의 작업에서도 볼 수 있는 낙서와 드로잉 마카와 테이프가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낙서 같은, 마치 그림일기와도 같은 분방한 형식으로 소소하거나 잡다한 일상을 기록한다. 


김택상, 숨 쉬는 빛. 김택상은 색을 그린다. 엄밀하게는 색을 빌려 빛을 그린다. 그리고 또 엄밀하게는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빛의 분위기를 우려낸다. 색을 머금은 빛의 질감을 조성하고 빛의 결(스펙트럼)을 조성하는 것인데, 그의 그림에선 항상 엄밀한 것이 문제가 된다. 섬세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어서 일의적으로 정의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 화면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빛이라고도 색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빛과 색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사이를 겨냥한다. 이런 작가의 색에 대한 감수성은 현대미술보다는 오히려 전통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있다. 물빛과 쪽빛이 그것이다. 투명성을 머금은 색, 빛을 머금은 색,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색, 그러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미묘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어서 볼 때마다 다른 색, 숨 쉬는 색에 대한 감수성이다. 색면화파에 나타난 불투명한 색과는 비교되는 작가만의 색빛(색을 머금은 빛)이고 빛색(빛을 머금은 색)이다. 


박영학, 가변적인 그리고 중의적인. 박영학의 그림은 가변적이고 중의적이다. 사슴뿔처럼도 보이고, 나뭇가지처럼도 보이고, 마구 얽힌 뿌리처럼도 보이고, 이리저리 연이어진 길처럼도 보인다. 얼핏 숲처럼 보이는 그림 속에 이런 가변과 중의를 포함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 얼룩이 있다. 사실 모든 그림은 얼룩으로부터 유래했고 얼룩으로 환원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얼룩에서 전쟁을 보고 풍경을 보고 홍수를 보고 인간사를 본다.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를 듣기조차 한다.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상파 그림이 이런 뒤범벅된 얼룩, 무분별한 얼룩에 눈 뜨면서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한 평론가는 멀리서 물감 통을 내던져 짓이겨놓은 그림 같다고 했는데, 제대로 본 것이다. 어쩜 가변적이고 중의적인 작가의 그림은 이런 뒤범벅되고 무분별한 얼룩, 암시적인 얼룩, 모든 그림이 유래한 원형적 얼룩을 향해 가는 노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윤택, 간헐적인. 사윤택은 간헐적인 교차, 간헐적인 간섭, 그리고 간헐적인 순간을 그린다. 여기서 간헐은 사이와 틈새에 해당한다.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풍경과 풍경 사이, 현상과 현상 사이에 해당한다. 사이를 매개로 시간과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과 공간이 간섭되는 순간을 그리고 차원을 그린다. 그건 우선은 물리적인 과정을 그리는 것이며, 운동선수의 몸 궤적을 포착하고 분해한 에드워드 마이브릿지의 사진을 닮았다. 그리고 심리적인 과정을 그리는 것이다. 의식과 의식 사이를 파고드는 무의식을, 실재계의 출몰을, 결핍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차이를 그리는 것인데, 지각과 생각(혹은 관념)의 차이를 그리는 것이다. 과정을 그리고 이행을 그리는 것이며, 사이와 틈새를 그리고 차이를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차이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교환되는 생기, 간헐적인 생기, 물리적인 작용으로 환원된 생기가 형태를 변형시키는 형태로 확대 재생산된다. 


연영애, 자연에서 발견한 생명 에너지. 자연 그러므로 존재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식으론 기에 해당하고, 다르게는 생명에 해당한다. 그렇게 기와 에너지와 생명은 하나로 통한다. 그러나 그건 분명 존재하는 것이지만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따로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비가시적 실체를 어떻게 가시화하는가가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각각 자연과 자연성, 피직스와 나투라, 감각적 자연과 자연의 원인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기와 에너지와 생명은 자연성이며 자연의 원인에 해당한다. 다르게는 자연의 원형 혹은 원형적 자연으로 봐도 되겠다. 연영애는 그런 자연성 곧 자연의 본성을 그리고, 자연에서 발견한 생명 에너지를 그린다. 그 자체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자연의 운동성을 그린다. 그 자체 감각적 닮은꼴을 위한 재현적인 대상으로서보다는 자연과 주체가 경계 너머로 서로 넘나들어지는 상호작용과 교감을 그린다. 


이윤희, 최소 사양.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삶을 산다. 그가 살고 있는 삭막한 회색도시에 자연이 이식되는데, 가로수도 그렇게 이식된 자연 중 하나다. 가로수는 도시에 이식된 자연답게 자연의 본성보다는 도시의 생리에 맞게, 도시적 삶의 이해관계에 맞춰 그 본성이 재단된다. 이를테면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가게간판이 잘 안 보인다는 이유로, 전깃줄에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가지치기 되는데, 때로 보기에 안쓰럽다. 이윤희는 그렇게 가지치기 된 가로수를 그린다. 최소 사양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관계가 최소한으로만 한정되는 것. 이를테면 인간에게 휴식과 쉼의 계기를 제공하고, 이따금씩 상실된 자연을 상기시키는 정도로만 한정되는 것. 이처럼 인간에 의해 재단되는 자연이 불현듯 제도에 의해 재단되는 인간이라는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를 상기시킨다. 어쩌면 작가는 가지치기 된 가로수를 매개로 사실은 이런 제도화된 사회의 표상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임미나, 도시의 욕망 혹은 욕망하는 도시. 임미나는 도시를 그린다. 밤의 도시를 그린다. 도시는 낮보다 밤이 더 도시답다. 도시는 낮에 잠들어 있다가도 밤이면 어김없이 깨어난다. 환락도시다. 환각도시다. 이처럼 밤에 도시가 활기를 되찾으면 사람들은 마치 부나비처럼 도시의 불빛 아래로 모여든다. 그곳에선 번쩍거리는 인공불빛과 은근한 빛을 발하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네온사인 간판이 주연이다. 사람들은 그 주연이 발하는 빛의 아우라, 돈의 아우라, 물신의 아우라, 욕망의 아우라에 가려 개별성을 상실한다. 스펙터클에 묻혀 익명성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그렇게 개별성을 상실하고 익명성으로 변질된 사람들의 무리가 흘러가고 흘러온다. 그렇게 욕망하는 도시를 그린 작가의 그림은 뚜렷한 실체를 얻는 물신과 실체를 상실한 익명적인 군중을 대비시킨 제라르 프로망제를 닮았다. 작가가 주요 재료로서 도입하고 있는 에나멜과 홀로그램 필름이 도시를 닮았고, 욕망하는 도시의 생리를 닮았다. 


전하라, 피부 아래. 사람들은 피부 아래쪽에 외로움을 쌓고 결핍을 숨겨놓고 있다. 투명해서 잘 보면 보일 것도 같은데, 사실은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투명하고 깊은 피부 아래쪽에 저마다 저만의 외로움이며 결핍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전하라는 그 외로움을 그리고 결핍을 그린다. 흔히 손발이 저릿저릿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으면 전기가 찌릿찌릿 통한다고도 한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저릿저릿하고 찌릿찌릿한, 몸을 관통하는 전기(혹은 기)를 그린 것 같다. 아니면 전기로 화해진 외로움을 그리고 결핍을 그린 것 같다. 그 자체로 형태도 색깔도 없는 외로움과 결핍에 형태를 부여해주고 색깔을 덧입혀준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움과 결핍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서로 손을 맞잡아 외로움과 결핍을 교환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고 덜어내는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최익규, 의미 있는 쓰레기들. 최익규는 전시장 바닥에다가 방부제가 섞인 수입 밀가루로 HA HA HA라고 쓴다. 그리고 같은 글씨를 천에다가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는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주문한다. 좀 뭐하면 속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렇게 읽다보면 어느새 피식하고 웃음이 새나오고, 웃음은 여하튼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이게 예술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가. 냉소인가. 허무인가. 무의미한 일을 짐짓 진지하게 수행하는 일의 유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인가. 작가는 현대미술이 알고 보면 쓰레기일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동의하는 바가 있어서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보기에 따라서 현대미술은 쓰레기일 수 있다. 다만 의미 있는 쓰레기들, 예사롭지 않은 쓰레기들, 진지한 쓰레기들이다. 그래서 다른 쓰레기들처럼 함부로 버릴 수도 없다. 현대 미술가는 그 쓰레기 잔해를 뒤져 의미를 캐내는, 삶을 의미 있게 해줄 의미를 캐내는 박물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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