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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에 대한 다른 생각

고충환

풍경에 대한 다른 생각 



풍경은 객관적 지평이 아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어떤 이에게는 쓸쓸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생명이 약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이 다른 이에게는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뚜렷한 의미로 와 닿는 풍경도 동시에 온통 수수께끼로 덧칠된 아리송한 풍경으로 다가올 수가 있다. 프로이트는 친근한 것(캐니)이 그 속에 낯선 것(언캐니)을 내장하고 있다고 했다. 낯선 것이 친근한 것의 본성이며 잠재적인 성질이라는 말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에 대해 논하면서 나온 말인데, 친근한 것이 불현듯 낯설어질 때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그렇게 풍경은 견고하지가 않다. 박약하다. 언제 어떻게 그 전망이 허물어질지 모르고 이행할지 모른다. 풍경은 움직인다. 이중적이다. 양가적이다. 단정적으로 주어지지도 정의되지도 않는다. 언제나 다만 00처럼 보이는 풍경, 00같은 풍경이 있을 뿐이다. 주와 객이, 주체와 세계가 긴밀하게 연동된 것인데, 이걸 메를로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언제나 지각된 세계이며, 이미 그 자체로 내가 투사된, 내가 포함된, 나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세계다. 그렇게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의 수만큼의 세계가 있고, 풍경이 있고, 전망이 있고, 지평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유정연(낯선 풍경), 이계연(이상향으로서의 풍경), 김상진(아득한 풍경), 세 작가가 서로 물고 물리는, 겹치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풍경에 대한 다른 생각, 다른 전망, 다른 지평을 열어놓는다. 


유정연, 인형이 있는 풍경 


작가의 그림엔 인형들이 등장한다. 피노키오, 뽀빠이,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깡통로봇, 도기 인형들, 아기 천사 혹은 큐피드, 마리오네트. 그리고 여기에 가면무도회의 가면들이 가세한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형들이 있고, 원래 사람이 있었을 자리에 가면들이 있다. 인형들이 사람을 대체하고, 가면들이 사람들을 대신한다. 인형들의 풍경이고 가면들의 세상이다. 인형과 가면들이 알만한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 현실적인 풍경을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여기서 인형은 억압된 유년을 상징하고, 유년은 금지된 쾌락원칙을 상징한다. 인형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상실된 유년을 되불러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금지된 쾌락원칙을 우회적으로 실현한 것(현실에선 금지된 탓에 꿈을 통해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그리고 어쩌면 예술을 통해 실현하는)에 대한 처벌을 수행한다. 그래서 인형은 예쁘고 그로테스크하다. 친근하고 낯설다. 그리고 가면은 페르소나를, 제도적 주체며 사회적 주체를 상징한다. 타자가 욕망하는 주체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를 본적도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 나는 나를 본적도 볼 수도 없다?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의 손에 달린 실을 조정하는 사람을 볼 수 없듯, 페르소나 뒤에 숨은 아이덴티티를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인형들을 보여주고, 가면들을 보여줄 뿐. 여기서 인형과 가면들은 작가의 분신이며 익명적 주체를 상징한다. 그렇게 때로 나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익명적 주체들로 분화되고 분배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얼굴 없는 사람들, 익명적인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정체성 상실과 혼란이라는 징후와 증상을 앓는 현대인의 친근하고 낯 설은 삶의 풍경을 예시해준다.  


이계연, 이상향으로서의 풍경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원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다. 작가는 이 목록을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곳들의 목록으로 바꿔놓고 있다. 크게는 가보아야 할 곳들이 해야 할 일들 중 하나일 수는 있겠다. 그렇게 가보고 싶은 곳들을 그림과 엽서, 사진과 미디어이미지 그리고 때로 미술사와 상상력 등 다양한 출처와 채널로부터 광범위하게 차용해와 하나의 화면 속에다 부려놓는다. 그렇게 부려진 화면 속 풍경이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풍경이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이어서 친근하고, 그 풍경들이 사실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편집되고 재구성된 것이어서 낯설다. 친근한 걸 낯설게 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소외효과 혹은 소격효과에 연동되고, 상호간 이질적인 풍경과 풍경을 한자리에 놓는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를 연상시킨다. 잡다한 것들을 그러모아 그럴듯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브리콜레르라 하고 그 결과물을 브리콜라주라고 하는데, 이런 브리콜라주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보고 싶은 곳들의 브리콜라주다. 그게 뭔가. 현대판 유토피아고 이상향이다.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산수는 실재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관념을 그린 것이고 이상향을 그린 것이다. 실재를 닮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실재 그대로라기보다는 실재를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비록 내가 그기에 갈 수는 없지만 그기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려진 것이고, 자연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소유한 것에 진배없는 자기만족을 위해 그려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브리콜라주 풍경은 전통적인 산수화에 반영된 욕망(그리고 모르긴 해도 서양화에서의 풍경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을 계승하고 이를 현대판 버전으로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지금여기가 아닌 저기저곳을 욕망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든다. 


김상진, 겹풍경 


원래 풍경은 복잡하다. 따라서 풍경을 그린 모든 그림들은 사실은 복잡한 풍경을 단순화해 그린 것이다. 그걸 재현이라고 한다. 재현이란 말하자면 실재 그대로를 그린 것이 아니라, 복잡한 실재를 단순화하는 저마다의 방법을 찾아내 이를 적용해 그린 것이다. 따라서 단순화하는 방법이 작가의 개성을 결정하고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결정짓는다. 풍경을 볼 때, 특히 산을 볼 때 산은 중첩돼 보이고 겹겹이 겹쳐 보인다. 작가가 자연에서 그리고 풍경에서 찾아낸 재현이고 단순화하는 방법이다. 겹쳐 보이는 풍경이고 겹풍경이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화된 시각으로 바다를 볼 때 바다는 광활해 보이고 평평해 보인다. 아득한 저만치서 하늘이라는 평면과 바다라는 또 다른 평면이 수평선으로 맞닿는 것처럼 보인다. 평면화된 풍경이며 미니멀한 풍경이다. 겹풍경과 평면풍경이 말하자면 작가가 자연이며 풍경을 재현하는 방법이고 단순화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패널을 중첩시켜 쌓는 방법으로 겹풍경을 표현하고, 평면과 평면을 잇대어 붙이는 방법으로 평면풍경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기와 만들기, 회화적 프로세스와 공작과정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그 경계를 허물고 혼재된다. 단순화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사물대상의 본질을 추출한다는 것이며, 자연풍경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을 추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재현과 추상, 형상과 추상의 경계 상에 놓인다. 경계 위의 풍경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여기에 빛과 라인을 도입한다. 면에서 라인으로 자연을 더 단순화한 것이며, 빛을 매개로 기왕의 광활하고 아득한 풍경, 고요하고 적요한 풍경에 따뜻한 빛, 치유되는 빛, 위로가 되는 빛을 더한다. 아마도 자연에 대한 작가의 감정(아득하고 광활한)이 투영되고, 빛에 대한 작가의 감성(따뜻한)이 투사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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