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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용 야후이/ 자연의 순례자, 내면여행

고충환

시용 야후이/ 자연의 순례자, 내면여행 


멀리 설산 혹은 암산이 보이는 풍경, 아마도 설산 혹은 암산에서 발원했을 강줄기가 초원지대 너머로 범람하는 풍경, 초원지대 위로 허연 배를 드러낸 마른 강바닥과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고여 있는 풍경, 초원지대를 가로지르며 끝도 없이 연이어지다가 종래에는 산속으로 숨어든 길이 있는 풍경,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와 정상을 비추는 빛과의 대비가, 대개는 구름과 어우러지거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먹구름과 대비되면서 은근한 빛을 발하는 빛의 질감이 왠지 성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풍경(영산?), 여백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맞닿는 강과 하늘이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초원지대에 멈추어 선 자동차, 먹구름 사이로 비쳐드는 빛줄기의 세례를 받고 있는 자동차, 뒤쪽으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초원지대를 내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여기에 주변을 가두듯 에워싼 칠흑 같은 밤 속을 저 홀로 관통하는 버스와 꿈을 꾸듯 아롱거리는 마천루. 

비록 자동차가 있고 도시야경이 있지만, 작가가 그린 그림의 주연은 단연 자연풍경이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자연풍경은 흔히 그렇듯 도시로부터 소외된 변두리와 같은 변방풍경도 아니고, 도시에 이식된 섬과 같은 인공적인 풍경(이를테면 공원)도 아니고, 이따금씩 도시로부터 탈출하고픈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투사된 전원풍경도 아니다. 그의 자연풍경에는 도시의 흔적(사회적 풍경)도, 인간과의 관계(존재론적 풍경)도, 문명에의 기억(낭만주의 풍경)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랜만에 자연 자체를 보는 것 같고, 풍경 자체를 보는 것 같다. 그동안 인간의 발길과 문명의 입김이 미처 가닿은 적이 없는 처녀지와 대면하는 것 같다. 이런 자연, 이런 풍경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보면 세계가 꽤 큰 모양이다. 세계에는 이렇듯 순례자들에게만 드물게 자기를 내어주는, 여전히 자연이 주인인 땅이 남아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땅을 오지라고 부른다. 자연의 원래상태며 처음상태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된 원형적자연이며 원초적자연이다. 
시용 야후이는 이런 자연을 찾아 나서고 그렇게 찾아진 풍경을 그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찾아 나서는 행위는 그리는 행위에 선행한다. 뭘 왜 찾는가가 그림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리는 행위를 정당화시켜준다. 자연의 원형을 찾고 풍경의 원초를 찾는 것인데, 그건 곧 자기의 원형을 찾아나서는 정신적인 여로이며 내면적인 여행에 해당한다. 외면적인 여행으로 하여금 내면적인 여로의 표상이 되게 한 것이다. 비록 외적인 모티브는 자연이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자기가 유래한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 알다시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자연에서 왔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자연을 존재의 모태(옴파로스)라고 했고, 존재의 어미(가이아)라고 했고, 존재의 자궁(매트릭스)이라고 했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 더욱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미처 인간의 손길이며 문명의 입김에 오염되지 않은 원형적 자연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사실은 자신을 그리는 것이다. 알고 보면 자연에 이입된 자기, 자연에 압도된 자기, 자연을 통해 본 자기, 자연의 일부로서의 자기, 자연의 얼굴을 한 자기, 자연에 숨은 자기를 발견하고 캐내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오지를 찾아 나선다. 근 10여년을 자동차를 타고 티베트 일대(중국서부자치구 히말라야 고지대로서 불교의 낙원이며 정토로 알려진)며 청장고원 일대(칭장고원 혹은 티베트고원으로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큰 고원지대로서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진), 커커시리 자연보호구역 일대(고원 북서부 지역으로서 몽골어로 청색의 산등성이라는 의미의)를 탐사한다. 그렇게 탐사하면서 강과 호수, 산과 하늘, 야크와 초원, 건조 스텝지역과 만년설, 설산과 암산과 같은 자신의 마음이 머문 자리, 어쩌면 마음을 빼앗긴 자리를 그린다. 순례자들에게 성지로 알려진 장소를 그린다. 인격신이 아닌 범신론에 가까운, 모든 원초적 자연이 성지다. 그런 만큼 성지라고해서 특별히 알아볼 만한 표식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 발 닿는 곳이 온통 성지고 눈에 밟히는 것이 온통 성지인, 그런 성스러운 땅(영지?)을 그린다. 적어도 그곳을 찾는 순간만큼은 작가 자신이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거듭나는 순간을 그리고, 원형적 자연과 원초적 자신이 허물없이 만나지는 극적 순간을 그린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향한 지극한 시선에 대해 세계가 드물게 자신을 열어서 보여준다고 했다. 세계가 열리는 것(세계의 개시)이다. 알만한 동양적 표현으로는 주와 객이 경계를 허물어 합일되는 극적 순간이다. 이렇게 작가가 뭘 그리는지, 그리고 왜 그리는지가 해명이 된 셈이다. 외관상 자연을 그렸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자신을 그린 것이다. 원형적 자연을 찾아 헤매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진아(불교에서의 진정한 자기)를 찾아 내면여행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다. 작가가 뭘 그리고(소재) 왜 그리는지(주제의식)를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그리는지(형식과 방법론)를 해명할 차례다. 작가의 그림엔 유독 옆으로 긴 그림이 많은데, 옆으로 길 때 자연은 더 자연답다. 흔히 수직구도는 심산유곡과 같은, 내면으로 치자면 심연과 같은 깊이와 관련이 깊고, 그런 만큼 관념적이다. 반면 수평구도는 막막하고 아득하고 가없는, 지워진 경계 안쪽에서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정서를 파고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지워진 경계 너머로 아득한 그리움(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이 깊은)을 불러일으키고, 맑고 투명한 색감이 꿈을 꾸듯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서 단연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으로 치자면 질감이다. 얼핏 수묵에서의 선염과 같은 붓질을 연상시키면서도 도대체 그림으로는 형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질감이 그림에 깊이와 변화무상한, 비결정적인 특유의 분위기를 더한다. 
사물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정서를 파고드는 울림, 그리고 여기에 투명성을 머금은 색감과 형언할 수 없는 질감이 그림을 넘어선다. 그림을 넘어선다? 바로 도유화다. 도자기유약으로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도자기로 유명한 중국 경덕진(징더전) 출신이다. 원래 유화로 수상경력이 있을 만큼 유화에 능했지만, 도중에 유화를 접고, 혹은 유화를 살려 도유화로 전환했다. 와중에 숱한 형식실험들이 있었지만, 그 형식실험들은 크게 색요(색유)와 요변으로 모아지는 것이었고, 전통적인 색요와 요변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자기화한 것이었다. 여기서 색요는 말할 것도 없이 색이 있는 유약을 의미하고, 요변은 유약이 불러일으키는 천변만화한, 변화무상한, 종잡을 수가 없는, 우연한, 우연과 필연의 상호작용성이 만들어낸 효과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화려하고 오묘한 색감과 같은, 색과 색이 미묘하게 서로 섞여드는 것과 같은, 미세한 표면균열과 같은, 표면에 섬세한 곰보와 비정형의 요철을 만드는 질감과 같은, 마블링과 같은, 얼핏 오랜 바위 표면에 낀 마른 이끼며 이끼화석을 보는 것과 같은, 고온에도 안료의 미세한 결정체가 분해되지 않은 채 여실한 것 같은. 
일일이 말로서 그리고 글로서 형언할 수 없는 이 오묘한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도자의 기본인 흙(소지)과 물(건조)과 불(소성)과 공기(산화), 그리고 여기에 색요(투명성을 머금은 색감)와 요변(우연한 효과와 가변성)의 상호작용성에 의한 것이며, 그 작용성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형식실험 끝에 성취한 것이다. 아마도 회화에 대한 탄탄한 배경이 있었기에 이렇듯 도유화로 승화된 독창적인 해석도 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는 예술이란 감정 더하기 기술이라고 했다.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개념미술 이후 머리로 읽는 예술도 있다지만, 아무래도 예술은 감정이 동해야 한다. 감동을 주는 예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감정을 움직이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다. 최소한 감정은 진정한 예술의 덕목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정에 호소해오고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도유화로 나타난 남다른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때로는 회화를 넘어서거나 최소한 회화와는 다른 독창적인 기법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기술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편에 머문다. 저마다 원초적인 풍경 앞에 서게 하는 것, 원형적인 자연과 대면하게 하는 것, 그러므로 종래에는 자신의 숨겨진(혹은 억압된) 자아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땅 너머에 있는 성지와 영지를 꿈꾸게 하는 것, 그러므로 궁극에는 존재의 고독을 깨닫고 인정하고 싸안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과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하다. 그리고 고독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고독한 자연과 고독한 존재가 서로 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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