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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섭/ 풍경,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고충환

이정섭/ 풍경,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작가 이정섭은 근작의 주제를 <텍스트풍경>이라고 부른다. 이 주제는 지난번 전시(2012) 주제인 <보도기사의 회화적 상상>과 통한다. 형식적으로도 통하고 내용적으로도 통한다. 전번 전시와 일정한 간격이 있음에도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주제를 심화 확장시키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텍스트풍경은 텍스트가 있는 풍경이고 읽는 풍경이다. 읽는 풍경? 작가의 텍스트풍경은 그림은 보는 것인가 아님 읽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거친 답을 제안하자면 그림은 보는 것과 읽는 것, 아는 것과 보는 것을 각각 날실과 씨실 삼아 하나로 직조된 직물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일정정도 개념미술의 성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텍스트풍경에서 텍스트란 뭔가. 보도기사다. 매스미디어 중 특히 각종 신문보도기사를 발췌해 화면에 콜라주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린 것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라고 한다면 인터넷에 더 친숙하겠지만, 작가는 신문세대에 속하고, 그런 만큼 미디어에 대한 세대감정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최근 수년 내에 한국은 전에 없던 격변기를 보냈고, 지금도 여전히 통과 중이다. 그런 만큼 보도기사란 것이 대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고 있고, 작가는 그 사안들을 발췌했다. 눈에 띠는 단어들만 열거해 봐도 사안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음을 알겠다. 이를테면 대선정국, 청문회, 제주 강정마을, 세월호, 유병언 수사, 대통령 탄핵, 파면, 헌재, 탈원전, 반기문, 세무조사, 대우조선 서별관 회의, 친인척 비서관 채용, MB정권 꼬리 자르기, 굴뚝산업, 아베, 오바마, 고노담화, 박근혜, 드레스덴 선언, 성폭행, 미세먼지, 당권, 지도체제 등등. 실생활과 관련된 부분, 이를테면 경제적인 경우보다는 단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안들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음을 알겠고, 그만큼 격동적인 시대를 지나쳐왔음을 알겠다. 전작에서도 보면 투표 기표와 낚싯바늘(아마도 정치풍자?), FTA(각각 한글과 영어, 성조기와 태극기가 하나로 결합된),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애플사 로고가 때론 그림으로 그리고 더러는 오브제로 콜라주 되는가 하면, 선거에 출마한 선량들의 초상사진과 처음처럼 소주 그림이 오버랩 된 경우(아마도 초심을 잃지 말라는 주문일 것)도 있다. 
그러므로 텍스트풍경은 다르게는 정치적 풍경이고 사회적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한 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풍경이고, 시대적 표상으로서의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써 현실참여의식과 리얼리즘 미학이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되고 있음을 알겠다. 예술은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개 작가가 느끼는 시대감정은 우리 모두의 감정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풍경은 우리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 개인에 속한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객관성을 얻고,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이를테면 생각하는 동물(호모사피엔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호모로쿠엔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호모파베르), 놀 줄 아는 동물(호모루덴스) 등등, 그 중 작가의 그림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호모폴리티쿠스)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만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예술이 정치고 삶이 정치다. 무인도의 걸리버라면 모를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예술도 없고 정치와 무관한 삶도 없다. 예술을 상징투쟁과 인정투쟁이라고 본 피에르 부르디외의 정의도 있지만, 이로써 작가는 어쩜 유별난 주제라기보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주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우리 모두는 정치적 삶을 살고 있다는, 사회적 현실로 직조된 풍경,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풍경, 이데올로기적인 풍경을 살고 있다는. 혹 저마다 속으로 삼킨 말을 은연중 대변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 어디에 정치가 있고 사회적 현실이 있고 현실참여가 있는가. 외적으로 보기에 작가의 그림은 그저 흔한 혹은 평범한 풍경처럼 보인다. 드문드문 조각난 하늘이 보이는 수목을 배경으로 나무의자와 벤치가 있는 공원, 나룻배가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는 풍경, 구름과 안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산세, 그리고 굽이지며 희미하게 사라지는 돌아앉은 길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솔길 같은. 그리고 여기에 때로 붉은색과 같은 다른 색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파란색의 모노톤 색상이 그림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면서 어떤 서정적이고 정서적인, 관념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에로 이끈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다만 저마다의 서정과 정서를 파고드는 감성적인 풍경일 뿐인가. 그런 그림이 없지 않지만(감성적인 풍경은 분명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덕목이고 한 축이다), 대개의 그림은 여기에 머물지가 않는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브들 자체는 낱낱의 사물형상에 해당하면서, 이와 동시에 그 자체 각별한 의미를 내장한 상징적 기호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연꽃은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고, 구름은 무상한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산세며 길이 있는 풍경은 모호한 경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시대적 징후와 증상을 반영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을 상징한다. 선과 악, 진과 위, 참과 거짓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혼돈상황을 상징하고, 의심과 불신의 시대감정을 반영한다. 
여기에 파란색과 빨간색도 이런 시대감정이며 정치적 상황논리와 무관하지가 않다. 아마도 특정정당의 상징색일 것이고,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반영한 색채감정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중세 종교화에 나타난 상징체계를 이코노그래피 곧 도상학이라고 하는데, 말을 하자면 정치적 도상학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이런 정치도상학에서 상징색은 결정적이다. 작가는 실제로 언론과 여론이 특정이념과 특정정파에의 쏠림현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사건(콜라주 된 관련신문보도기사로 표현된)과 날(그림 위에 덧그려진 일련의 숫자들이며 날짜들로 재현된)을 때론 파란색으로 그리고 더러는 빨간색으로 적용해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색만 보면 도대체 그날 무슨 정치적 광풍이라도 불어 사람들을 온통 달뜨게 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색만으로는 다만 암시적으로만 알 수가 있을 뿐이다. 결정적인 것은 작가가 화면에 한 땀 한 땀 수놓듯 채집하고 콜라주해 놓은 관련신문보도기사들이다. 이 일련의 기사들과 상징 색, 그림에 덧그려진 일련의 숫자들과 날짜들, 그리고 여기에 무슨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작가가 그림 속에 숨겨놓고 있는 이러저런 표상들, 이를테면 종이학과 열린 새장(희망?), 그리고 상대적으로 좀 더 잘 드러나 보이는 편인 솟대(지킴이?)와 매화(도래할 봄날?), 그리고 아예 공공연한 스텔스기(미국과의 관계?)와 위안부소녀상(일본과의 관계?)과 같은 표상들을 조합해보면 비로소 그동안의 정치적 현실이며 현장을 재구성해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정치적 현실을 회화적 표현을 빌려 재구성해놓은 것이고, 따라서 정치적 현실에 대한 논평일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붙여놓고 있는 제목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으로, 키워드로 봐도 되겠다. 알다시피 작가의 그림은 레이어로 중첩돼 있다. 정치사회적 현실을 전하는 각종 신문보도기사들을 발췌해 화면에 촘촘하게 배열하고 재구성한 것이 그 하나이고, 그 위에 덧그려진 풍경이 또 다른 하나이며, 여기에 일련의 숫자(대개는 날짜)들과 선뜻 그 의미를 알 수는 없는 마치 알레고리와도 같은 표상형식들이 또 다른 한 층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을 하나로 조합해보면 비로소 정치적 현실이 재구성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얼핏 봐서 정치적 현실은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제목에 비추어보건대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풍경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정치적 현실이다. 그래서 얼핏 풍경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은폐된 현실이 보이고, 숨은 정치적 현실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진실은 겉보기와는 다르다. 표면과는 다르다. 진실은 숨어있고 은폐돼 있다. 그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간을 읽으려는 노력에 대해서만 자기를 내어주고, 이면을 읽으려는 의지에 대해서만 비로소 자기를 열어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풍경 속에 정치적 현실에 대한 논평을 숨겨놓고 있고,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숨겨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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