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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삶의 축도, 유년의 놀이를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고충환

김성수/ 삶의 축도, 유년의 놀이를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Octagon과 Cosmos. 팔각형과 우주 혹은 팔각형의 우주. 지구의 축소판? 삶의 축도? 작가 김성수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다. 조각은 물성이 강해, 보기에 따라선 물성 자체가 형식이고 주제이기도 한 것이어서 따로 주제를 가정하거나 전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주제를 가정하고 전제한 것은 작가의 작업이 서사적임을 말해준다. 문학적임을 말해준다. 어떤 메시지를 특정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사회적 조각이 되고 존재론적 조각이 되게끔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서사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매개로 공감을 얻는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는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건너온 이야기, 현실을 각색한 이야기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엔 사회를 보는 자신의 관점과 현실을 대하는 저만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 
그렇게 옥타곤과 코스모스로 나타난 주제에는 작가의 관점과 태도가 함축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우주와 함께 질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질서로 본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신은 질서와 함께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그 의미가 대동소이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옥타곤은 팔각 변으로 이루어진 평면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면이라고 생각했고, 그 평면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낭떠러지 밑에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각 평면은 지구를 상징한다. 
여기에 작가는 팔각 평면을 삶의 축도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평면의 바닥에는 격자 패턴의 금이 그어져 있어서 체스 판이나 바둑판을 연상시킨다. 말에 해당하는 군소조각들이 등장하는 걸로 치자면 바둑판보다는 체스 판에 가깝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바둑판을 그리고 서양에서는 체스 판을 삶의 축소판으로 봤다. 그런 점에서 팔각형의 우주 혹은 팔각형으로 한정된 공간을 우리가 사는 지구로 보고 삶의 축도로 본 작가의 입장은 전통적인 상징형식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 삶의 축도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우호적이기보다는 공격적인 경우로 보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삶은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에 의해 견인되고, 존재론적으로 삶은 부조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팔각형은 격투기경기장을 의미하기도 한다는데, 삶을 탈출구가 없는 링으로 보고 정글로 본 것일 터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가 그렇고, 존재론적인 경우로는 존재를 세계에 (내)던져진다고 표현한 하이데거의 경우에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존재는 특정의 의미와 가치관으로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에 따른 부조리한 인간이며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의미한다. 팔각형의 한정공간으로 축도된 작가의 세계 역시 이런 현실, 이런 존재론적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지가 않다. 얼핏 동화적 판타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을 재현한 것이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말들이 알고 보면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병정들이다. 
이처럼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공간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놓았다. 조각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상황의 알레고리를 재현한 상황조각으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조각엔 말하자면 연극이 있고 연출이 있고 상황이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상식에 부합하는데, 흔히 삶을 삶이라는 무대에서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역할극으로 보는 것이 그렇다. 앞서 말했듯 비록 동화적 판타지로 각색된 탓에 실제로 피바람은 불지 않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박 터지는 경쟁이 있고 아비규환이 있다. 지옥이 있고 비극이 있다. 예컨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원작을 패러디한 <메두사의 뗏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식인행위가 자행되고 있고, 화산섬에선 삶의 무분별한 욕망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실제로는 피어오르는 인공연무로 대신한 것이지만(사실상 같은 테마를 다룬 2016년 전시에서 보듯), 부나방처럼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화산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무리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말들도 알고 보면 장난감 병정인형을 조형한 것이다.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논리를 순진무구하게 혹은 천진난만하게(?) 표현한 것이다. 
순진무구하게? 천진난만하게? 순진무구한 폭력? 천진난만한 부조리? 역설이다.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적 표현을 통한 강조화법이다. 역설을 통한 강조 화법? 일종의 잔혹동화를 생각하면 되겠다. 원래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폭력적인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행복한 결말과 비극적인 종말 이야기가 날씨와 씨실로 직조돼 있었다. 그렇게 삶의 원형적 성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이런 원형적 이야기를 각색하고 억압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동화를 교육적으로 권장할 만한 이야기로 각색하면서 억압이 일어난다. 그렇게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행복한 결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에 전수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동화에는 폭력적인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인 종말 이야기가 억압돼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 이로써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폭로한 것이 잔혹동화다. 판타지가 부조리한 현실을 억압하는 것처럼 잔혹동화는 동화의 억압된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잔혹동화가 현실보다 더 잔혹하다. 사실이 극화되는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삶, 비극적인 삶의 실재가 더 잘 부각되기 때문에 그렇고, 더욱이 이때의 부각이 적어도 외적으로는 여전히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세상만사 모든 일은 이중적이다. 겉보기와 실제가 다르다. 동화도 그렇지만 장난감도 꼬마들의 놀이도 사실을 알고 보면 어른들의 폭력을 전수하는 경우들이 많다. 더욱이 가상현실이 보편적인 현실이 된 작금의 현실에서는 더 그렇다. 이를테면 인터넷게임에선 폭력경쟁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한다. 마치 어른들의 놀이에 해당하는 대중문화와 특히 성인영화에서 선정성경쟁이 결정적이듯. 그렇다면 이처럼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폭력,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아비규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이처럼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 이중적인 현실, 현실의 그림자를 캐니의 얼굴을 한 언캐니라고 부르고(언캐니는 캐니의 잠재적인 한 속성이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자크 라캉은 복수를 위해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하는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 돌발적인 출현(이를테면 세월호?)이라고 부르고, 슬라보예 지첵은 질서가 구축한 현실을 일소하는 사막,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정글과 링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 놓았다. 순진무구해서 더 잔인한 폭력을, 천진난만해서 더 무서운 부조리를 옮겨놓았다.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의 실재를 옮겨놓았고, 판타지의 얼굴을 한 억압적인 현실의 민낯 그대로를 옮겨다 놓았다. 
보기에 따라서 이 작업은 그동안 제작되고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이 집대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 작가 작업의 결정판일 수 있다. 팔각평면을 체스 판에 비유되는 삶의 축도라고 했다. 그리고 체스 판에는 이러저런 말들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개별성을 유지하다가도 이처럼 한데 모이면 상황조각의 일부로서 편입된다. 말들 자체는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아야 하고, 그런 만큼 차후에 말들이 다른 말들로 대체 연출되면서 지금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줄 것이지만,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세상사를 재현한다는 큰 개념의 틀은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인간사의 스펙트럼을 전개해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임을 넘어 연출가가 된다. 마치 체스 판에서 말들의 운용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하듯 어떤 말들이 출현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말들과 말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양한 현실, 가변적인 현실, 비결정적인 현실표현이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전작에서처럼 용암분출을 대신한 인공연무나, 근작에서와 같은 우주를 대신한 영상스크린과 같은 장치들이 조각에 부수되면서 조각을 확장할 것이다. 영상스크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근작의 경우에 속이 비쳐 보이는, 그래서 설치작업과 영상이 겹쳐 보이는 투명스크린을 설치작업 둘레에 둘러쳐 감각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영상에는 그래픽으로 재현된 거대한 고래 한마리가 유영하면서 전시공간을 물속환경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고래는 재차 별자리로 환원되면서 공간 역시 밤하늘과 같은 우주환경으로 변주된다. 그리고 마침내 고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무한대 기호로 환치되면서 존재론적인 환경, 상징적이고 도상학적인 환경을 펼쳐 보인다. 
마치 한편의 잘 짜인 영상 쇼를 보듯 느리게 흐르다가도 불현듯 빠르게 전환되는, 블랙홀처럼 이미지를 빨아들이다가도 문득 화이트홀처럼 이미지를 뱉어내는 반복 순환과정과 더불어서 이 모든 이미지들의 변주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고래가 동시에 별자리로 그리고 무한대기호로 변주되면서 덩달아 공간 환경 역시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물속환경은 아마도 생명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모든 존재는 물에서 왔다). 그리고 우주환경은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고독한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모든 존재는 고독하다). 그리고 무한대기호는 이처럼 고독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무한순환 반복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끝이 없다). 존재론적으로는 생과 사가 순환 반복되는 자연의 섭리를, 그리고 불교적으로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윤회(업?)의 고리를 떠올리게 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영상을 매개로 서사가 눈에 띠게 확장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고, 모르긴 해도 이런 매체를 매개로 한 서사의 확장은 추후 작가의 작업에서도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이 모든 서사의 발단은 작가의 유년시절 장난감 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최초 장난감 놀이에 억압된(은폐된?) 어른들의 놀이(전쟁놀이?)를 조망하던 서사가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의 현실을 조망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재차 존재의 근원과 유래를 예시해주는 예지적 비전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의 표면과 이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은폐된 현실, 억압된 현실을 폭로하고, 현실과는 다른 현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을 열어서 보여준다. 
조각에선 조형감각이 절대적이지만 설치작업에선 연출력이 결정적이다. 상황논리에 대한 이해, 관계에 대한 이해,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공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이다. 조각을 아우르면서 설치로 확장되는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조형감각과 함께 연출력이 요구되고 있고, 작가는 이에 꼭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개념미술 이후 조각은 이전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작가 층도 두텁지가 않다. 특히 노동과 물성이 강조되는 직조에 매진하는 작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조각 역시 변화된 개념과 달라진 환경에 부응해야할 것이지만, 직조를 도외시하면서까지 조각의 확장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직조는 여전히 조각의 핵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 경쟁력 있는 경우, 대체 불가능한 경우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조에 대한 남다른 근성과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리고 여기에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마저 견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 신뢰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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