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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또 다른 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고충환

박영근/ 또 다른 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박영근의 회화는 스케일이 있다. 형식적으로도 그렇고 의미론적으로도 그렇다. 여기서 스케일은 단순히 실제 크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큰 그림이 많기도 하거니와 실제로는 작은 사이즈의 그림에서조차 스케일이 느껴진다. 대략 이미지의 병치와 패러디(작가는 이미지를 병치시킨다), 이미지와 의미의 전치(작가는 의미를 전치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극적인 상황의 연출과 스펙터클 효과(작가는 역사적 사실 혹은 일상적 현실을 극화시킨다)와 같은 형식논리며 회화적 문법이 스케일을 지지한다. 
특히 이미지의 병치에 대해서는 작가가 자신의 회화를 지지하는 주제의식으로 따로 명시할 만큼 각별하고,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거칠게는 상호간 유관하거나 무관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병치시켜 제3의 의미를 꾀하거나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그 자체 화용론에 연동된다. 즉 사물(말과 글)의 의미는 사물(말과 글)의 본질이 아니다. 사물(말과 글)의 의미는 상황논리(말과 글이 실제로 발화되는 지점)에 연동된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상황이 의미를 낳고, 의미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은 그렇게 의미가 발생되고 결정되는 상황을 제시하는 기술일 수 있다. 의미를 전제로 한, 배열과 배치에 대한 형식실험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텍스트, 고전과 현대의 병치로 하여금 처음의 의미가 다른 의미로 변질되게 만드는, 하나의 의미가 또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게 만드는, 의미에 의미가 연쇄되게 만드는, 그런 가변적인 의미며 열린 의미에 대한 형식실험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의미론적인 형식실험의 장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 형식실험의 장에서 감지되는 스케일은 거대담론에 걸맞다. 드라마로 치자면 소소한 가족드라마나 멜로드라마보다는 역사대하드라마(한국 회화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면 이쾌대 정도? 그리고 좀 엉뚱하지만 역사대하드라마를 배경으로 신화와 역사 속 영웅들을 재소환 한 인터넷상의 게임들?)에 어울린다. 단순히 거대담론을 재소환 하기보다는 재사용하는데, 작가가 거대담론을 대하는 태도며 방식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다. 여기서 거대담론을 재소환 하는 것과 재사용하는 것은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재소환이 유령(이를테면 역사와 정치, 신화와 이데올로기 같은 거대담론)의 회귀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면, 재사용은 그렇게 소환된 유령으로부터 파생되는 의미의 분출과 분별하고 무분별한 의미들의 네트워크 쪽에 무게중심이 실린다. 유령을 의미를 위한 소재며 서사를 위한 재료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유령을 숙주 삼아 유령에 기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령은 본래 의미를 벗고 다른 의미를 덧입는다. 그렇게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의미는 가변적이고, 그 의미화의 과정은 끝이 없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고전과 상징, 신화와 역사와 같은 유령들을 숙주 삼아 죽은 의미들을 되살려내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의미놀이를 노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병치 못지않게 스케일에 복무하는 또 다른 경우가 기법이다. 기법 자체는 모더니즘의 형식논리(새로운 방법론의 제시에 견인된 아방가르드)의 유산이지만, 작가에게 기법은 각별한 면이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그라인더로 그림을 그린다. 그라인더로 그림을 그린다? 먼저 캔버스에 물감(대개는 흰색)으로 살을 올린 후, 사실적으로 그림(대개는 어두운 톤)을 그린다. 그리고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그라인더로 그림을 덧그리는데, 그린다기보다는 지운다. 지우면서 그린다. 지우기와 그리기의 경계가 넘나들어지고 허물어진다. 형태가 뭉개지면서 오롯해진다. 흩어지면서 집중된다. 지우개소묘를 생각하면 되겠다. 묘화재료로서의 지우개가 그리고 붓이 연장되고 대체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그라인더와 붓은 다르다. 붓은 그리고, 그라인더는 지운다. 붓은 온전히 통제할 수 있지만, 그라인더는 그렇지 못하다. 붓은 필연을 그리고, 그라인더는 우연을 그린다. 붓의 궤적은 작고, 그라인더가 그리는 궤적은 크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선 붓의 생리와 그라인더의 생리가 어우러지기도 하고 부닥치기도 한다. 서로 돕기도 하고 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동안 관념적인 수사로만 형용되던 호흡처럼 들숨과 날숨이 상호작용하는 긴박한 화면이 만들어진다. 이 모든 일들은 순식간에 일어나야 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순간(생기?)을 붙잡기 위해서다. 실제로도 큰 그림이든 작은 그림이든 대개는 한 시간 내에 끝난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의 일필휘지(부지불식간에 그리기)와 기운생동(생생하게 그리기)을 닮았다. 여기에 작가는 그리고 싶은 대상을 인터넷 리서치를 통해 수백 수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입력한 후, 가장 강하게 남은 인상의 이미지를 순전한 기억으로만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린다. 전통적인 사의(관념을 그리기)를 닮았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전통적인 그림을 닮았다. 전통을 숙주 삼아 전통을 자기화하고, 전통을 확장시키고, 전통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또 다른 나>를 주제로 그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원작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것인데, 화면 중앙에 앉은 예수가 빵을 자신의 몸에 그리고 포도주를 자신의 피에 빗대어 표현한 성찬식전,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하는 긴박한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이 극적 순간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와 열두제자 모두를 자신으로 대체시켜 그렸다. 순간적으로 제자들이 보인(그리고 보였을법한) 반응 그대로 극화시켜 낱낱의 화면에 그린 후 병치시켜 그린 그림이다. 각각 비굴한 나, 야비한 나, 인자한 나, 분노하는 나, 게으른 나, 당황하는 나, 놀라는 나, 그리고 폭력적인 나 등등. 그 모두가 나다. 이중인격이고 다중분열이다. 
나는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랭보). 나는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있는 하나의 목소리다(미하일 바흐친의 다성성). 나는 논리를 건너뛰고 차이를 뒤섞는 정신분열적 자아다(질 들뢰즈). 그러므로 어쩌면 주체란 막연하게 주체라고 부르는 습관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허명이다(다시, 질 들뢰즈). 그런 만큼 주체란 순전한 언어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자크 라캉). 내 속에 너무 많은 내가 살고 있다. 타자들이 살고 있다. 이중인격과 다중분열 그리고 이에 따른 자기소외는 어쩌면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인지도 모르고,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작가는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져야한다고 했다. 그 징후며 증상을 스스로 감내하고 앓아야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의 이 작업은 이처럼 후기구조주의의 주체에 대한 관념을 반영한다. 
그리고 자신을 극화하고 희화화한다.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에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읽히고,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것에서 자신을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적 대상으로서 내어준다. 더러 자화상에 천착한 화가들이 없지 않지만, 이처럼 자신(그리고 어쩌면 인간 일반)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래서 연민을 자아내는 경우로 치자면 패가망신한 이후 말년의 램브란트가 자신을 들여다 본 자화상 말고 다른 예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는 것에서 시니컬한 면모가 읽힌다.  
나아가 작가는 웃긴다기보다는 그래서 연민을 자아낸다기보다는 우스우면서도 짐짓 진지한 또 다른 의미심장한 자화상들을 그려놓고 있다. 물감을 먹고 있는, 끈을 먹고 있는, 캔버스 틀을 먹고 있는, 그리고 커트 칼을 먹고 있는 자화상들이다. 하나같이 그림도구들을 먹고 있는 자화상들이다. 아예 그림을 집어삼킬 수도 있겠다.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고 했다. 좋은 것을 먹는 사람, 나쁜 것을 먹는 사람, 선한 것을 먹는 사람, 악한 것을 먹는 사람이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 작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림을 먹는다. 그림이 내가 되고 내가 그림이 되는 경지며 차원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화가의 자화상을 그리고, 어쩌면 진정한 화가의 태도를 표상한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분열된 자기는 가족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는데, 풀을 먹고 있는 딸을 그렸다. 풀처럼 청초한, 딸에 대한 감정을 담았을 것이다. 
이외에 작가는 분열된 자기를 좀 더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그림들도 그렸다. 서로 반목하는 나, 서로 먼저 붙잡으려는 나, 서로 먼저 내달리는 나, 서로 먼저 가 닿으려는 나, 서로 제압하는 나를 그렸다.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어둔 거울 속엔 원래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인간에 대항한 벌로 거울 속에 숨어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보르헤스). 그리고 이후 힘을 키워 언제든 다시 거울의 표면 위로 나올 날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아마도 억압된 자기와 더불어 사는, 타자 화 된 자기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고 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거울 속에 내가 보이는가, 아니면 네(분열된 자기)가 보이는가. <또 다른 나>를 그린 작가의 그림은 저마다로 하여금 분열된 자기 곧 억압된 나, 낯 설은 나, 이질적인 나, 자기를 소외시키는 나와 대면하게 만든다. 다시, 마치 나르시스의 물거울처럼 어둔 화면 속에 내가 보이는가. 그리고 보인다면 그렇게 보이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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