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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자, 어쩜 삶이란 존재를 향한 그리움을 잉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충환

송혜자, 어쩜 삶이란 존재를 향한 그리움을 잉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가용으로 가면 한 시간 거리를 배 이상 걸려 버스를 타고 갔다. 돌 때 다 돌고 들를 때 다 들러서 가느라 늦었다. 효율성으로 치자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겠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꼭 효율성만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효율성이 놓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새마을호가 퇴역해 관광열차로 투입된다고 한다. 그보다 더 전으로 치자면 경춘선 완행열차를 타고 강촌이며 겨울 대성리를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발터 벤야민은 같은 거리를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 그리고 걸어서가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은 이동이 목적이어서 여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에 반해 걸어서 가는 것은 과정이 목적인만큼 진정한 여행일 수 있다. 몸을 사용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즐김과 향유가 있고, 타자(이를테면 자연 같은)와의 소통과 교감이 있다. 여행은 삶의 메타포다. 이동이 목적인 곳(것)에 삶은 없다. 과정이 목적인 곳(것)에 삶은 깃든다. 삶은 과정 자체가 이미 목적인 삶이고, 목적 없는 과정이다. 한때 느림의 미학 운운하던 적이 있었다. 삶에는 두 부류가 있다. 목적지향적인 삶과 과정 자체가 이미 목적인 삶이다. 이 가운데 느림의 미학은 과정 자체가 목적인 삶에 부합한다. 목적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삶이 아닌, 과정 자체가 의미인 삶에 부합한다. 
그렇게 하도 앉아있어서 몸을 각성시켜주는 느릿한 버스가 주는 교훈을 곱씹으며 작가의 작업실(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227)을 찾았다. 삼월초로 기억하는데 여전히 쌀쌀했고, 더욱이 산골마을은 여전히 동면중에 있었다. 작업실은 거주공간과 작업실 공간, 두 채로 구성돼 있었다. 거주시설과 작업실 할 것 없이 작가가 만든 도자기로 가득했다. 거주시설에는 주로 완성품이 그리고 작업실에는 과정 중인 작품들이 있었다. 주거시설보다 작업실이 고온으로 관리 유지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훈훈했다. 흙이 어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그저 작업의 효율성을 위한 것 이상의, 마치 함께하는 식솔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나는 추워도 견딜 만하지만 더군다나 말 못하는 식솔은 안 된다. 인간적인 도예라고나 할까. 그런 심성이라고나 할까. 작업실에서 소성을 기다리고 있는 도자기들에는 작가의 그런 심성이 묻어났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닮고, 자기가 만지는 물질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함께하다보면 어느새 나와 물질이, 주와 객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치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물아일체와 주객합일 자체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기보다는 가 닿아야하고 성취해야할 경지이기도 한 것이어서 그저 시간을 투사하고 세월을 투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서로 허물없는 소통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진정한 교감의 세월이 있어야 한다. 이런 소통과 교감이 없다면 그 시간과 세월은 그저 힘든 노동일 수밖에 없고, 희한하게도 아니면 당연하게도 그 힘듦은 도자기(그리고 다른 장르와 경우에도)에 그대로 남아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의 도자기는 그렇지 않은 걸로 보아 아마도 그동안 흙과의 진정한 소통과 교감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도자기는 화장기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 같고, 격이 없어서 편안한 심성을 보는 것 같다. 그 살색이며 마음을 보고 있노라면 흙의 성정은 닮을 만하고 또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도자기는 화장기 없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 같고, 격이 없어서 편안한 심성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장식이 없는, 군더더기가 없는, 꼭 필요한 장식만 있는, 장식 같지 않은 장식만 있는 도자기다. 형식이 없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도자기다. 장식도 없고 형식도 없다? 도자기로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장식만 있고 형식만 있다? 도자기 자체가 어차피 장식이고 형식이다. 장식이 없으면 도자기도 없다. 형식이 없으면 조형도 없다. 그런 최소한의 장식이 있고 형식이 있을 뿐이다. 그게 뭔가. 기능주의다. 가장 기능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기능에 연유한 장식이며 형식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장식, 특히나 불필요한 장식은 죄악이라고 했다. 부르주아의 과시욕에 부합하는, 그 계급의식(사물계급론)에 복무하는 부수물이라고 했다. 
눈치 챘겠지만, 작가는 도자기 중에서도 분청을 빗는다. 청자와 백자 그리고 분청을 통 털어서 가장 덜 장식적이고 덜 형식적인 경우다. 청자는 귀족적인 화려함에 부합하는 장식미가 있다. 백자에는 문인사대부적인 수수함과 담백함이 있다. 이에 비해 분청에는 민중적인 소박함과 편안함이 있다. 사물계급론으로 치자면 가장 민중적인 도자기다. 그래서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사람은 이런 민중적인 도자기(막사발)를 민예라고 불렀다. 민중의 삶에 스며든 예술, 민중의 삶의 애환이 배어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비애의 미가 느껴진다고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분청보다는 백자를 두고 하는 말인 것도 같다. 이런 야나기 무네요시보다는 차라리 민담 곧 민간에서 전긍되는 이야기에는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된다고 본 미하일 바흐친의 경우가 분청의 생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있을 것 같다. 분청은 말하자면 도자기 중에서도 특히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민중의 삶의 서사가 오롯한 자기표현을 얻는 장이다. 
문인사대부에 산수화가 있다면, 민중에게는 민화가 있다. 그리고 도자기의 경우에는 백자와 분청이 서로 비교된다. 분청에서 가장 민중적인 그림과 그릇이 하나로 만난다. 막사발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막 만든 그릇이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만든 그릇이다. 자유정신을 구현한 그릇이고, 자유감각을 실현한 그릇이다. 기교를 넘어선 그릇이고, 형식을 초월한 그릇이다. 현대적인 안목으로 볼 때 산수화보다는 민화가 더 현대적으로 와 닿듯 분청도 그렇다. 표현주의로 불러도 될 만큼 표현력이 강하다. 표현력이 강하다? 자기가 강하다는 말이다. 장식에 그리고 형식에 구애 받지 않아도 되는 만큼 자기가 강하다. 마치 개성이 강한 그림처럼 회화적 아이덴티티가 강하다. 자기가 강하다는 말은 천성이 강하다는 말이고, 자연이 강하다는 말이다. 자기를 반 무의식적인 상태로 자연의 본성에 내어준다는 말이다. 일정한 자기방기를 수행한다는 말이고, 능동적인 자기방기를 실천한다는 말이다. 소박하고 수더분하면서도 적당히 거칠고 자기표현이 강한 것이 영락없이 천성을 닮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작가는 이처럼 화장기 없이 아름다운, 격이 없어서 편안한 그릇을 만든다. 항아리와 병을 만들고, 찻잔과 주전자를 만든다. 접시와 소반을 만든다. 이런 도자기들은 대개 기능에 방점이 찍히는 것인 만큼 그릇 본연의 형태에 충실한 편이다. 그 그릇들 가운데 알만한 구상적 형태로 이목을 끄는 것이 각 오리와 물고기를 소재로 한 도자기다. 연천은 북한이 지척인 만큼 실향민이 많다. 작가도 실향민이다. 오리와 물고기는 사람이 그어놓은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과 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유영혼을 표상하고, 그 표상에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염을 담았다. 한편으로 이런 도자기와 함께 주목되는 것이 조각보다. 형형색색의 자투리 천을 이어 붙여 하나의 우주를 만들었다. 여성성의 우주를 만들었다(자수는 전통적으로 규방문화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을 담기위해 그릇을 만들었고, 생활 속의 우주(소우주?)를 생성시키기 위해 조각보를 만들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실에는 누군가에게 소소한 기쁨을 주고 마음의 위로를 주는 자연이 담긴, 자연을 닮은 그릇들(작가노트)이 잉태되고 있었다. 질감을 입고 색깔을 덧입은, 존재를 향한 그리움이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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