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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 한글에서, 풍경과 추상 사이

고충환

금보성/ 한글에서, 풍경과 추상 사이 


현대미술의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개념미술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개념미술을 계기로 이후 현대미술의 특정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개념미술 이후 예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재현과 표현으로서보다는 개념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었다. 사진과 영상, 각종 기록물과 고문서를 아우르는 아카이브가 전시의 전면에 나서게 된 저간의 달라진 환경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형식적 특징이나 장르적 특수성을 도외시한다면, 이 모두는 텍스트들이다. 사진도 텍스트고 영상도 텍스트다. 기록물도 텍스트고 고문서도 텍스트다. 결국 전시공학적인 측면에서 본 아카이브나, 전시의 한 방법론으로서의 아카이브 전시는 다름 아닌 텍스트를 전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의 최소단위원소는 말이고 글이다. 말과 글을 각각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기록물과 고문서의 형식을 빌려 등록한 것이다. 다시, 이런 말과 글의 씨앗이 문자다. 그렇게 현대미술에서 문자는 더 이상 낯설지가 않게 되었고, 텍스트는 다반사가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문자든 텍스트든 예술이라는 개념을 매개하는 경우가 많지, 그 자체를 조형적인 한 요소로서 이해하고 접근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는 사실이다. 미술사에서도 보면 일부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적 자동기술법을 형식실험하기 위해 동양의 켈리그래프를 차용한 적이 있고, 보다 최근의 경우로 치자면 로버트 인디애나가 영어 알파벳을 이용해 만든 조형물 <LOVE>나, 낡은 입간판에서 떼어낸 영어 알파벳을 조형물로 재구성한 잭 피어슨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후 문자를 조형하는 일은 타이포그래피를 영역으로 하는 디자인 베이스에서 상당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진척시켜온 것에 비해, 순수조형예술 파트에서는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 되었다. 
금보성은 시종 한글조형작업에 천착해왔다. 물론 작가가 유일한 경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순수조형예술의 관점에서 한글을 차용하고 변주한, 그것도 일관되게 전개해온 것은 드문 일이고 귀한 일이다. 작가는 조형예술과 함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그동안 말과 글의 함축적인 의미와 논리를 넘어서는 비약과 같은 시어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온 세월이 있었을 것이고, 그 문학적 성취며 연륜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작가는 한글의 자모(자음과 모음)를 이용해 알만한 구상적인 형태로 재구성해내는 방식으로부터 시작했다. 무슨 퍼즐 맞추기라도 하듯 자모가 조합되면서 얼굴이나, 도자기와 같은 정물 형상으로 재구성된다. 재현된 이미지란 결국 최소단위원소(모나드)의 조합에 의한 것이다. 보통 회화에서라면 터치가, 그리고 점묘파에서는 점 하나하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쇄매체에서라면 망점이, 그리고 디지털 매체 이후에는 픽셀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가의 경우에는 자모가 픽셀이다. 자모가 픽셀처럼 조합되는 여하에 따라서 형태가 구축되고 해체된다. 중요한 건 자모가 재현된 이미지의 최소단위원소로서 제시되고 있는 점이다. 재현된 이미지를 의미 부여된 대상, 의미가 만들어낸 대상, 의미의 대상(의미론적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며, 이때 자모는 의미소(의미의 최소단위원소)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곧 익명의 대상에 의미를 부여해 특정화한다는 것이며, 무분별한 대상에 의미를 부여해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자모가 픽셀처럼 의미기능하고 있는 이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리고 이후 자모는 점차 형상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 자족적인 화면 속 모나드로 작용하면서 덩달아 그림은 추상화된다. 특히 기하학적인 추상을 연상시키는 형식상의 변주를 보여주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자모 자체의 꼴이 기하학적 형태에 가깝다. 이런 기하학적 꼴이 여백이 있는 풍경(관념적인 풍경? 개념적인 풍경?)을 연출하는가 하면, 꼴과 꼴이 중첩되고 포개진 형태가 건축물을 연상시키고 집들이 있는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건축물도 집도 하나같이 기하학적인 꼴의 조합이라는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는 탓에 가능한 일이다. 자모가 기하학적 형태의 꼴을 가지고 있고, 그 꼴을 건축물 또한 공유하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의 인식은 이후 작가의 작업이 건축물과 연계되는 형식으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아직은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이후 평면을 벗어나 조각입체설치로 확장되고 변주된다. 이런 입체작품으로 변화되면서 자모의 쓰임새도 사뭇 달라지는데, 사람 이름이 자모를 대신 혹은 대체한 것이다. 자모의 연장으로 볼 수 있겠고, 익명적인 상태의 자모가 사회적인 관습과 만나면서 구체적인 실체를 얻은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사람에게 이름은 그의 인격과도 같고, 존재증명과도 같고, 지문과도 같다. 사람들의 이름을 소재로 한 일련의 조형물 작업에서 작가는 이처럼 이름으로 대변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관습을, 그리고 어쩌면 욕망(속된 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을 주제화한다. 
그리고 작가는 한글자모 ㅅ(시옷)에 착상해 방파제 시멘트 구조물 테트라포드를 차용하고 각색한다. 아마도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문자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사람 인(人)자와의 유사성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관계의 미학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그렇고, 형식상으로 보면 거대한 풍선 형태의 조형물이 일종의 공기조각으로 범주화하게 만든다. 그 자체 전통적인 조각의 본질이랄 수 있는 매스(양감)를 결여한 것이란 점에서 비 혹은 탈조각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비조각이든 탈조각이든 조각을 전제한 것이란 점에서 조각을 확장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한글자모를 소재로 하여 각각 구상적 평면과 추상적 평면, 조각과 탈조각, 그리고 아직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만 건축물과 연동되는 형태와 경우로서 확장되고 심화된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재차 회화로 되돌아온다. 평면과 입체,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한글자모가 전개되고 변주되는 가능성의 지평을 탐색하는데, 이번에는 다시 회화다. 
그런데, 근작에서의 회화는 전작에서의 회화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다르다? 시종 한글자모를 토대로 그 조형 가능성을 탐구해온 작가의 전력이 아니라면, 이 그림은 그저 순수추상처럼 보인다. 평면성이 두드러져 보이고, 때로 캔버스 자체의 바탕면이 처음상태 그대로 노출되거나 남겨진다. 그 위에 얹히는 모티브도 추상적인데, 크고 작은 색면과 색면이 어우러져 기하학적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색면구성 혹은 색면추상으로 범주화할 만한 경향성의 회화를 열어놓는다. 절제된 색채감정으로 인해 단색화의 경향이 강조돼 보이고, 심플한 화면구성으로 미니멀리즘의 경향이 감지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회화적 모더니티를 실험(그리고 실현)하고 있는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회화적 모더니티란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알려진 경우로서, 회화로 하여금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당위성을 회화의 본질에서 찾는다. 회화의 본질? 회화를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보다는, 순수한 형식요소며 형식논리에 한정된 경우로 보는 것이다. 평면성을 강조한 것이나 캔버스 고유의 물성을 전면화한 것, 그리고 여기에 절제된 색채감정과 최소한의 면 구성이 그렇다. 
그렇다면 다시, 작가는 순수추상을 그리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한글자모에 대한 지난한 탐색과정에 종지부를 찍고, 이후 자모와는 무관한 회화, 또 다른 회화를 예비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근작은 전작에서 어느 정도 예비 되고 있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자모가 서로 어우러지면 건물이 있는 풍경, 집이 있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기하학적 형태의 유사성(닮은꼴)이 풍경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전작에서 상당할 정도로 암시되고 있던 풍경을 최소한의 색면구성으로 한정하고 환원한 것이며, 추상화하고 양식화한 것이다. 풍경의 일루전이 추상화면의 뒤편으로 물러난 것이며, 보다 잠재적인 형태와 경우로서 예시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한글자모를 매개로 풍경과 추상, 일루전과 추상, 재현과 추상의 경계 위에 있다. 여차하면 추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근작에 대해서 한글자모와는 상관없는 순수추상이어도 무방하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회화적 특정성은 한글자모에 있고, 한글자모야말로 작가의 회화의 뿌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작에서의 추상화면 역시 다름 아닌 한글자모를 변주하고 전개해온 형식실험의 연장선에서 다다른 지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한글은 그리고 한글자모는 무슨 의미(그리고 의의)가 있는가.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워낙 자유영혼을 추구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작가를 특정소재(한글자모의 변주와 심화와 확장)에 한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근작에서 작가는 한글자모여도 좋고 아니어도 무방한, 그리고 그렇게 한글자모로부터 자유로운 지경에 이른 것 같다. 한글자모에 대한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지점일 것이다. 향후 작가가 열어놓게 될, 또 다른 지평이 기대된다. 한글 안에서 그리고 한글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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