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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표/ 잊힌 자기를 위하여, 참마음을 위하여

고충환

김준표/ 잊힌 자기를 위하여, 참마음을 위하여 


선악, 부다(부처)를 깨다. 작가 김준표가 자신의 근작에 붙인 주제다. 선악의 문제가 큰 주제라면, 부다(부처)를 깨는 것이 작은 주제다. 선악의 문제라는 큰 틀을 베이스 삼아 그때그때 상황논리를 봐가며 소주제를 변주하는 형식으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선악도 부처를 깨는 것도 하나같이 존재론적인 문제에 속한다. 특히 부처를 깨는 것은 부처를 깨트려 부수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에 마음속에 잠자는 부처를 일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양가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큰 주제(선악의 문제)도 작은 주제(부처를 깨는 것)도 하나같이 거대담론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시대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다.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시대다. 피상적인 시대다. 파사드 담론이 부상하는 것이 그렇고, 이미지정치학이 부각되는 것이 그렇다. 여기서 파사드란 구조와 상관없이 표면으로 덧댄 건물전면장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미지정치학은 가상이 실재를 대체하고 이미지가 현실을 대신한 시대감정을 반영한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실재에 그리고 현실에 관심이나 있는가. 더군다나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와 같은 존재론적인 문제에 관심이나 있는가. 그저 이미지면 족할 뿐이다. 겉보기에 문제가 없으면 실제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처럼 이면이 없는 시대, 표면이 이면 노릇을 하는 시대에 제안된 거대담론이어서 새삼스럽고 반갑고 그 만큼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선악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원래 선한 본성을 타고 났지만 환경이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다. 성선설이고 환경결정론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원래 악한 본성을 타고 났지만, 교육을 통해 그 천성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성악설이고 계몽주의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환경결정론도 계몽주의도 모두 결정론의 바운더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특정의 가치로 개념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셀 푸코는 선악의 문제를 제도의 관성에서 찾는다. 누가 무엇을 정상성(선)으로 아님 비정상성(악)으로 규정하는가. 바로 제도가 그렇게 하고 대중적인 선이 그렇게 한다(대중적인 것이 곧 선이다). 이처럼 선악의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이고 제도적인 문제이다. 
여기에 불교는 처음부터 선도 없고 악도 없다고 한다. 선도 악도 모두 마음(거울)이 불러일으킨 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선한 마음이 선을 불러일으키고, 악한 마음이 악을 불러온다. 당신의 마음거울은 선을 비추는가, 아님 사악한 것을 보고 싶은가(마음은 곧 욕망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마음(거울)이 없으면 상도 없다. 
다시, 그러므로 부처를 부처로 일컫는 것도 모두 마음속 일이다. 당신이 보기에 부처는 부처로 보이는가, 아님 다만 부처처럼 생긴 석고덩어리로 보이는가. 부처가 부처님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부처님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밀 것이고, 아님 한갓 석고덩어리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벽에 대고 힘껏 던져 부처를 깨부술 일이다. 이도저도 아닌 경우라면, 이를테면 부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경우라면(모든 존재 자체가 이미 부처다) 이를 계기로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잠자는(잠재적인) 부처를 일깨울 일이다. 작가가 제안해놓고 있는 주제는 바로 그런,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잠자는 부처를 일깨워 선악의 문제에 눈뜨게 만든다(기독교 창세신화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유혹해 원죄의식을 내재화한 사건에 등장하는 과실이 선악과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삼천불을 만들었다. 10년이 걸렸다. 과거세 천불, 현세 천불, 그리고 미래세 천불, 도합 삼천불이다. 삼천 배는 그렇게 삼천 부처님마다에게 한번 씩 절하는 것을 말한다. 석고 캐스팅으로 부처님 초상(소 불두) 삼천 개를 떠냈는데, 하나의 모본으로부터 유래한 것인 만큼 얼핏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저마다 약간씩 다르다. 차이를 내포한 반복, 보다 적극적으론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10년 걸려 부처를 만들면서 결국 자신의 삶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이는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자기 마음속에 잠자던 부처를 일깨운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다름 아닌 부처였음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부처를 만든 시간은 사실은 오히려 자신이 오롯해지고 투명해지는 시간이었다. 불교에서의 진아(진정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실체, 나의 실재)에 한 발짝 다가서는 시간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이다. 부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종래에는 자기가 자기를 빗어 만들고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삼천불을 각각 조각으로, 설치로, 사진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다변화했다. 특히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그 자체 우주를 표상하는 만다라 형태를 따라 삼천불을 배열하기도 하고, 무작위로 쌓기도 하고, 캔버스에 부착하기도 하고, 직접 제작한 선반과 같은 가구에 불두를 배치하거나 한다. 설치작업에선 공간연출이 관건이다. 다양한 연출방식을 통해 작업의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한편, 하나의 기호로서의 부처가 읽힐 수 있는 열린 문맥이며 가변적인 상황논리를 예시한 것이다. 불두에는 색깔을 칠해 형형색색의 부처님이 되게 했다. 세속적인 부처를 상징하고, 각양각색의 사람(인성)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마다 자기 내면의 가변적인 부처님을 표상한다(하나의 목소리 속에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섞여 있다는 미하일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과도 통하는). 
특히 주목할 부분이 부처를 깬다는 소주제에도 부합하는 퍼포먼스를 마련한 것이다. 벽면에 설치된 나무 문짝을 향해 힘껏 불두를 던지는 것인데, 문짝에 부딪쳐 불두가 깨어져도 좋고, 또한 그러라고 만든 퍼포먼스다. 대개는 깨어지지 않은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벽면에 떠 있는 나무문짝 탓에 그 부딪치는 소리가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그 경험이 부처를 깬다는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부처는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관념을 깨기 위해, 그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처를 던진다. 자기는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자기라는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요량으로 자기(자기라는 관념)를 내던져 깨부순다(질 들뢰즈는 주체란 막연하게 주체라고 부르는 습관이며 허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부처를 던지고 자기를 내던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란다. 놀라면서 깨닫는다. 바로 저마다 자기 내면에 잠자고 있던 부처를 일깨우는 것이다. 자기가 이미 부처였음을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관객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되는 상호작용 퍼포먼스를 통해 사람들 저마다 이미 부처였다는 깨달음을 준다. 작가는 우리의 가슴 속 잊힌 참마음(잠자는 부처)을 되새겨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일련의 흥미로운 그림들을 예시해준다. 판 시리즈, 콜라보페인팅 시리즈, 그리고 공 시리즈다. 그 중 합판 위에 그림을 그린 판 시리즈는 한눈에도 드로잉이 강해 보이고, 추상표현주의와 액션페인팅과의 상호영향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반 무의식 상태에서 그린 그림 같고, 몸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 같고,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 같다. 그만큼 몸의 직접성이 강하고, 감각적이다. 일종의 몸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액션페인팅을 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김덕수의 사물놀이패 소리를 들으면서 이 그림들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이 무아지경에 그려진 것임을, 몰아 상태에서 그려진 것임을 암시한다. 무아? 몰아? 자기를 잊는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자기를 잊고 싶어서 그린 그림들이라고 한다. 작가가 가장 어려운 한때를 보냈던 뉴욕시절에 그린 그림이고, 실제로도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는 어려운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자기마저 잊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쾌감이 찾아왔다고 한다. 카타르시스다. 정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존재이유를 바로 이런 카타르시스에서 찾는다. 자기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자기가 순화되는 느낌이다. 바로 자기가 지워지는 지점(무아며 몰아 상태)에서 비로소 자기가 충만 되는 순간이고 느낌이다. 
자기가 지워질 때 비로소 자기가 충만 된다? 무아지경에서 오히려 자기가 오롯해진다? 모순이다. 이런 모순을 다루고 있는 것이 공 시리즈다. 검은 화면에 검은 원을 그린 그림이다. 빛에 미묘하게 반응하는 탓에 겨우 구별돼 보이지만, 사실은 바탕화면도 모티브도 따로 없는, 최소한 구분되지 않는, 그저 검은 화면의 그림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다만 검은 젯소 하나만으로 그렸다. 검은 화면에 미세하게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검은 원을 반복해서 그렸다. 작가는 이처럼 그 실체가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심지어는 바탕화면과 일체를 이룬 원으로 봐도 무방할 그림들을 왜 그렸을까. 바로 무위는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고, 무위의 위를 말하기 위함이다. 의식은 없고 오로지 행위의 흔적만이 오롯한(자기가 지워져 최소한의 흔적으로만 남은) 이 침묵의 회화(판시리즈가 뱉어낸다면, 공시리즈는 흡수한다)가 말레비치의 절대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검은 화면에 검은 사각형을, 하얀 화면에 하얀 사각형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절대란 회화가 더 이상 후퇴(양보)할 수 없는 최종적인 배수진을 말한다. 흔히 알려진 대로 그 배수진이 회화의 본질일까. 말레비치는 당시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사상에 심취해있었다. 혹 그 배수진은 어떤 신적 대상이며 차원(지금으로 말하자면 영성주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혹 존재의 궁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공 시리즈 그림은 바로 이런 존재의 궁극을, 신영성주의를 떠올리게 만들고, 침묵의 언어를 되새기게 만든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판 시리즈 그림과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일련의 콜라보페인팅이 특히 오리지널리티와 관련해 또 다른 가능성(집단개성?)을 열어놓는다. 이외에도 작가는 사진, 조각, 설치, 영상, 그리고 페인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선악의 문제, 존재의 문제, 원형의 문제와 같은 거대담론을 주제화한다. 참마음의 문제를 주제화한다. 그 문제의식이 잊힌 자기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저마다 자기 내면에 잠자던 부처를 일깨워준다. 진아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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