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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막신 마시요브스키/ 극장으로서의 얼굴, 초상, 표정, 상황

고충환

앤디 워홀, 막신 마시요브스키/ 극장으로서의 얼굴, 초상, 표정, 상황 
 

대통령도 마시고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도 마시는 콜라가 나는 좋다, 고 앤디 워홀은 말했다. 워홀은 팝의 황제고 콜라는 팝의 아이콘이다. 대량생산된 상품에서 팝의 전형을 읽어내는데, 인물 역시 예외적일 수가 없다. 폴라로이드와 실크스크린프린트 그리고 공장(워홀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부르는). 작가로 하여금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어주는 도구들이다. 가치와 감각의 무차별화와 대량 복제된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의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그 메커니즘과 이해관계 속에서 사람은 상품이 된다. 마치 상품처럼 진열되고 브로마이드 사진처럼 전시된다. 폴라로이드이미지를 실크스크린프린트로 전환한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은 이처럼 상품화된 인격, 대량 복제된 인격, 민주화를 실현한 인격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제이슨함갤러리)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낸 골딘의 사진이 이런 폴라로이드이미지의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폴라로이드이미지를 매개로 워홀이 상품화된 인격을 보여준다면, 골딘의 폴라로이드사진 속 인물들은 특정 커뮤니티를 사는 사람들의 초상과 현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여기서 현실 그대로는 중요한데,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연출된 현실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골딘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메이플소프의 사진 속 인물들은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미학화를 예시해준다. 현실의 미학화를 통해 욕망의 지정학적 장소를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함으로써 동성애 코드를 재고하게 만들고, 욕망의 용법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미국에 워홀이 있다면, 일본에는 요시토모 나라가 있다. 물론 무라카미 다카시가 있지만, 나라는 다카시와는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재팬팝 혹은 마이크로팝의 2세대 주자로 알려진 나라의 그림은 그림에 등장하는 귀여운 악동 이미지로 유명하다. 악동이지만 귀엽고, 악동이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바로 현실을 사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의 모습? 우리 모두의 모습? 전형이다. 캐릭터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전형을 창조라고 했다. 현실의 전형적인 모습(적나라한 현실 혹은 현실 그대로의 현실)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을 매개로 추상되어져야 한다. 이처럼 나라의 상상력을 매개로 추상된 그림 속 전형(그리고 캐릭터)은 이중적인, 다중적인, 분열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삶을 사는, 욕망과 억압이 충돌하는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일상을 사는. 만화와 팬시를 결합해 만든 그림 속 캐릭터가 나라 특유의 서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외에도 전시된 그림들은 우울한, 내성적인, 때로 그로테스크한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인 인간(미카엘 보먼스), 희화화된 인간(페르난도 보테로), 그리고 마치 지금 막 전설 속에서 귀환하거나 소환된 것 같은 이국적인 낯설음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천경자)와 같은, 때로 현실을 사는 그리고 더러는 비현실을 꿈꾸는 사람들의 초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 스펙트럼의 끝에 피에르 휘게의 사물인격체가 있다. 사물에 감정이입하던 수준을 넘어, 이제 초상은 아예 사물이 되었고 오브제가 되었다. 스피커 같이 생긴, 차가운 금속성의 기계적인 구멍들 사이로 발광하는 따뜻한 빛의 패턴이 되었다. 닮은꼴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차갑고 따뜻한 감성의 질감으로만 남았다. 감성적인 기계를 예시해주고, 물화되고 물신화된 인격의 극단적인 형태와 경우를 예시해준다. 차갑고 따뜻한, 모던하고 세련된,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그리고 무표정한 사물초상을 예시해준다. 사물에 감정이입하다가 아예 사물이 된, 상품을 모방하다가 스스로 상품이 된 현대인의 초상을 예시해주고, 사람 간 소통이 단절된 이후 사물과 소통하는, 감정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 기계와 소통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예시해준다. 
또 다른 전시(갤러리바톤)에서 이런 현대인의 초상이 현대인의 일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전력을 가진 폴란드 출신 화가 막신 마시요브스키의 회화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필두로 한 동유럽 출신화가들의 회화 경향을, 라이프치히화파와 신표현주의 이후 회화 경향을 대변해준다. 같은 경향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치자면 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에 주체를 매개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 숨은 의미를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피상적인 현실을 넘어 진정한 현실을 발굴하는 정도와 경우가 덜하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현저하게 일상적이다. 현실을 닮았다. 그래서 친근함을 준다. 아마도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전력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인 현실을 유지하면서 피상적인 현실을 넘어 그 숨은 의미며 진정한 현실을 캐내는 것에 작가의 특이성이 있다.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닮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현실 그대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현실을 매개하고 간섭하는가. 작가는 현실의 어떤 모습에 관심이 있는가. 작가는 현실이 있는 그대로 제시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현실은 재구성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을 재구성하는가. 미디어가 현실을 재구성한다고 본다. 미디어가 제공해준 현실, 미디어가 가공한 현실을 사람들이 현실인식으로서 받아들인다고 본다. 미디어를 소통을 중재하는 매개체로서 정의할 수 있다면, 어쩜 미디어가 보편화된 현실에서 사람들의 현실인식이 영향을 받고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미디어가 현실을 어떻게 가공하는지, 나아가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이미지정치학과도 연동되는 문제다. 중요한 건 현실이 아닌 현실인식이다. 사람들은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다. 결정적인 건 현실을 대체한 이미지, 현실의 이미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가 겨냥한 지점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의 눈을 통해 본 세상에 관심이 많다. 작가의 그림에는 두세 사람이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미술관을 순례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에 캡션이 들어오고, 문자 텍스트가 들어오고, 말풍선이 들어온다. 캡션과 문자텍스트 그리고 말풍선은 미디어가 현실을 가공하는 전형 곧 코드에 해당하고, 동시대의 소통을 매개시켜주는 소통채널에 해당한다. 미학으로 치자면 패러다임(토마스 쿤)이며 에피스테메(미셀 푸코)에 해당한다. 동시대의 지식체계를 의미하고, 동시대에 지식이 가공되고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 지식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에 대해 담소한다는 것은 그 제도적 행위를 받아들이고 문화적 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저런 그림들이 화소 높은 도판으로 프린트되고, 세세한 캡션이 부가되고, 아카이빙 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두고두고 기념할 만한 마스터피스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그렇게 가공된 현실이며 인공적인 지식으로 축조된 현실을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잘 모르는 그림 앞에선 짐짓 무심한 척 무표정한 척 해야 하고, 손에는 포도주 잔 하나 정도 들려 있어야 하는,  그리고 그렇게 때론 의심스런 문화를 향유하는 현대인의 의심스런 일상을 그린다. 그처럼 의심스런 일상을 모던하고 세련된, 감각적인 생략을 통해 주제를 부각하는, 그림과 문자 텍스트가 어우러져 중의적 의미를 암시하는 작가만의 회화적 스타일로 풀어낸다. 
화가들이 처음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아마도 인물은 가장 많이 그려진 소재일 것이다. 소재의 빈곤이나 고갈을 염려할 만도 한데, 이런 염려를 불식하기라도 하듯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인물은 그려지고 또 그려질 것이다. 인간존재 자체가 변화무상한 존재이고 다중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념적인 동물이고, 정치적인 동물이고, 경제적인 동물이고, 문화적인 동물이고, 환경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 일체, 말하자면 이념과 정치와 경제와 문화 환경에 긴밀하게 연동된 삶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주체를 의미하는 페르소나와 실존적 자아를 의미하는 아이덴티티 그리고 불교적 주체를 의미하는 진아의 의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한, 소통과 불통, 내면과 외면,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억압,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가 매번 유동적이고 가변적이고 재정의 되는 한 사람의 얼굴에서 캐내고 발굴할 수 있는 의미는 고갈되지가 않을 것이다. 공공연한 재현 이후 회화(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논의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유령은 여전히 인간을, 얼굴을,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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