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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김연식/ 불립문자, 진정한 소통과 현실을 반영하는

고충환

정산 김연식/ 불립문자, 진정한 소통과 현실을 반영하는 


불립문자.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다.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 것도 문자를 앞세우는 것도 소통하기 위해서다. 문자를 앞세워 소통하고 문자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소통한다. 문자를 앞세워 소통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문자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문자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어떻게 소통할 것이며, 이때의 소통은 무슨 의미인가. 
이심전심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데 말이 필요 없고 글도 필요 없다. 말과 글은 그 의미가 경계 지워져 있어서 한정적이다. 그 한계가 문제다. 이처럼 전제된 한계로 인해 말은 때로 상처를 입히고, 글은 곧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말과 글의 쓰임새가 더 정교해지고 더 복잡해지면서, 더욱이 저마다 그 긋는 경계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게 되면서 더 많은 곡해를 불러온다. 이에 비해 마음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으니 상처 줄 일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도 없다. 다만 통하는(혹은 동하는) 마음과 통하지 않는(혹은 동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읽는다는 것, 마음으로 의미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이때의 이해는 받아들인다(그리고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마음을 매개로 한 이해는 수용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 속에 타자에 대한 수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당연히 상처 줄 일이 없는 것이다. 
정산 김연식은 근작에서 이런 불립문자를 주제화한다. 다시, 문자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자를 앞세우든 앞세우지 않든 그 의미는 문자를 전제로 한다. 애초에 문자가 없었다면 앞세우지 않을 문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문자를 매개로 한 소통이 없었다면 문자를 빌리지 않은 소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립문자는 결국 문자를 빌린 소통방식을 문제시한 것이며, 그 대안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문자를 빌리지 않은 소통방식에는 무엇이 있는가. 마음이 있고 침묵이 있다. 암시가 있고 시가 있다. 그리고 예술이 있다. 분명 예술도 언어의 한 형식이지만, 열린 언어, 비일상 언어(그리고 비정상 언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언어와는 그 존재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열린 의미를 담을 수 있고, 일상 언어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담을 수가 있다. 아마도 작가가 작업에 천착하는 이유이며, 예술에서 돌파구를 찾는(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열반과 해탈의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보기에 따라선 그동안 예술의 이름으로 작가가 수행해온 행보 모두가 어쩜 이런 불립문자가 변주되는 형식의 지점들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불립문자를 조형한다. 어떻게 조형하는가. 조형을 위해 작가는 반야심경과 같은 불교경전을, 한시와 같은 고전문학을 차용한다. 그렇게 차용된 경전이며 문학 자체는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독자적이고 완성된 텍스트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인 만큼 결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닫힌 의미체계를 견지하고 있다. 작가는 이 온전한(?) 텍스트를 풀어 헤쳐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완전한(?) 텍스트로 재생시킨다. 완전한 텍스트로 재생시킨다? 문자에 결박된 결정적인 의미의 족쇄를 풀어 처음 의미며 열린 의미를, 그 속뜻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한지에 반야심경을 적어나간다. 지혜의 빛에 의해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으로서 총 27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 개념이 그리고 참마음이 핵심개념이라고 한다. 그 개념에 미루어 짐작해볼 때 어느 정도 이미 그 속에 불립문자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공의 진정한 의미를 그리고 참마음의 경지를 어떻게 말로 형용하고 글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반야심경이 적힌 종이를 잘게 잘라 등이 전면을 향하도록 둥글게 만 후, 마치 집자를 하듯 화면에 촘촘하게 세워 심으면 하나의 전체화면이 재구성된다. 
그렇게 재구성된 화면을 보면 적어도 외관상 반야심경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먹의 흔적이며 문자의 자취만 남는다. 비록 반야심경은 온 데 간 데 없지만, 사실은 흔적으로 남아있고 자취의 형태로 체화돼 있다. 비록 최초 반야심경을 문자로 기록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정작 그 진정한 의미는 문자가 아닌 문자의 흔적, 문자의 자취, 어쩌면 문자의 이면, 문자의 행간, 그리고 어쩌면 그 자체 일종의 수행으로도 볼 수 있는, 문자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자체에서 찾을 일이다. 애써 쓴 경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는 이처럼 문자의 형태로 결정화된 의미에 현혹되지 말라는 주문이 담겨있다. 진정한 의미는 말로 형용할 수 없고 글로 정의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만 마음으로, 참마음으로 읽을 일이라는 전언을 담고 있다.  
불립문자의 의미는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형식적인 문제를 보자. 평소 워낙 형식실험이 강한 작가이기도 하거니와, 일련의 불립문자 시리즈에서도 역시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다. 해체되고 재구성된 화면은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우연하고 무분별한 흔적이며 자취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림처럼 보이고 패턴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작가는 둥글게 만 낱낱의 종이 조각을 모듈 삼아 자유자재로 화면을 재구성하는데(그 자체 일종의 픽셀회화로도 볼 수 있는), 재구성하기에 따라서 최초 알 수 없는 얼룩처럼 보이던 것이 어떤 알만한 구상적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풍경을 연상시키는데, 뭍이 있고 연못이 있는, 산이 있고 강이 흐르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때로 산에는 둥근 달이 떠 있고, 강에는 물고기가 노닐고, 연못에는 연밥과 함께 연꽃이 만개해 있는, 그리고 수면에 이는 파문이 은근한 것이 보기에 따라선 산수화조를 소재로 한 전통적인 민화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두 폭 이상의 그림을 연이어 붙이는 식의 병풍 양식을 도입한 것도 이런 인상을 강화시켜준다. 
전통적으로 글과 그림은 하나라고 했다. 작가는 글자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 속에 불립문자의 의미를 숨겨놓았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서화동원사상과 민화로 대변되는 전통회화의 성과를 현재 위로 소환해 각색하고 재해석하는, 그리고 자기화하는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여기에 그림 속 모티브가 흥미롭다. 찌그러져 못쓰게 된 꽹과리가 달을 대신하고, 호수에는 물고기 대신 목어가 노닌다. 목각연꽃과 함께 마른 연밥이 그림을 대신하는가 하면, 얼핏 그림 속 풍경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목인도 보인다. 오브제의 도입으로 그림을 조력하게 한 것인데, 진즉에 전작에서 이미 매니큐어, 성냥갑, 면도칼과 같은 각종 생활오브제를 그림 혹은 조형의 도구로서 사용해온 전력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굳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예술혼의 증거로 보면 되겠다. 다른 작업에서, 그리고 추후 전개될 작업에서 이런 생활오브제의 차용은 더 확장될 것인데, 이를테면 종이 재질의 계란 포장용기, 각종 가전제품 포장용기(가전제품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박스에 함께 넣는 일종의 지지대), 여기에 속이 빈 컴퓨터 본체와 빈 포도주 병들이다. 
버려진 것들, 버려질 것들의 운명에 처한 각종 일회용 생활물품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데, 이런 재생(혹은 환생 혹은 거듭남)이야말로 불립문자와 함께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혹은 존재론적 축으로 봐도 되겠다. 때로 오브제의 표면에 금박을 입혀 가치전환을 꾀하는데 같은 의미로 봐도 되겠고, 여기에 사물대상 혹은 존재의 가치란 상대적인 것임을 주지시킨다. 근본적으론 가치란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음거울에 비친 상에 불과하다는, 그래서 마음에 연연해할 일이 없다는, 그래서 오히려 세상만사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불교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한편으로 작가는 근작에서 불립문자 시리즈와 함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화한다. 불심(주로 존재론적인)과 함께 현실참여가 요구되는 예술가로서의 책무를 실천한 것인데, 현실참여 운운하기 이전에 현실을 사는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표현의 자연스런 발로라고 볼 수가 있겠다. 일명 <DMZ, 신 몽유도원도>가 그것이다. 면도칼을 소재로 한 전작에서 이미 한차례 차용한 적이 있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꾼 도원 꿈을 안견이 그린 것으로, 어쩜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도원은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결국 제목의 의미는 DMZ와 유토피아가 하나로 결합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DMZ로 대변되는 분쟁과 분단의 상징적인 지역을 평화와 화합의 상징적인 지역으로, 새 세상으로, 유토피아로 탈바꿈시키자는 염원을 담고 있다. 
작품을 보면, 확대 복사한 원작의 이미지를 화면에다 전사한 연후에 각종 오브제를 덧붙여 화면을 메워나가는 과정과 방식을 보여준다. 비록 원작의 이미지를 따라 덧붙여나간 것이지만, 오브제로 완전히 뒤덮인 최종적인 화면에서 원작의 이미지를 유추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그 이면에는 여전히 몽유도원도의 이미지와 그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문자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문자 이전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 불립문자 시리즈와는 또 다른 방식과 경우로서 불립문자를 변주해보인 것이다. 
그렇게 화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오브제를 보면, 원래 여백이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예의 한문자들, 각종 문양의 종이 스티커들(주로 불교 도상을 문양화한), 각종 플라스틱 소재의 동물 스티커들, 그리고 아마도 원작에서 숲이 그려져 있었을 자리에는 나무 형태의 철물 브로치들이 보인다. 아마도 일회용품(한번 쓰고 버려질 것들)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재생의 의미를 담았고, 주제로 치자면 동식물이 어우러져 노니는 지상낙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림을 어린아이의 놀이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발상에서 천진난만함이 읽힌다. 그렇게 일종의 오브제화로 재탄생한 신 몽유도원도를 통해 작가는 분쟁과 분단의 상징지역을 어린아이와 동물들이 하나로 뛰노는 평화와 화합의 상징지역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염원을 담았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진정한 소통(불립문자 시리즈)과 함께, 현실을 반영하는(DMZ, 신 몽유도원도) 예술가적 태도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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