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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여란/ 회화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

고충환

제여란/ 회화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 


보면서 글을 쓰기 위해 출력한, 캡션이 없는 상태의 프린트된 이미지만으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윈지 아래쪽은 어딘지 혹 그림이 뒤집힌 건 아닌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림에는 정방향(아니면 정면성?)이란 것이 있고 대개 캡션은 이런 정방향을 기준으로 기재되기 때문에 캡션을 참조하면 될 일이지만, 이런 길잡이 역할을 하는 기준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실 캡션보다 더 결정적인 기준이 있다. 바로 재현이다. 감각적 실재를 재현한 것이 가늠자 역할을 한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에는 그림 어디에서도 감각적 실재도 재현된 이미지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두툼하게 뒤섞인 안료 덩어리와 우연하고 무분별한 물감자국이 있을 뿐. 추상인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직접 대면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림은 당연히(?) 정방향으로 세워져 있었고, 정방향 특유의 시지각적 조건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정방향이란 것이 있다는 얘기고, 적어도 작가는 그 정방향을 의식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다. 정방향이 있다? 하나의 그림으로 하여금 정방향으로 만들어주는 기준이 있다? 하나의 그림으로 하여금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근거가 있다? 혹 작업실에서 느낀 정방향은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선입견? 회화의 관습? 회화의 관성? 모르긴 해도 만약 그림을 뒤집어놓았더라도 그 뒤집힌 사실을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작가는 알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도대체 뭘 그리는 것인가. 그림 그리기를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에 관한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리기를 통해 그리기를 탐색하는 그림이다. 그리기의 탐색에 부수되는 원천들, 이를테면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어 보이는 시지각적 조건(감각적 쾌감?), 회화의 정방향 아니면 정면성 문제, 회화의 관성, 회화의 관습, 회화의 선입견, 감각적 실재와 재현된 이미지, 추상과 구상의 경계문제를 아우르는, 한마디로 그리기 자체를 문제시하는(아니면 주제화한) 그림이다. 

미술사는 회화의 관습의 역사일 수 있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어 보이는 시지각적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학습(감각의 학습)의 역사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어 보인다면, 그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학습된 감각(그 자체 문화의 기층 혹은 성분을 이루는)의 결과일 수 있다. 그 와중에서도 가장 지극한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강력한 회화의 관습으로 치자면 단연 재현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미술사는 재현의 역사다. 작가는 바로 이런 회화에서의 재현을 문제시한다. 붓이란 도구는 정말 신묘한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두세 번 쓱 하고 스치기만 해도 영락없는 무엇인가가 그려지고(재현되고) 만다. 재현 혹은 회화의 관성으로 치자면 붓이야말로 캡짱이다. 그게 싫어서 붓이 아닌 스퀴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려진 이미지가 뭔가를 닮았다(재현했다) 싶으면 고쳐 그리거나 아예 그림을 망치고 만다. 애써 재현을 피해가는 그림, 재현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은 그림이 가능하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적어도 알려진 것대로라면 비 혹은 탈재현적인 회화는 추상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완전한 추상은 없다고 한다. 그렇담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추상은 뭔가.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 아니란 말인가. 추상이 아니라면 뭔가. 재현도 아니면서 추상도 아닌,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그림이 위치할 수 있는 지정학적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완전한 추상은 없다고 했다. 바로 완전한, 이라는 다소간 유보적인 태도에 해법이 있고 해답이 있다. 그렇담 다시, 완전한 추상이란 뭔가. 철저하게 형식논리와 형식요소의 소산이기만한 회화, 그래서 아무 것도 의미하거나 암시하거나 상기시키지 않는 회화, 다만 그림이기만한 회화, 그림으로 그림 속에 닫힌 회화를 의미한다. 다소간 유보적인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소위 모더니즘 회화로 알려진, 모더니즘패러다임으로 알려진 경우가 그렇다. 이런 모더니즘패러다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추상은 없다. 완전한 추상은 없지만, 추상은 있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다만 추상처럼 보이는 추상은 있다. 이처럼 추상에 대한 작가의 의미부여가 유보적인 탓에 재현에 대한 의미도 유보적이다. 이런 유보적인 태도에 작가의 회화의 특정성이 있고, 그리기에 관한 그림의 특정성이 있다. 여기서 유보적인 태도는 모더니즘패러다임과의 타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그리기에 관한 탐색과정을 통해 찾아낸 회화의 장소, 회화의 지정학적 위치(그리고 회화의 본성?)로 봐야한다. 

여기에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인간은 의미론적 동물이다. 의미 없는 것,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의미의 공백상태를 인간은 견디지 못하고 참을 수가 없다. 한갓 점에서마저 우주를 보고 연민을 느끼며 존재를 읽어낸다.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낡은 성벽에 난 흐릿한 얼룩에서 풍경을 읽고 전쟁을 읽었다.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를 듣기조차 한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임을, 회화의 먼 조상은 얼룩임을(미술사에서는 그림자로 알려진),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공감각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대목 모두가 작가의 회화를 지지하는 버팀목이 된다. 설령 작가가 모든 가능한 의미를 피해가면서 그렸다고 해도 그림을 대면하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입장을 작가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작가는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리고, 세워놓고 본다. 그렇게 그리고 보기를 반복한다. 그리기(아마도 무의식이 작동할)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세워놓고 작가는 뭘 보는가(아마도 의식의 눈으로 볼). 세워진 상태의 그림을 보는 것은 관성적인 보기의 전형적인 태도에 부합한다. 
작가의 회화가 위치하는 지정학적 장소는 이처럼 의미론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에 연동돼 있고(보기는 의미에 선행한다), 그런 만큼 겉보기와는 다르게 회화의 순리를 따른 혹은 회화의 순리를 재해석하고 자기화한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이 여하튼 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마냥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인다기보다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매개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이는 경지며 차원에 도달한(마치 바로크가 부조화를 통해 조화에 도달한 것처럼, 그래서 조화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확장시킨 것처럼), 그래서 그림 이면에 잠수를 타고 있는(갇힌?)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발하는 내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여실한(바이탈리즘?), 그런 그림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아님 어쩜 당연하게도 작가의 그림에서는 바로크 회화의 자기 확장성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랭크 스텔라가 자신의 후기 그림을 바로크에 비유한 적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바로크 회화의 추상화 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추상과 재현 사이, 혹은 추상 아닌 것과 재현 아닌 것 사이에서 작가의 그림은 뭘 재현하는가. 작가는 아니면 관객은 작가의 그림에서 뭘 보는가. 추상표현주의를 지지하는 액션페인팅을 순 우리말로 옮기면 몸 그림이 된다. 행위의 흔적을 기록한, 행위의 궤적이 등재된 그림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생체의 순리에 따른 그림인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무리가 없다. 생체의 순리에도 여러 질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격정적이고 파토스적이다(비극적이다?). 그 파토스가 마치 그림이 움직이는 듯, 살아있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림이 움직인다? 살아있다? 생생하다? 바이탈리즘이다. 기운생동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에너지의 흐름과 운동성을 그린 것이다. 가변적인, 변화무상한, 비결정적인,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는, 변화와 운동의 와중에 있는, 그래서 다만 한순간도 정지해있는 법이 없는 존재의 생리를 그린 것이다(존재의 생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 결정 상태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극적 긴장감은 바로 이런 과정을 그린 것, 과정이 여실한 것에 기인한 것인데, 결정지점에서 긴장감은 아무래도 떨어지거나 아예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모든 안정체제에서 생명력은 제로가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그림에서 완성은 생생한 그림, 살아있는 그림을 위해 유보적인 상태, 잠정적인 상태로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의 완성에 대한 개념(과정 자체가 완성인, 과정 속에 완성을 봉인하는)을 제안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렇고, 그렇다면 정작 작가 자신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뭘 의식(혹은 의도)하는가. 이에 대해 작가는 사건으로서의 회화, 진술이나 해석 없이 드러나는 그림, 그림으로서만 가능한 그림, 그 유래가 그림 안에 있는 그림에 대해서 말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역시 재현 이후의 회화를 언급하면서, 회화는 매순간 기왕의 어떤 의미로 환원되지는 않는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기왕의 의미로 환원되지는 않으면서, 매번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는 사건 혹은 계기로서의 회화다. 그건 결국 그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림 안에서만 유추 가능한 일이다. 기왕의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림 안쪽 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림이 외부와 연동되는 순간, 그림의 의미는 기왕의 의미에 붙잡힐 것이므로. 
그리고 작가는 의외로(?) 가장 재현적인 자연에 대해서 언급한다. 위험, 춤, 연대감, 친화력, 온정 그리고 끝내는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끊임없이 무언가가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인 그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회화가 자연일까, 하고 묻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자연의 의미가 단순하지가 않다. 자연이란 사실상 자연관(자연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의식하는가의 문제)이다. 자연 속엔 이미 주체가 포함돼 있어서 주와 객을 분리할 수가 없다(메를로 퐁티). 자연이 곧 자연관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렇게 작가가 생각하는 자연은 주체로부터 자연 쪽으로 건너가 그 일부가 된, 그리고 그렇게 자연을 작동시키는 감각기계며 관념기계를 포함한다. 자연의 작동원리로서의 지각체계를 포함하다. 쉽게 말해 자연과 주체와의 관계 곧 자연관이 자연을 생성시키고 작동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서 자연이 생성되고 작동된다. 얼핏 삽과 쟁기로 파헤쳐놓은 객토된 농토를 보는 것도 같고,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고, 태초의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고, 막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극적인 현장에 동참하는 것도 같고, 아직껏 외부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신비한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사실은 이 중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자연)인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걸 작가는 회화자연이라고 부른다(사실은 회화가 혹 자연일까, 하고 물었다). 그림 속에만 있는 장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열리는 장관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어쩜 품성으로서의 자연(끝내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회화자연의 장관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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