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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판화 60년/ 한국현대판화사의 개괄적 이해, 그 흐름과 좌표들

고충환

한국현대판화 60년/ 한국현대판화사의 개괄적 이해, 그 흐름과 좌표들 


1958년, 한국판화협회가 창립 된지 올해로 꼭 60년이 되었다. <한국현대판화 60년>이라는 전시 타이틀도 그렇지만, 대개 한국판화협회의 창립에서 한국현대판화의 시점이 비롯했다고 보는 데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물론 전사가 없지는 않다. 1905년, 해강 김규진이 석판화로 제작한 시전 <난초>가 있지만, 편지지를 위한 밑그림으로 제작된 것인 만큼 생활판화로 분류된다. 그리고 이인성이 제작한 목판화(작곡가 박태준의 악보집 물새 발자욱의 표지화)와, 기타 잡지와 신문, 만화와 만평의 형식으로 다수의 판화가 제작된 사례들이 전해진다. 이런 전사들이 있지만, 처음으로 판화를 구심점으로 한 집단운동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판화협회의 창립을 한국현대판화의 시점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사실상 한국판화협회를 계승한 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년 창립)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판화협회 작가들이 한국현대판화 1세대 작가들이라면,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은 그 2세대에 해당한다. 
한국판화협회는 이항성이 창립했다. 이항성은 1956년에 광화문 근처에서 미술교육출판사를 경영하면서 계간 <신미술>을 발행했으며, 오프셋 인쇄기법을 이용한(주로 교정기를 사용) 석판화를 제작했다. 석판화란 원래 석회석에 찍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는 주로 아연판을 이용해 판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아연판과 알루미늄판이 석판의 대용으로 널리 사용돼 왔다. 이후 아연판은 공해 문제와 비싼 가격, 무엇보다도 일정량의 에디션을 찍어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사용이 점차 기피되었는데 반해, 알루미늄판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항성은 1958년에 아연판으로 제작한 석판화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판화 외에 이상욱, 김정자, 유강렬 등의 작품도 찍었던 것으로 보아 판화공방의 효시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이봉상과 함께 최초로 석판인쇄에 의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제작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컬러리토그래피전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이항성은 본 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에 제 1회 한국판화가협회전을 중앙공보관에서 개최했다. 당시 이항성을 비롯한 유강렬, 이상욱, 김정자, 최영림, 정규, 임직순, 장리석, 변종하, 차혁, 박성삼, 박수근, 최덕휴, 전상범, 이규호 등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최영림의 목판화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 유학 시절 당시 일본의 목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934년과 40년에 각각 일본창작판화가협회전에서 입선하기도 한 그는 국내 최초의 현대판화작가로 평가된다. 그리고 정규는 1956년 국내 최초로 목판화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국판화협회는 정기적인 협회전과 함께 1968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1975년까지 존속한 신인 공모전을 통해서 송번수, 이승일,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등 차세대 판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한편, 1968년에 창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에는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자, 김종학, 김훈, 배륭, 서승원, 유강렬, 윤명로, 이상욱, 전성우, 최영림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일부 작가들이 한국판화협회 창립 작가와 겹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한국판화협회와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그 정체성이 구별되기보다는 연장된 경우로 보인다. 1968년 제 1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을 신세계화랑에서 개최한 본회는 1970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개최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주한 미공보원을 통해 흘러나온 실크스크린 재료와 기법이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충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배륭과 강환섭 같은 작가들이 실크스크린 판법을 본격적으로 수학해, 이후 실크스크린 판화의 붐을 조성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시중에는 상업적 목적으로 시설된 실크스크린 공방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발주에 의한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창립에 자극 받은 이항성이 동년(1968)에 <한국현대판화 10년전>을 기획 전시했다는 점이며, 당시 이항성을 비롯하여 김영주, 정규, 유강렬, 최영림, 배륭, 김정자, 강환섭, 이상욱, 윤명로, 김상유, 김종학 등이 전시에 참여했다. 이들 작가의 명단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판화협회작가와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을 아우르는, 사실상의 당대의 현대판화가들을 망라한 전시였다. 
1970년에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개설했다. 격년제로 열린 본 전시는, 72년의 2회 전시와 81년의 3회 전시 사이에 공백이 있었고, 이외에도 5회 전시 때는 외국인 심사위원을 배제하는 등 대외적인 위상과 공신력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본 전시가 한국현대판화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가 배출한 주요 작가들로는 김상유(1970), 송번수(1972), 한운성(1981), 김태호(1986), 지석철(1992) 등이 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월간 건축미술문화 잡지 <공간>의 창간자인 고 김수근에 의해 <공간국제판화전>이 창립된다. 공간국제판화전은 공간국제소형판화전이 원래 명칭이었으며, 소형 판화의 미학적 가치를 지향했다. 실제로 출품판화의 규격을 10x10cm로 제한함으로써 판화 고유의 작은 맛과 세밀함을 중시했으며, 이후 이러한 제한 규정이 본 전시의 특수성과 관련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 향후 보다 자유분방한 현대판화를 수용할 요량으로 소형 판화의 규격 제한을 폐지했다. 공간국제판화전이 배출한 주요 작가들로는 장영숙(1980), 김형대, 김태호(1982), 전경자, 손철호(1986), 이재호, 강승희(1988), 정상곤, 김연규(1990), 박정호, 이상기(1994), 정헌조, 서희재(1996), 배선미(1998), 구자현(2002) 등이 있다. 이 중 구자현은 공간국제판화전에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로 공식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계기로 소형판화 제한규정을 철회한 직후 대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공간국제판화전은 비록 규격제한규정을 철회했지만, 아무래도 소형판화 특유의 밀도감을 강조하는 것에서 그 진정한 의의가 발해지는 것 같다. 
이즈음에서 주목할 작가가 강국진인데, 작가는 1971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한국최초의 판화교실을 개원했다. 당시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판화 프레스기를 직접 제작하고, 김상유와 이상욱을 초빙해 판화교육에 앞장섰다. 판화공방도 그렇거니와 특히 판화교육에 관한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학파들이 하나둘씩 귀국해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되기도 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판화시장이 형성되기도 전이어서 당연히 공방체제도 정착되지 않았던 불모의 시기였다. 그런가하면 벤호, 라는 상호명의 수제 프레스기가 드문 수요에 부응해 주문 제작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로 기억된다. 그렇게 옛날에 작가들은 프레스기도, 니들 같은 도구도 직접 만들어 썼다. 
참고로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된 정황을 보면, 1983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성신여대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및 서양화과 대학원 판화전공,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판화전공이 각각 개설된다. 그리고 한성대학교, 경기대학교, 동아대학교(이상 대학원 과정), 조선대학교(학부과정), 이화여대(대학원과 학부과정) 등에 판화과 또는 판화전공이 잇달아 설립된다. 이로써 현재에는 추계예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그리고 이화여대(회화판화전공?)가 학부과정과 대학원 과정 모두에서 판화과를 개설해 판화와 관련한 심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내의 거의 모든 미술대학들에서 여러 형식으로 판화수업을 진행해오고는 있지만, 독립된 학과가 개설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더욱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사설공방과 그 공방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현재에는 이와 같은 대학현장에서의 전문적인 판화작가 교육 및 양성이 더 절실해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1980년대 국내화단은 소위 순수미술 진영과 민중미술 진영 간의 이념 대립이 첨예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민중미술은 민중을 계몽하는 한편, 자신의 이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는 주요 수단으로서 벽화운동과 걸개그림 그리고 민중목판화운동을 널리 전개하기에 이른다. 
특히 민중목판화운동과 관련해 오윤을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원래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정작 조각보다는 판화에 주력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판화가 갖는 특징 즉 특정의 이념을 보다 손쉽고 효율적으로 표현, 전달하고, 소통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주요 판화 작품들 대개가 유명을 달리 하기 불과 수년 내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어떤 응축된 힘이 느껴진다. 프로파간다적인 목판화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정원철은 리놀륨 판화 <대석리 사람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 시리즈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초상의 한 전형을 제시한다. 기왕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판화는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그 맥이 닿아있다. 
이외에도 주요 민중목판화 작가들로는 김봉준, 김진하, 김종억(김억), 김준권, 남궁산, 류연복, 이철수, 이인철, 정비파, 홍성담, 홍선웅 등이 주목된다. 현재 이 일군의 작가들은 당시의 민중목판화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정신에 맞게 일정한 자기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 대략을 보면 삶의 터전으로서의 환경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생태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류연복, 홍선웅, 김억의 기행목판화, 김준권의 수인목판화, 정비파의 태백산맥)과 함께, 전통적인 민화를 차용해 현대적인 어법으로 각색한 민화풍의 목판화(오경영), 삶의 성찰에서 유래한 경구를 축약된 표현과 문기(文氣)가 있는 화면에 실어낸 선불교적 목판화(이철수), 그리고 삶에의 쓰임새에 주목한 장서표(남궁산) 등 여러 생활미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1995년에는 한국판화미술진흥회가 설립되었으며, 판화 전문 아트페어인 서울판화미술제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시행초기에는 판화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이후 점차 판화와 함께 사진과 조각을 포함하면서 현재에는 에디션워크로 그 대상이며 성격이 확장되었다. 1994년,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해 순수한 민간차원에서 기획된 <서울판화도시탐험전>을 모태로 하는, 판화의 대중화 내지 생활화를 기치로 내건 서울판화미술제는 1995년 3월 프랑스 사가(SAGA)에 이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최된 판화전문 아트페어다. 이와 함께 한국판화미술진흥회는 판화 전문지 <M.o.o.k>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이는 판화 전문잡지가 전무한 현실에서 그 이론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시의적절한 시도로 보인다. 이외에도 공모전 형식의 <벨트 BELT전>을 통해 신진작가 발굴과 육성에도 일정한 힘을 기울여오고 있다. 
1995년 연말에는 <내일의 판화전>이 열렸다. 판화가 지나치게 상품화하는 것을 견제하는 한편, 현대미술의 장으로부터 판화의 정확한 의미와 위치를 짚어내고, 판화 고유의 표현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취지하에 개최된 내일의 판화전은 각각 1995년, 1996년, 1997년 세 차례의 연이은 전시 이후 그 막을 내린다. 1995년 전시에서는 정통적인 판화와 함께, 실험성을 수용하되 에디션이 가능한 작품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1996년 전시에서는 정통 판화의 기법에 충실하면서도 판화의 규모를 확대한다는 차원에서 100호 이상의 대작을 중심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원판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 모노타이프나 모노프린트, 사진이나 영상작업 중 필름을 직접 제시하거나 인화하고 투영한 작품, 그리고 페인팅과 같은 작품을 제외시켰다. 또한 1997년 전시에서는 각 평면성의 확장, 간접성의 확장, 복수성의 확장 등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판화를 중심으로 아티스트 북이나 컴퓨터프린트와 같은 실험정신이 반영된 판화를 아우르는 등 판화표현의 경계를 확장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사료된다. 
전시와 함께 비록 1호를 간행하는 것에 그쳤지만 판화 전문지 <Vision>을 창간해 판화전문 담론을 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려는 의욕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리고 연이은 3회 전시가 종결된 1999년에는 <off print전>이 열려 지금까지 <내일의 판화전>이 갖는 의의를 되돌아보게 했다. 강애란(전자책), 곽남신(설치판화), 김용식(대형 석판화), 서정희(오브제), 송대섭(모노타이프), 안정민(여성주의), 윤동천(개념미술), 정상곤(미디어와 이미지정치학), 정원철(환경과 생태) 등 현재에도 실험성이 강한 판화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일군의 작가들이 참여한 본 전시는 향후 판화의 범주를 인접영역에로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이 개관했다. 국내 최초로 판화전문 미술관으로 개관한 이 미술관은 미술관의 성격을 특정 분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미술관 특성화 사업과 관련해 의미 있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이외에도 한솔문화재단 산하 뮤지엄산(원주 소재) 역시 판화전문미술관은 아니지만, 판화 장려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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