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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섭/ 얼굴극장, 극장으로서의 얼굴

고충환

송일섭/ 얼굴극장, 극장으로서의 얼굴 


다분히 주술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선사시대 동굴벽화에 그린 동물 그림을 제외한다면, 회화의 기원은 인물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쟁터로 떠나는 애인의 실루엣을 벽에다 본떠 그린 것(회화의 자각)에서, 그리고 물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것(이미지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각각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반성적인 성향(거울을 보는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자질일 수 있고, 그런 만큼 회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반성적인 욕망을 매개 성사시켜주는 도구다(그러므로 어쩜 회화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일 수 있다). 그렇게 회화는 인물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비롯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소재의 고갈 운운이 무색하게 인물은 여전히 가장 많은 화가들이 가장 많이 그리는 소재다. 더 그릴 게 있을까도 싶은데, 어떻게 그런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물, 초상, 얼굴은 고갈될 일이 없다. 인간에 대한 정의가 분분한 한 계속 호출될 것이고, 인간과 세계(혹은 환경)와의 관계가 유동적인만큼 계속 재 소환될 것이다. 그렇게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를 새로운 얼굴들의 극장으로 채울 것이다. 

여기에 얼굴들이 있다. 눈을 뜬 것 같기도 하고 반쯤 감은 것도 같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지운 것도 같은, 알만한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것도 같은 얼굴들이다. 애매모호한, 오리무중의, 어두운, 내면적인, 관조적인, 우울한, 불안한, 불안정한, 흔들리는, 부유하는 얼굴들이다. 한눈에도 얼굴임을 알 수 있는 경우(얼굴의 전형?)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얼굴에 대한 선입견이 아니라면 그 실체가 선뜻 와 닿지는 않는, 최소한으로만 겨우 얼굴임을 암시하는 경우(얼굴의 원형?)가 태반이다. 얼굴을 그리면서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얼굴을 지우면서 그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우면서 그린다? 얼굴의 뭘 지우고, 얼굴의 뭘 그리는가. 얼굴의 전형을 지우고, 얼굴의 원형을 그린다. 그렇다. 작가는 알만한 얼굴의 전형을 지우는 과정(부정)을 통해서 얼굴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얼굴의 근원, 바닥, 실체를 찾는 과정(긍정)을 보여준다. 부정을 통한 긍정이고, 지양(버리면서 찾는, 지우면서 그리는)이다. 
그렇담 전형은 뭐고, 또한 원형이란 무엇인가. 더욱이 얼굴과 관련해서 그것들은 뭔가. 한눈에 알 수 있는 문화적 기호가 전형이다. 부유한, 가난한, 선한, 사악한, 성마른, 조급한, 우유부단한, 조심스러운, 과시적인, 젠체하는, 불쌍한, 억울한, 동정심을 자아내는 사람, 성향, 상황논리와 같이 알만한 언어로 환원되는 기호가 전형이다. 롤랑 바르트 식으론 스투디움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원형은 신비스러운, 주술적인, 미신적인, 알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미심쩍은, 종잡을 수가 없는, 오리무중의, 이중적인, 다중적인, 그리고 양가적인 사람의 부분 또는 상황논리와 같이 알만한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기호다. 다시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자면 푼크툼이고, 코드가 부재하는 트라우마다. 그리고 마르셀 모스의 마나고, 질 들뢰즈의 표상 없는 기호다. 코드도 없고 표상도 없으니 읽을 재간이 없는 기호다. 기호는 기호돼 읽을 수는 없는 기호다. 읽을 수 없는 기호? 의미기호가 아닌, 감각기호다. 야성, 야생, 본능, 본성, 자연성, 동물성과 같이 인간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지만, 문명화되는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혹은 현저하게 희미해진 기호다. 
다시 작가로 되돌아가보면, 작가는 얼굴을 매개로 전형적인 기호를 지워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얼굴, 상실한 얼굴을 되찾고, 얼굴의 원형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작가는 인터넷 매체와 같은, 비디오영상매체의 스틸화면과 같은, 신문과 잡지에 실린 화보와 같은 대중매체로부터 최초의 모델을 취한다. 그 모델이 보여주는 얼굴은 거의 예외 없이 연출된 얼굴들이다. 주제를 부각시키는 얼굴들이며, 극적 상황을 강조하는 얼굴들이며, 상품화되고 물신화된 얼굴들이다. 전형적인 얼굴들이고 전형화 된 얼굴들이다. 작가는 그 얼굴들을 취하고, 편집하고,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다. 취할 때 원형 그대로가 아닌, 부분 부분을 따로 취해와 하나로 편집한다. 그렇게 편집해 그리면서, 알만한 부분들을 알 수 없게 지운다. 그저 지운다기보다는 지우면서 그리고, 뭉개면서 찾는다. 뭘 지우고 뭘 찾는가.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주체를 지워 익명적인 주체로 변질시키고, 알만한 얼굴을 지워 그 이면의 알 수 없는 얼굴(내면의 초상?)이 드러나게 만든다. 
그렇담 여기서 알만한 얼굴은 뭐고, 알 수 없는 얼굴은 또 뭔가. 질 들뢰즈는 얼굴을 얼굴과 머리로 구분한다. 여기서 얼굴은 공공연하게 그 의미가(그리고 어쩜 기능마저도) 사회적 합의에 이른 사회적 기호며 문화적 자산을 의미하고, 머리는 그 기호며 자산에 의해 억압된 주체를 말한다. 다르게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의 비교로 이해하면 되겠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가면이란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 가면적 주체, 사회적 주체, 제도적 주체를 말하고, 그 주체에 의해 억압된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삶의 질이 점차 사회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아이덴티티는 그만큼 더 억압되고, 때로 지나친 억압이 자기 자신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른다. 자기 자신을 낯설다고 느끼는 자기소외다. 주체는 공공연하게는 제도적 주체(페르소나)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으로는 제도에 의해 억압된 주체(아이덴티티)로 분열된다. 이중분열이고 다중분열이다. 그렇게 이중분열과 다중분열, 그리고 자기소외는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며 증상이 되었다. 
그렇게 작가는 얼굴을 매개로, 익명적인 초상을 매개로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을 그린다. 그 얼굴들이 왠지 애매모호한, 오리무중의, 어두운, 내면적인, 관조적인, 우울한, 불안한, 불안정한, 흔들리는, 부유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주술적인, 미신적인, 알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미심쩍은, 종잡을 수가 없는, 오리무중의, 이중적인, 다중적인, 그리고 양가적인 인상이다. 바로 자기가 분열되는 느낌이고, 소외되는 인상이다. 그렇게 나는 특정 주체로 정박되지 못한다. 다시, 그렇게 나는 특정주체가 아닌 다중복합적인 주체며 복수주체다. 얼굴은 나의 내면이 투사되는 스크린이며, 자신의 인격이 상영되는 극장이다. 이중적인, 다중적인, 다중복합적인, 그리고 때론 상호 이질적인 상황논리가 전개되는 전망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하나의 목소리 속에는 여러 이질적인 다른 목소리들이 하나로 섞여있다고 했다. 다성성이다.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아니라고 했다. 실재로는 내가 하는 말은 나와 같지가 않다고 했다. 분열된 자아다. 그리고 랭보는 나는 신이고 악마며 타자라고 했다. 눈을 뜬 것 같기도 하고 반쯤 감은 것도 같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지운 것도 같은, 알만한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것도 같은, 작가가 그린 일련의 얼굴들은 바로 이런 내 안의 타자들이며, 저마다의 타자들을 그린 것이며, 때론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 설은 타자를 그린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전제며 주제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특히 근작에서는 여기에 <다행성종>이라는 부제를 붙여 부른다. 화성 이주 프로젝트로 유명한 엘론 머스크에게서 차용해온, 아마도 미래형 인간 혹은 신인류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현대물리학에 의하면 가시세계는 미시세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미시세계의 입자들은 정지되어있지 않고 항상 움직인다. 이런 과학적 사실을 작가는 자신의 미적 관점에 적용한다. 바로 미시세계의 유동성이란 본질과 진화하면서 변화하는 인간이란 사고를 미적 표현에 적용해 그린 것이다. 그 결과물이 근작에서의 일련의 얼굴 그림들이다. 다행성종이라는 근작에서의 개념만 놓고 보면 작가는 얼핏 미래형 인간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이보다는 작가의 그림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유동적인 인간, 부유하는 인격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흥미를 그린 것이다. 바로 유동적인 본질이며 움직이는 본질, 가변적인 주체며 이행 중인 주체를 그린 것이다. 진즉에 다행성종이었던 인간(다중복합적인 인격)을 그린 것이고, 불안하고 불안정한(움직이는 존재는 불안정하다)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그 속에 나의 얼굴이 있고 너의 얼굴이 있다. 당신이 보기에도 당신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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