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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여송,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고충환

임여송,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3가. 할머니가 사는(지금은, 살던) 집이다. 작가가 할머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기도 하다. 골목길과 세탁소, 봄이면 노란 개나리가 핀 친구 집 마당,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금은, 들리던) 달동네다. 그 집이 사라진다고 한다. 재개발로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들도 있고, 그 집터 위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도 있고, 지금 막 철거가 진행 중인 곳도 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와 주택단지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작가는 그 집에 대한 흔적을 간직하고 싶고,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 그것은 그 집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간직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의 축소모형을 만들었다(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1). 알다시피 주택에는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 수북한 낙엽을 재료로 삼았다. 낙엽을 뭉쳐 형태를 만들고, 오공본드를 이용해 형태를 굳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2). 집, 평상, 담벼락, 문, 마당, 항아리, 수도꼭지 등등.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개나리꽃이며 벚꽃과 함께 투명 우드락 본드로 굳혔다. 일종의 기억오브제를 만든 것이다. 알다시피 기억은 희미해지다가, 가물거리다가, 종래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기억을 박제화하고 화석화한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봉해 놓은 것이다. 여기서 사진으로 남겨도 될 것을 굳이 사진오브제로 만든 것은 사진과 사진오브제, 정보와 감정의 차이 때문이다. 사진은 기록을 위한 것이고, 정보를 위한 것이다. 감정에 관한한 사진은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다. 여기서 작가가 간직하고 싶은 것은 향수고 그리움이지 기록이며 정보가 아니다. 작가가 굳이 사진을 사진오브제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사물들을 한지로 떠냈다(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3). 철문에 돋을새김 된 문양이며 손잡이(작가가 수도 없이 여닫았을), 창살장식, 벽돌 벽으로 된 담벼락의 구조물 일부(친구에게 숙제를 건네주던), 장독들과 화분을 떠냈다. 더러 깨지고 금이 간 흔적 그대로를 떠냈다. 그것들은 비록 사물들을 떠낸 껍질이지만, 동시에, 그리고 이보다는 흔적으로 남은 껍질(흔적의 몸?) 같았고, 기억이 벗어놓은 허물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텍스트를 쓴다(기억을 간직하는 방법 4). 6월 화창한 어느 날/ 늘 그 자리에 있을 거 같던 둥지를/ 떠나야 되는 날이 오면, 으로 시작되는. 종이에 텍스트를 쓰는데, 그 꼴이 예사롭지가 않다. 종이에 직접 쓰는 대신 투각하면서 쓴다. 그리고 그렇게 투각된 종이를 매단다. 그러면 투각된 틈 사이로 빛이 지나가면서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 그리고 종이에서 오려낸 또 다른 텍스트(텍스트의 잔해? 흔적?)가 바닥에 쌓인다. 각각 종이에 투각된 텍스트,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텍스트, 바닥에 수북한 텍스트의 흔적으로 하나의 텍스트가 변주되고 확장된다. 이 텍스트들 가운데 어떤 텍스트가 모본이며, 그로부터 다른 텍스트가 비롯되었을 원본에 해당하는가. 가독성으로 치자면(시지각의 관성을 따르자면) 그림자 텍스트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정작 그 텍스트는 텍스트의 그림자(사실은 부재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성으로 치자면 바닥에 수북한 텍스트가 실제적이다(글의 꼴이며 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텍스트는 미처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저 종잇조각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분명 그로부터 다른 텍스트가 비롯되었을 원본이 있지만(투각된 채 매달려있는 텍스트), 그건 사실 텍스트가 빠져나간 빈 구멍이며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뭘 말해주는가. 작가는 사실은 부재하는 텍스트를 쓴 것이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텍스트를 쓴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는 없는, 부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에는 없는 기억을 소환하는 텍스트, 부재하는 기억에 걸 맞는 텍스트를 쓴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아마도 지금쯤 사라지고 없을 할머니 집을 기억하고, 덩달아 사라진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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