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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욱/ 얼굴, 영혼을 위한 건축을 짓다

고충환

정희욱/ 얼굴, 영혼을 위한 건축을 짓다 


회화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조각에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함께 서양 고전주의 미술의 쌍벽을 이룬다. 유명세로 치자면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해당하는 것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피에타의 말뜻처럼 큰 슬픔을 자아내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조각이다. 여기에 피에타가 있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론다니니의 피에타.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가 살과 피가 통하는 마치 살아있는 생생함으로 미켈란젤로의 최전성기를 대표한다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조각가의 말년을 대변한다. 세인의 찬사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에 맞춰져 있는 내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완성조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각에서 보면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각별하다. 마치 조각가가 후대 사람들을 위해 어떤 특별한 의미라도 예비해놓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게 뭔가. 주지하다시피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해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그리고 플로티노스의 일자)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합체된 주의다. 감각적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다. 이데아를 상기시키지 못한다면 감각적 현실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담 한갓 돌조각으로 이데아를 어떻게 상기시킬 것인가. 이데아가 뭔가. 신이다. 형상이다. 에이도스다. 신은 이미 돌덩어리 속에 완전한 형상을 예비해놓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감각적 현실을 넘어선다. 심지어는 살과 피가 통하는 마치 살아있는 생생함마저도. 그렇게 조각가가 말년에 제작한, 어쩜 제작하다 만 듯한 미완성 조각들이 있다. 그 조각들은 말 그대로 미완성일 수도, 그리고 단순한 감각적 현실 너머의 결정적인 무엇(이데아? 에이도스? 형상? 신? 생명 자체? 호흡? 숨결?)을 예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미완의 조각들이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해 현저하게 모던하게 보인다는 점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력한 영적 환기력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점이고, 이로써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와 개념을 재정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여기에 얼굴들이 있다. 정희욱이 돌로 조각한 얼굴들이고, 돌에 아로새긴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미완 같다. 바닥에 반듯하게 서 있거나 모로 누운 얼굴들이 깨다 만 것 같고, 쪼다 만 것 같고, 갈다 만 것 같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어색하지도 어눌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미완 같기도 하고, 미완 때문에 오히려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미완 자체로서 이미 완성 같기도 하다. 이로써 미완인 채로 완성의 개념과 감각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지점을 작가는 감각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 강력한 영적 환기력으로 사람들을 파고드는 지점 말이다. 결국 조형이란 감각적 실재와 암시 사이의 줄다리기라고 생각한다. 얼마만큼 감각적 실재에 내어줄 것이며, 또한 얼마만큼 숨길 것인가. 아마도 충분히 감각적이기만 하다면, 그 숨긴 부분을 암시가 성공적으로 보충해줄 것이다. 다시, 충분히 감각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감각적 실재에 내어준 부분이 적을수록 꼭 그만큼 암시가 강조되고 영적 환기력이 강화된다. 
작가가 조각한 얼굴들은 그렇게 영적이다. 풍부한 암시가 영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가늘게 뜬 실눈과 앞으로 쑥 내민 입술이, 기름하고 펑퍼짐한 얼굴이 작가를 닮은 것도 같고, 부처를 닮은 것도 같고, 흔한 선남선녀들의 초상을 닮은 것도 같다. 이로써 작가는 얼굴의 원형이며 원형적 얼굴을 겨냥한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싶다(작가의 말)는 것이 그렇다. 이런 원형적 얼굴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감정이입하게 만들고 공감하게 만든다. 개별성으로 하여금 일반성을 담보하게 만들고, 특수성으로 하여금 보편성을 획득하게 만든다. 결국 예술이란 주관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재차 객관을 주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관과 객관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게오르그 루카치).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매개로 보통사람들의 얼굴을 만든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으로 하여금 보통사람들의 얼굴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은 그저 감각적 닮은꼴이라기보다는 영혼을 표현한 영적 환기력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영적 환기력을 위해선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서는 암시가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조형을 매개로 미처 조형되지 않은 부분(이를테면 영혼 같은)을 상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옮기자면 생략화법일 수 있다. 그렇다. 작가의 조각이 얼핏 미완성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을 알고 보면 암시였고 생략이었다. 암시와 생략이 영적 환기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의외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적지 않은 부처의 얼굴들이 그렇고, 대략적인 형태만 부여하다 만 것 같은 동자승이나 석상들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영적 환기력으로 치자면 가부키와 같은 가면들이 그렇고 특히 주술가면이 그렇다. 가면은 이중적이다. 일차적으로 가면은 본심을 숨기고 있는 가식적인 얼굴을 의미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학적으로 유의미한 경우로 치자면 사람의 내면을 꽤 뚫는 영적 투시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대개 이런 주술가면들에는 눈과 입이 뚫려있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바로 생기가 드나드는 관문이며 호흡과 숨결이 들락거리는 통로다. 작가의 조각이 그런데, 조각의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무슨 뇌수술이라도 하듯 돌덩어리를 절개하고 그 속을 파낸다. 그리고 그렇게 파낸 조각을 덮개석으로 덮어서 가린다. 그렇게 겉보기에 감쪽같지만, 사실 잘 보면 작가의 조각은 속이 비어있고, 여기에 눈과 입이 뚫려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미처 보이지도 않는 부분에까지 왜 이렇게 섬세하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가. 사실 작가에게 정작 중요한 부분으로 치자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생략된 부분이고, 암시가 보충해주는 부분이다. 바로 영혼과 생기, 호흡과 숨결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혼과 생기를 위한 집을 지어주는 것이며, 호흡과 숨결이 머무는 처소를 건축하는 일이다. 이로써 어쩜 얼굴의 원래 뜻 그대로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얼굴은 얼의 형태, 얼의 꼴, 얼의 집, 얼의 건축을 의미한다. 그렇게 얼굴에서 결정적인 것은 얼이고 영혼이다. 작가의 얼굴조각은 바로 그렇듯 얼의 건축을 짓는 일이다. 

현대조각의 특수성으로 치자면 구멍과 함께 좌대가 사라진 일을 들 수가 있다. 조각에 구멍을 내 이쪽과 저쪽의 공간이 하나로 통하게 한 것이며(특히 헨리 무어에 의해 촉발된), 좌대를 생략한 채 조각을 그대로 바닥에 전시한 것이다(특히 미니멀리즘에서 보편화된). 작가의 조각 역시 그런데, 아예 좌대가 없거나 조각과 굳이 구별되지가 않는, 혹은 그 자체가 조각의 일부인가도 싶은 돌덩어리로 대신한다. 좌대도 돌덩어리 같고(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채석장에서 그대로 실어온 것 같은) 조각도 돌덩어리 같다. 그렇담 이처럼 바닥으로 내려온 조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조각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조각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담보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좌대는 전통적인 화이트큐브가 그런 것처럼 작품과 현실을 구별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서 발명된 것이다. 현실은 현실이고 작품은 작품이라는 논리다. 그러므로 바닥으로 내려온 조각이란 곧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박차고 현실에 편입된 조각, 현실의 일부로서의 조각, 현실을 사는 조각, 굳이 현실과 구별되지는 않는 조각의 실천이며 실현을 의미한다. 화이트큐브보다는 대안공간에 어울리는 경우라고 생각하고, 생활공간을 개조한, 그러므로 장소특정성이 강한 공간 환경에 부합하는 경우라고 생각하고, 이로써 현실성을 담보하고 확장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집 앞에 흐르는 강 이름이 회야(回野)다. 들을 거슬러 흐르는 강이며 거꾸로 흐르는 강이다. 누구든 흐르는 강을 보면 어김없이 회상에 빠지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시적이고 철학적인 명명이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흐른다는 것, 그것은 원형을 찾아 나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로를 의미한다. 삶이 여로다. 정처 없는 길을 나서는 것이고, 진아(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 강을 보면서 작가는 이 시대에 돌을 다루는 작업은 거꾸로 흐르는 강처럼 미련하거나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 꼭 자신 같다고 생각한다. 때론 미련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 속에 진리를 보석처럼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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