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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영/ 건축의 해석, 건축가의 오마주로부터

고충환

석민영/ 건축의 해석, 건축가의 오마주로부터 


작가들은 실로 다양한 경로로부터 작업을 위한 착상을 얻는다. 빛, 바람, 자연, 무의식, 내면의 소리, 오랜 벽면에 난 크랙, 유년의 기억, 광기, 주술, 부조리, 이념, 이상, 그리고 사사로운 일상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감각촉수를 건드리는 계기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작가 석민영은 건축에서 그 착상을 얻는다. 시간예술에서 종합예술이 영화라고 한다면, 조형을 근간으로 한 공간예술에서 종합예술은 건축이다(진즉에 레싱은 예술을 각각 시간예술과 공간예술로 구분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영화 이전 종합예술은 건축이었다. 건축은 회화와 조각의 집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 공간, 구조, 그리고 물성과 같은 조형을 위한 형식요소들의 총체다. 여기에 건축은 과학이다. 감각적인 건축이 없지 않지만, 그럴 때마저도 건축은 과학이다. 이에 반해 회화는 감각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건축을 회화로 해석하고, 과학을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 근간이 되는 것이 공간이다. 작가가 최초로 맞닥트리는 공간이 캔버스다. 텅 빈 캔버스 자체가 이미 공간이다. 실제로 빈 공간을 전시한 사례도 있지만, 캔버스 위의 빈 공간은 미니멀리즘이다. 작가는 이처럼 텅 빈 것 자체로 이미 완전한 공간으로부터 시작한다(공, 허, 무, 모두가 이런 빈 채로 충만한, 빈 채로 완전한 공간개념에 해당한다). 텅 빈 공간 속에 환영적인 공간을 짓는 것이며, 개념적인 공간 속에 감각적인 공간을 짓는 것이며, 완전한 공간 속에 행위의 궤적이 살아 숨 쉬는 실존적인 공간을 짓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계기며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건축이다. 건축에서 착상된 것들이며, 건축에서 동기화된 것들이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공간을 짓는 일이라고 표현했는데, 건축에서 그림을 위한 착상을 얻는 것이나, 그림 자체를 또 다른 가상적인 공간을 건축하는 일로 본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 표현은 정체성의 집을 짓는 일을 함축하고 암시한다(예술은 정체성의 표현이다). 

작가는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과의 관계, 장소 곧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 건축적인 공간의 구조적인 형태와 이를 통한 공간 확장의 문제, 무의식적인 욕구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건축과 심리적인 건축의 가능성 문제, 이로써 궁극적으론 미술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인문학적 배경으로 볼 수 있겠고, 주제의식으로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작업이 건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임을 은연중 강조한 부분으로 볼 수가 있겠다. 
사실 열거한 이 관심이며 문제의식들은 굳이 건축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조형일반의 주제의식과도 상당 부분 겹치는 면이 있다. 특히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과의 상호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조형일반의 형식논리와 겹친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기술과 겹치고, 그린 것을 통해 미처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암시하는 기술과 겹친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건축과 관련해서 보자면 안과 밖이 중첩되고 겉과 속이 전도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한편으로 공간과 시간은 건축 이전에 존재론적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로써 건축을 매개로 한 작가의 관심이 각각 구조적인 건축(혹은 건축의 구조에 대한 관심)과 심리적인 건축(혹은 건축의 심리적인 측면 곧 욕망과 억압과 승화의 문제)을 넘어 종래에는 존재적인 건축(혹은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서의 건축)으로까지 확장되고 심화되는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비록 건축이 그 계기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넘어 조형일반의 형식실험으로 확장되는 것이며(어쩜 건축은 조형을 위한, 회화를 위한 구실일지도 모른다), 이로써 궁극에는 자기정체성을 찾고 존재론적인 조건마저 희구하는 지난한 과정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비록 건축에서 착상된 것이지만, 처음에는 단순한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공간을 담는 일상적인 도구들, 이를테면 정육면체 상자와 서랍 그리고 의자와 같은(의자도 그렇지만, 특히 상자와 서랍은 공간과 함께 정서도 담는다. 건축을 모티브로 한 작가의 이후 작업이 갖는 강력한 정서적 환기력이 유래한 원천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후 점차 생활공간 속 크고 작은 구조물들, 이를테면 창, 계단, 문, 벽, 바닥, 천정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공간에 대한 관심이 계기가 돼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종래에는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건축 속에 구조가, 구조 속에 공간이 담기는, 그리고 그렇게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이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최초의 공간 단계에서부터 이미 건축을 예비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특이한 것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해줄 매개체를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알만한 유명 건축가들을 호출해 시리즈 작업으로 내놓는 것이 그렇다. 이를테면 안도 다다오 연구 시리즈(2011-2013), 그리고 연이어 프랭크 게리 연구 시리즈(2014-2018)가 그렇다. 그리고 차후로는 알바로 시자 연구 시리즈, 헤어조크 앤 드 뫼롱 연구 시리즈, 자하 하디드 연구 시리즈를 현재 구상 중에 있다고 했다. 안도 다다오(뮤지엄 산), 프랭크 게리(구겐하임 빌바오, 스페인), 알바로 시자(뮤지엄 미메시스), 헤어조크 앤 드 뫼롱(반투명 소재를 이용한 건축), 자하 하디드(동대문디자인플라자) 모두가 하나같이 현대건축사에 획을 긋는 쟁쟁한 면면들이다. 이로써 작가는 건축을 회화로 번역하는데 참조할 만한 권위 있는 텍스트를 얻은 것이며, 양식의 백과사전을 통해 특정 양식을 자기화하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축의 천재들에 바치는 오마주를 표현한 것일 수 있겠다. 
그 면면들 중 안도 다다오는 물의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물속에 하늘이 비치는, 그리고 그렇게 물과 하늘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건축이다. 이처럼 물속에 하늘이 비치려면 물은 명경처럼 잠잠해야 하고, 물을 가두는 수조 구조를 취해야 한다. 여기서 기하학적인 구조가 유래하고, 기하학적인 구조 속에 자연이 담기는 형태가 연유한다. 일본식 정원을 실현한 것인데, 자연 그대로의 유기적인 구조와 더불어서 물을 흐르게 하는 한국식 정원과 비교된다. 직선이 많고 기하학적 패턴이 두드러져 보이는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 물과 하늘 그리고 빛과 같은 자연을 품어 들이는 건축구조가 정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에로 이끈다. 
이에 반해 프랭크 게리는 해체주의 건축으로 유명하다.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지우고, 구조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흡사 거대한 비정형추상조각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조형건축의 가능성을 열었다. 직선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곡선으로 드라마틱한 공간 환경을 연출한다(건축과 같은 조형에 곡선을 도입한 것으로 치자면 훈데르트바서가 선구자격이다). 안도 다다오가 물의 건축가라면, 프랭크 게리는 빛의 건축가랄 만하다. 빛을 반사하는 금속 소재로 외장을 마감한 것인데, 마치 빛의 비늘을 보는 것 같고, 빛의 갑옷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안도 다다오에 이어 프랭크 게리 시리즈를 내놓는데, 직선 위주의 기하학적 패턴 이후 곡선으로 역동적인 화면이 뒤따르는, 물처럼 파란색 이후 빛과 같은 적색이나 황색 계열이 연이어지는, 그동안 작가의 작업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안도 다다오를 그리고 프랭크 게리를 단순히 직선 대 곡선으로, 기하학적 패턴 대 유기적인 형태로, 물과 빛, 그리고 청색과 적색 계열이 대비되는 것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배적인 양식적 특징으로 볼 수 있을 뿐, 사실은 이처럼 대비되는 조형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름의 개성적인 건축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더욱이 그것을 해석하고 자기화하는 작가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건축가들의 오마주에 기초한 작가의 작업은 상호 이질적인 조형요소들이 때로는 충돌하고 더러는 어우러지면서 역동적인 화면구성을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균형보다는 불균형을 통한 균형을, 조화 대신 부조화를 매개로 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예술충동을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질서를 추구하는 충동과 생명력을 희구하는 충동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하인리히 뵐플린은 양식을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으로 구분했는데, 각각 니체의 질서충동과 생명력충동에 해당한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고, 기하학적 패턴과 유기적인 형태가 삼투되는, 물빛과 빛깔이 교차되는, 그리고 여기에 아크릴과 오일, 안료와 금속 소재의 오브제와 같은 상호 이질적인 재료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혼성된, 정적인 화면에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화면이 뒤따르는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 충동은 공존한다. 그렇게 공존하면서 자기 내면에 질서로 축성된 집을 짓고, 그 집 안에 생명력을 잉태하는, 그런 집, 존재론적인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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