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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술/ 공간 속으로 확장되는, 공간을 여는, 공간 속을 유영하는 조각

고충환

권달술/ 공간 속으로 확장되는, 공간을 여는, 공간 속을 유영하는 조각 


작용과 반작용. 고물상을 어슬렁거리던 작가에게 불현듯 철 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해머(함마)로 가운데 부분을 집중적으로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그러자 내려친 부분이 주저앉으면서 움푹해졌다. 국내 최초로 현대미술제를 도입한 대구(1975)를 시작으로 연이은 각 지역 현대미술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1976) 그렇게 가운데 부분이 움푹해진 철 파이프를 하나로 쌓아 만든 부분집합 작품으로 당시 국전 최고상인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아마도 캐스팅과 몰딩(주로 소조와 브론즈 조각) 그리고 카빙(주로 목조와 석조)으로 나타난 조각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난 것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기성오브제(철 파이프)에 다만 외부로부터 가해진 힘의 작용만으로도, 그리고 그렇게 남은 반작용의 흔적을 예시하는 것만으로도 조각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참신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작용하는 변증법적 프로세스를 조각을 위한 또 다른 문법으로 제안함으로써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다. 

오브제와 포장예술. 철 파이프는 기성오브제다. 공산품이고 레디메이드다. 작가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기성품을 차용하는데, 깡통따개를 차용해 뻥튀기함으로써 흔한 일상용품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지금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처럼 흔한 일상이 특별하게 보이도록 의미부여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팝아트(특히 클래스 올덴버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작업등이나 등받이가 없는 스툴의자와 같은 기성품을 차용해 브론즈로 떠낸다. 그리고 차용한 기성품을 포장하고, 그렇게 포장된 형태 그대로 브론즈로 떠낸다. 골판지와 때론 비닐로 TV를 포장하고, 모니터를 포장하고, 선풍기를 포장한다. 그리고 노끈으로 감싸는데, 그 형태 그대로 브론즈로 떠낸 것을 제외하면 크리스토의 초기 포장예술과 그 맥을 같이한다(크리스토의 최초의 포장예술은 비닐과 노끈으로 책을 감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작업에서 보따리를 감싸는데, 동여맨 끈의 조임 흔적이 여실하다. 일상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과 함께, 외부로부터 가해진 힘의 작용을 흔적으로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작용과 반작용으로 나타난 착상의 일정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관계. 관계가 성립하려면 이것과 저것이 있어야 한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암이 있으면 수가 있기 마련이다.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주체 없는 타자란 있을 수가 없고, 타자를 전제하지 않은 주체는 공허하다. 저 홀로 된 것에서는 관계가 성립할 수가 없다. 사람이 저 홀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관계는 존재의 전제조건이다. 작가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이런 관계에 대한 형식실험을 꾀한다. 나무판자에 틈을 내고, 무슨 거치대처럼 그 틈 사이로 막대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큰 입방체 속에 구멍을 뚫어, 와이어를 이용해 작은 입방체를 그 구멍 속에 매달았다. 틈과 구멍이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 것이다. 관계가 성립하려면 이처럼 틈이 있어야 하고, 구멍이 있어야 하고, 사이가 있어야 한다. 실질적인. 그리고 때론 관념적인. 그렇게 작가는 매스와 매스, 구조물과 구조물, 사물과 사물, 그리고 어쩜 상황(이를테면 인간)과 상황(이를테면 자연)과의 관계를 짓는다. 그리고 그렇게 지은 관계를 예시하면서, 동시에 조각의 존재방식의 한 경우로서의 관계 개념 혹은 상황논리를 제안한다. 사실 이런 관계로 치자면 일본 현대미술을 견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노하(물파)의 핵심개념이기도 하거니와, 국내에도 이러저런 형태로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 작가 역시 알게 모르게 당시 그 경향을 흡수하면서 자기화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적. 쌓는다. 아상블라주(어셈블리지)다. 일차적으론 쌓는다는 의미이지만, 이로부터 배열하다, 열거하다, 나열하다, 덧붙여나가다, 라는 이차적 의미가 파생된다. 작가는 자잘한 사각형 형태로 자른 동판 패치조각을 용접으로 덧붙여나가면서 원하는 형태를 만든다. 단위구조를 집적시켜 형태를 만드는 구조적인 조각이고 구축적인 작업이다. 작가의 작업 중 가장 노동집약적이고, 조각의 전형적인 문법에 충실한 경우에 해당한다. 

온에어 시리즈. 온에어는 그 말 속에 대기가 들어있고 공중이 들어있다. 대기를 향해 나아가는 조각이고, 공간 속으로 확장되는 조각이다. 세로로 서 있는 평평한 판재 형태의 사각 프레임 속에서 허물거리며 흘러내리는 조각이다. 마치 종이를 확대 적용한 것 같은, 종이의 일정 부분을 칼로 오려내 공작하는 식의, 때로 그렇게 오려낸 부분과 프레임으로 남겨진 부분을 와이어로 매달아 입체구성을 시도하는 식의, 여기에 때론 모빌처럼 외계에 반응하기조차 하는, 평면이면서 입체인 판 조각이다. 자신의 일부로 하여금 스스로의 본체 밖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공간을 다시금 자신의 일부로서 포함해 들이는 공간조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중력 작용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다시금 작용 반작용 개념과 만나진다). 사물이 허물거리며 흘러내리는 건 중력 작용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조각은 물성이 강해 그 자체로는 허물거리지도 흘러내리지도 않는다. 그걸 허물거리며 흘러내리게 했다는 점에서 작가의 조각은 반조각적이다. 조각의 생리에 반하는 반 혹은 비 조각을 통해서 조각을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드로잉 시리즈. 작가가 속한 세대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다 그렇듯 작가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번은 학교에서 한 부잣집 아이가 대나무 자를 가지고 와서 보란 듯이 직선을 잘도 긋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제도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자다운 자가 없었던 작가는 종이를 여러 겹으로 접어 임시로 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자로는 당연하게도 삐뚤빼뚤 못생긴 불완전한 선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다. 작가와는 일정한 세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필자 역시 그런 적이 있었고, 그런 연유로 작가의 추억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 작가의 드로잉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 2008년 즈음의 일이다. 
드로잉에는 발상과 아이디어 스케치라는 의미가 있다. 즉흥적인, 가변적인, 비결정적인, 유연한, 이행 중인, 과정 중에 있는, 과정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야말로 드로잉의 미덕이고 드로잉이 지향하는 덕목이다. 그렇게 작가는 삐뚤빼뚤 못생긴 불완전한 선으로 이루어진, 속(매스)이 없고 형(형태)이 빈, 크고 작은 직 혹은 정사각형을 만들었다. 가장자리 선만으로 이루어진 선조로 보면 되겠다. 세상은 변하고, 미감도 변하기 마련이다. 삐뚤빼뚤 못생긴 불완전한 선이지만, 희한하게도 아님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다. 지금까지 자로 자른 듯 반듯한 기하학적 형태와 씨름해온 작가가 비록 여전히 직선이지만 이제 뭔가 좀 다른 선, 좀 더 유연한 선, 좀 더 유기적인 선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자연에는 오직 곡선이 있을 뿐(이에 반해 직선은 문명의 표상)이라는 훈데르트 바서의 말도 있지만, 자연친화적인 선,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 선에 이끌린 것이 아닌가도 싶다. 
여기에 드로잉 시리즈는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선 자체도 삐뚤빼뚤하지만, 형태도 가변적이다. 이를테면 정 혹은 직사각형을 위에서 아님 모서리에서 아님 가운데 부분을 지그시 누르면 형태가 일그러진다. 심지어 거의 눕기조차 한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작업은 작용 반작용 개념 곧 역학 개념을 만난다. 외부로부터의 힘이 어디서 어떻게 얼마만큼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형태가 달라진다. 여기에 더러 도중에 끊기거나 잘려나간 선도 있어서 외부를 향해 열려있고 공간으로 무한 확장되는 느낌이다. 작가는 나는 광활한 곳이 좋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처럼 조각 밖으로, 공간 속으로 무한 확장되는 조각, 심지어는 안과 밖의 경계도 없고, 겉과 속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차원을, 그 차원에의 성취와 향유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땡땡이.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기왕의 조각들, 특히 크고 작은 판재 형태의 조각들 위에 무슨 패턴과도 같은 땡땡이를 그려 넣었다. 엄밀하게는 자잘한 사각 패턴의 땡땡이를 그려 넣어 기왕의 조각에 나타난 기하학적 형태와 그 맥락을 맞춘 느낌이다. 아마도 판재 형태 자체가 일종의 화폭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넘나들어진다. 기왕의 완성된 작업을 재활용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아님, 이미 완성된 작품마저도 잠정적으로는 미완인 것으로 보고, 여기에 또 다른 주석과 부연으로 덧붙인 것일 수도 있겠다. 
보기에 따라선 각각 사각패턴과 원형패턴이라는 차이를 무시하고 본다면, 색채대비가 뚜렷한 것이 쿠사마 야요이를 상기시킨다. 드로잉 시리즈 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광활한 곳이 좋다고 했는데, 여기에 다시금 나는 화려한 것이 좋다고 선언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실제로도 노년에 가까워지면서 무거운 걸 내려놓고, 좀 더 가벼운 쪽, 장식적인 쪽, 화려한 쪽, 아기자기한 쪽으로 뒤늦게 선회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 작가 역시 이와 무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또한 본성에 부합하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인다. 무거운 것이 마냥 좋은 것이고, 이에 반해 가벼운 건 단지 피상적인 것일 뿐이라는 선입견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무거운 것이 존재론적인 것만큼이나, 가벼운 것 또한 존재의 본성에 부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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