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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빛을 타고 흐르는 종이배의 항해

고충환

김정아, 빛을 타고 흐르는 종이배의 항해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것은 빛이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을 특정하게 해주는 아이콘 혹은 키워드로 봐도 되겠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적인 빛이나 재현적인 빛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현상으로서의 빛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어떤 사물대상과 함께 있을 때 그 실체가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사물대상이 마치 옷처럼 빛을 입고 있을 때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사물대상의 굴곡에 부닥쳐 음영과 대비될 때 더 잘 드러나 보인다. 
이와는 다르게 작가는 빛 자체를 그린다. 화면에 온통 빛을 부려놓는다. 빛을 테마로 한 추상이다. 빛을 추상화한 그림이다. 여기서 작가는 빛의 질료적 경우를 빛살로 해석한다. 마치 전통 자개에서의 끊음질 기법에서처럼 빛을 짧고 긴 빛살들(작가의 경우에는 붓질들)로 해체한 후 그 단위소 혹은 모나드로 화면을 촘촘하게 메워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빛살들의 흐름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며 방법이 기계적이거나 규칙적이거나 정밀하지는 않다. 오히려 즉흥적이고 우연적이고 표현적이다. 과정과 방법의 대략적인 큰 틀을 견지할 뿐, 그때그때의 감흥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감흥? 감정? 감흥과 감정은 주체에 속해있고, 주체가 외계와 만나질 때 그 반응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빛 자체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빛 자체의 객관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빛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그린다. 빛에 대한 감흥을 그리고 감정을 그린다. 빛과의 교감을 그린다. 빛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그린다. 주관적인? 바로 자기내면의 빛을 그린다. 그렇게 그림 속에 흐르는 빛의 다발이 기의 흐름 같고, 무분별한 욕망의 분출 같고, 때로 번민의 화신 같다. 자기내면을 빛에 빗대어 그리고 표현한 것이다. 
빛 다음으로 인상적인 것은 거친 질감과 콜라주다. 거친 질감은 말할 것도 없이 빛의 물성을 표현한 것이고, 그 물성에 자기내면감정을 투사한 것이다. 그리고 콜라주 역시 어느 정도 이런 빛의 물성에 종사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러저런 콜라주가 무분별하게 때론 분방하게 도입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면서 화면의 밑바탕을 형성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콜라주의 단위소가 접어서 붙인 종이배다. 종이배를 붙여 나가면서 기하학적 도형을 만들고, 추상적 패턴을 만들고, 때로 탑을 쌓기도 한다. 특히 종이배로 탑을 쌓은 경우는 죽은 아버지를 그리면서 그렸다고 한다. 아마도 탑을 매개로 사자를 기리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엄밀하게 추상 자체 그리고 객관 자체라고 부를 만한 경우는 없다. 내면풍경을 표상하기 위해 빛을 도입했고, 종이배 역시 그렇게 보인다. 아마도 물가에서 종이배를 가지고 놀던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온 것이고, 보편상징의 경우로 치자면 세상살이의 유비적 표현을 위해 도입한 것일 터이다. 이를테면 인생을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에 비유한 것일 터이다. 
화면은 그렇게 이원화돼 있다. 기하학적 패턴을 이룬 콜라주 부분과 그 위로 거친 질감을 만들어내면서 중첩된 빛의 흐름 부분이다. 기하학적 패턴과 표현주의적 분출이 상호작용하면서 길항하는 그림이다. 니체를 인용하자면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 질서의식과 분방한 생명력이 부침하는 그림이다. 이로써 작가는 어쩜 빛의 흐름에 빗댄 분방한 내면풍경의 기저에 이와는 구별되는 질서의식으로 축조된 자기만의 성소를 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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