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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용/ 욕망도시, 추상도시에서 꿈을 꾸다

고충환

신상용/ 욕망도시, 추상도시에서 꿈을 꾸다 
도시패러다임, 비정한 그리고 스펙터클한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흡사 추상적 패턴처럼 보이는 거대 아파트 단지 위로 섬처럼 부유하는 주택들, 밤의 환락가를 서성이는, 부감법으로 내려다 본 탓에 실제보다 더 왜소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하는 숲이며 나무들이 보이는 정경을 작가는 도시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각 아파트와 밤 그리고 왜곡된 자연이 도시패러다임을 증언하기 위한 키워드로 호출된다. 
이미지로 보는 아파트가 흡사 기계로 찍어낸 것 같다. 복사와 복제에 의해 견인되는 아파트의 모듈구조는 천편일률적인 도시 이미지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런 붕어빵 도시구조에서라면 보들레르의 이상(여기가 아닌 어디라도)도 유목주의적 이행(탈주하는 사유)도 불가능할 것 같다. 다르게는 개성과 일탈이 금지된 제도기계(질 들뢰즈)의 물화된 형식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삭막한 도시 속에 사람들이 기계부품처럼 살고 있다. 미셀 푸코는 그런 삶의 정경을 헤테로토피아(고도로 제도화된 삶의 축도, 제도가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구조, 이를테면 군대와 감옥, 정신병원과 기숙사와 같은)로 명명한 바 있다. 
도시는 이중적이다. 이처럼 족쇄가 채워진 개성과 일탈이 일순간에 풀리는 시간이 밤이다. 도시는 낮에 자고 밤에 깨어난다. 밤은 억압된 도시의 욕망이 그 출구를 찾고 그 실현을 얻는 시간이다. 욕망도시가 도시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밤에 도시는 더 도시답다(하이데거의 존재의 존재다움). 도시의 패러다임을 확인하기 위해선 낮보다는 밤에 도시의 열기가 뿜어내는 욕망의 도가니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걸어 들어가 인공조명의 입자 속에 스며들고 해체되고 산화해야 한다. 그렇게 유혹하는 불빛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 마치 도시가 사람을 먹듯. 마치 밤이 사람을 삼키듯. 그렇게 먹힐 때 도시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데, 삭막한 도시, 비정한 도시, 도시의 도시다움을 실현한다. 영화장르 중 느와르가 바로 이런 자기를 실현한 도시의 정서적 대체물에 해당한다. 그 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물화된 도시며 물신도시다. 앞서 작가의 그림 속에서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실제보다 더 왜소해 보인다고 했다. 실루엣 같고, 종래에는 추상적 패턴 같다. 인격이 도시에 먹힌 것이고, 실제가 밤에 삼킨 것이다. 진즉에 자유구상 화가 제라르 프로망제가 이런 인격의 상품화 현상,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 자기소외현상(상품가치를 잃은 추상화된 사람들)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 적이 있다. 
그 도시 속에 가까스로 자연이 들어와 있다. 이식된 자연이고 인공자연이다. 도시 속에 조성된 숲과 나무, 인공폭포와 인공호수, 인공호수를 병풍처럼 싸고 있는 전나무 숲과 지저귀는 새소리, 동물원과 식물원은 철저하게 전시적 삶에 종사하고, 스펙터클한 삶에 복무한다. 장식물이며 장신구라는 말이다.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장식을 단죄한다(물론 장식적인 예술을 포함해서). 부르주아의 소시민적 취향(작은 행복 혹은 소소한 즐거움)의 일부로서 스며든 그 생활양식을 롤랑 바르트는 신화라고 부르고 때로 독사(doxa 상식)라고 부른다. 

도시패러다임, 시멘트 혹은 콘크리트 

그리고 작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처 오지도 않은 미래가 하나의 층위로 공존하는, 다른 시공간의 결이 하나의 층위로 공존하는,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하나의 층위로 공존하는 다공성의 도시(발터 벤야민)를 흔들리는 이미지와 겹 구조의 레이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시점변화를 꾀하는데, 독수리 시점에서 하강해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그렇게 도시를 파고들면서 클로즈업해 들어가는 근접시점으로 바뀐다. 그렇게 근접시점으로 보면 단자 같은 아파트도, 도시 속 섬처럼 부유하던 주택도, 유혹하는 도시의 인공조명도 다 사라지고, 다만 시멘트로 축조된 패널과 벽면 그리고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는다. 도시가 추상화되고 실재가 추상화된 것이다. 여기서 추상은 구조주의의 전형적인 문법이다. 실재가 추상화되면 구조가 더 잘 보이고 틀이 더 잘 보인다. 일종의 개념적 환원주의가 작동하는데, 현상을 걷어내고 본 도시가 시멘트패널과 콘크리트 구조물의 최소단위로 환원된다. 시멘트패널과 콘크리트 구조물이 축조되면서 집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사이사이로 나무며 숲과 같은 자연이 개입되거나 전체적인 건축의 꼴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벽체와 계단 그리고 창문 등 건축구조를 이루는 부분 이미지들이 자족성을 획득하면서 자기존재를 주장하기에 이른다(전체와 부분의 불일치). 
욕망도시가 인공불빛마저 사라진 무미건조한 추상도시로 전이된 것인데, 이처럼 고도로 추상화된 도시에서조차 CCTV(감시사회)와 플라스틱 재질의 스타벅스 커피용기(물신사회)가 욕망도시의 잔재로 남아 도시의 욕망(아님 향수?)을 증언하기 위해 호출된다. 그리고 여기에 비행선과 경비행기 그리고 열기구와 같은 하늘을 나는 도구들과 우편함, 그리고 벽면에 가득한 낙서와 같은 꿈의 단서들(어쩜 개성과 일탈과도 그 맥을 같이할)을 도입해 추상도시의 비인간화 현상에 대비시킨다. 이런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일종의 초현실적 내지 비현실적인 비전을 자아내는데, 때로 구름 사이로 부유하는 구조물이 이런 비현실적인 비전이며 인상을 강화한다. 여기에 작가는 건축구조물의 일부로서 일종의 미러 필름(거울)을 도입하는데, 거울은 알다시피 반영과 자기반성적인 계기를 매개하는 도구다. 아마도 거울을 통해 물신도시에 반영된 욕망을, 추상도시가 되비치는 비인간화를 주지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고도의 추상도시는 테트리스 게임에 착안한 영상작업에서 극대화된다. 테트리스 게임에서처럼 시멘트 패널 형태의 구조물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면서 차곡차곡 쌓이다가 일순간 해체되는, 그렇게 축조와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마치 하나의 도시가 축조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은 영상작업에서 도시는 하나의 모나드며 단자와 같은 최소단위원소로 환원된다. 물신도시의 경제성과 효율성이 극화된 형식으로 예시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세로 형태의 블라인드 띠 형태의 구조물 전면과 이면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려 주제를 변주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각 유혹하는 도시(아님 신도시) 이미지와 섬처럼 부유하는 주택(아님 구도심) 이미지를 대비시킨 것인데, 여기서 작가의 공감은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까울 것이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 비인간화로 흐르지 않는 삶을 꿈꿀 것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가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꿈꿀 수는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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