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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경란/ 햇살이 눈부신, 선율이 흐르는 비밀정원에로의 초대

고충환

육경란/ 햇살이 눈부신, 선율이 흐르는 비밀정원에로의 초대 


육경란은 회화와 판화를 동시전공한 이력을 가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주로 회화보다는 판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작가적 입지를 형성시켜왔다. 아마도 회화만으론 표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었고, 이후 회화와는 다른 판화와의 만남을 통해서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판화는 회화와는 다르다고 했다. 회화는 직접매체고 판화는 간접매체다. 회화는 직접표현이 가능하지만, 판화는 판이라는 중간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만큼 그림 이전에 판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판을 매개로 한차례 걸러진 표현인 만큼 그림이 주는 분위기도 회화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대략 직접성과 즉흥성과 우연성이 만들어낸 생생한 표현이 회화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간접성과 계획성과 필연성이 인출해낸 이미지는 판화에서만 가능한 장르적 특수성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판화와 회화는 요구되는 감각이며 생리가 서로 통하면서 다르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서로 비슷하면서 차이 나는 감각이며 생리를 자신의 판화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의 판화는 판화이면서도 은연중 회화의 감각이며 생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아예 일품회화에서처럼 에디션이 없는 모노타입이 그렇고, 여타의 판법과 함께 콜라그래피며 콜라주 기법을 적극 차용하고 운용하는 것이 그렇다. 특히 작가의 판화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적용되는 이미지가 있는데, 마치 투명한 유리판에 맺힌 빗방울을 물수건으로 훔치거나 스퀴지로 닦아냈을 때 남는 비정형의 섬세한 물 얼룩이며 자국이 그렇다. 백지 위에 그대로 프린트 한 경우라면 모를까, 대개 다른 이미지 위에 겹쳐져 찍혀있는 이미지는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다. 이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위에 중첩되면서 채도를 조절하고 색감을 깊이 있게 만든다. 거의 우연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이미지는 너무 섬세해서 일일이 그림으로 옮겨 그릴 수가 없고, 판화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회화와 판화 모두의 감각과 생리를 내재화하고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여기에 작가는 더러 판화 위에 드로잉처럼 가필을 하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작가는 판화와 회화가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종합되는 어떤 차원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주제별로 보면 대략 <시드>(씨앗) 시리즈, <가든> 시리즈, <라이프스토리> 시리즈, 그리고 <성가족> 시리즈로 구분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평소 자신만의 생활감정을 판화로 풀어놓는다. 비록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생활감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주제의식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는,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 그런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시드(씨앗) 시리즈, 존재의 원형과 생명에너지 

이전부터 그림을 그렸을 터이지만, 주제를 특정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시드 시리즈가 처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드 시리즈는  작가의 그림이 시작된 원형이며, 주제의식이 최초로 발아된 씨앗으로 보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씨앗은 존재의 원형이며 생명에너지의 핵이다.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 심지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마저 그것이 유래한 시작(시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시작(시점)이 원형이고 씨앗이다. 우주도 시작이 있고, 존재도 시작이 있고, 생명도 시작이 있다. 자연과학으로 그 시작을 규명하기도 하지만, 때로 예술을 매개로, 시적 표현을 도구로 하여 시작에 접근할 수도 있는데, 아마도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담 작가는 그 시작(존재의 시작)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적어도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모든 시작은 과거지사에 속한다. 그 사건은 너무 아득해서 기억마저 넘어선다. 기억으로마저도 붙잡을 수가 없다. 다만 관념으로만 추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뭔가. 그리움이다. 존재의 시작에 대한 그리움이다. 원형을 향한 그리움이다. 그 관념, 그리움으로 화한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서 씨앗이 호출된다. 그렇게 시드 시리즈가 왠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와 닿는 이유가 해명이 되겠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을 보면 때로 칠흑 같은, 대개는 허허로운 화면 위에 이러저런 씨앗들이 운석처럼 부유하고 있다. 아마도 태초의 우주를 그린 것이며, 존재의 원형이며 생명의 핵이 막 잉태되는 극적 순간을 그린 것일 터이다. 어쩜 잉태의 극적 순간(카오스)이 끝난 직후의 안정과 정적인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씨앗의 질감을 위해 도입된 콜라그래피 기법이다. 원래 콜라그래피는 사물대상(이를테면 마대자루 같은) 고유의 질감 그대로를 이미지로 떠내기 위해 고안된 기법으로서, 때로 인위적으로 자연 질감을 모방하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가 그런데, 미세 균열을 통해 씨앗의 표면질감을 실감나게 재현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마찬가지로 원형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알로 봐도 무방할 씨앗, 태초의 우주(존재의 자궁)를 미아처럼 떠도는 씨앗을 통해 우주가 시작되고 존재가 시작되고 생명이 시작되는 극적 순간을 표현해놓고 있는 것이다. 

가든 시리즈, 비밀정원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정원 하나쯤 가꾸고 있다. 자기만의 정원이고 내면의 정원이다. 그 정원에도 계절변화에 따라 꽃이 피고 진다. 정원은 때로 외떨어진 섬으로 그리고 아득한 바다로 변주되기도 한다. 유토피아의 표상이며 무의식의 표상이다. 그 표상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유토피아가 이상세계인 것은 불완전한 일상세계를 증명하는 것이고, 무의식은 알고 보면 억압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만의 정원을 그린다. 정원 시리즈는 각 스토리가든과 시크릿가든으로 구분되는데, 자신의 분신이랄 수 있는 내적자아와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고, 때로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자신만의 세계를 이미지로 옮겨 그린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 풍경이 들어온다. 비록 추상적 화면으로 재구성된 것이지만, 하늘과 바다, 산과 나무, 꽃과 새, 햇살과 조각배 같은 알만한 자연과 사물대상이 들어앉는다. 자연대상으로 치자면 아마도 유년의 추억으로부터 길어 올렸을 이미지의 편린들을 내면풍경으로 재구성한 것일 터이다. 조각배 역시 어릴 때 종이배를 가지고 놀던 기억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고, 보편상징으로 치자면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에 빗댄 삶의 유비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때로 그 추억의 언저리에 파도가 일고, 더러 수면을 점점이 해체시키는 햇살이 눈부시다. 
가든 시리즈에서 특이한 것으로 일종의 데칼코마니가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사 이미지, 전사 이미지에서처럼 똑같은 두 개의 이미지를 의미하지만, 사실은 약간씩 다르거나 살짝 어긋나 있어서 똑같지는 않다. 똑같지만 다르다. 잘 보면 보인다. 그렇담 이 똑같으면서 다른, 사실은 다만 똑같아 보일 뿐 실제로는 다른 이미지는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이 이미지에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담고 있는 것일까. 앞서 유토피아와 무의식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라고 했다. 바로 그걸 표현한 것이다. 이상과 일상, 의식과 무의식, 외면과 내면, 외적자아와 내적자아를 비교한 것이다. 그건 얼핏 판박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르다. 이상은 불완전한 일상을 증명하고,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에 다름 아니다. 내면의 정원에 꽃이 필 때 정작 바깥세상의 꽃밭에선 꽃이 진다. 어쩜 꿈처럼 아롱거리고 햇살이 눈부신,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유토피아는 사실은 그 이면에 이런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삶의 양태며 존재론적인 조건을 숨겨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적으로 보아 똑같아 보이는 현상, 이를테면 데자뷰 현상이 불현듯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 이로써 작가는 어쩜 데칼코마니로 사실은 데자뷰를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밀정원을 신비주의로 감쌀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비밀정원 자체가 이미 예사롭지가 않다. 어쩜 빤할지는 모르나, 여하튼 다른 세계(현실 속의 비현실? 현실을 빼닮은 비현실?)를 열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토리 시리즈, 햇살처럼 선율이 흐르고 

그런가하면 작가는 라이프스토리 시리즈에서 슈만과 크라라 그리고 베토벤 같은 유명 음악가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아마도 음악가들에 대한 오마주와 함께 평소 음악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음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다른 작업들에서도 곧잘 확인되는데,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하프와 같은 악기가 그렇다. 좀 더 추상적인 경우로는 음표가 표기된 오선지를 타고 흐르는 선율이 보인다. 이렇듯 흐르는 선율로 치자면, 자잘한 점들로 해체돼 수면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덩달아 흐르는 선율처럼 보인다. 흡사 음표와 햇살이 그 경계를 허물고 유기적인 흐름 속에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합주하는 것 같은, 그리고 여기에 파문이 파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연주하는 것 같은, 그림 속 정경이 선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시각기호와 청각기호가 서로 내통하는 것 같은 공감각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이 시리즈가 특이한 것은 그 사이즈가 다른 시리즈에 비해 눈에 띠게 작다는 점이다. 아마도 단독초상에 걸 맞는 형식이며 크기를 찾아낸 것일 터이다. 이 외에도 이 시리즈는 사물대상(이 경우에는 초상)의 실체가 손에 잡힐 만큼 정치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어서 판화 고유의 밀도감이 오롯이 살아있는 편이다. 보통 목판화로선 어려운 일이고, 한눈에도 우드인그레이빙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보통 목판화는 널목판과 눈목판으로 구분되는데, 종단면을 세로로 켠 목판이 널목판이고, 횡단면을 가로로 잘라 만든 목판이 눈목판이다. 목재의 횡단면은 그 조직이 균일하고 단단해 마치 동판의 드라이포인트에서처럼 니들로 새김질해 그리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게 만든 판화가 우드인그레이빙이다. 다른 판화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MDF 합판에 니들이 아닌 조각도로 새김질을 하고, 바렌으로 찍어내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이렇듯 우드인그래이빙의 효과를 낸다. MDF 합판은 목재를 잘게 분쇄해 접착제와 함께 압착시켜 만든 합판으로서, 조직이 곱고 균일하며 강도가 좋고 매끄러운 표면으로 인해 목판 대용으로 흔히 쓰이는 편이다. 그리고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바렌으로 찍은 판화는 프레스기로 찍은 판화보다 더 정밀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점이 특징이다. 작가는 그렇게 남다른 방법으로 평소 음악에 대한 애정을, 음악가들에 대한 오마주를,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한 것이다. 

성가족 시리즈, 성스러운 가족, 가정 

아마도 작가의 작업 가운데 가장 사적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의 평소 생활감정 중 종교심을 반영하고 표현한 것일 터이다. 성가족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구상적인 형태와 기하학적인 형태를 오버랩 시킨다. 형태상으로 구별돼 보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서로 통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무슨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기하학적 형태는 미학적으로 신성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신성기하학이 말해주듯 기하학은 신성을 표상한다.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컴퍼스로 우주(세계?)를 재는 하나님을 그리기도 했다. 기하학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도구다. 그렇게 작가는 구상적인 형태로 나타난 성가족을 신성을 표상하는 기하학적 형태로 중첩시켜 그 의미(신성)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물론 형태에 변화를 주려는 의도가 선결되어져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도입된 기하학적 형태로는 주로 사각형이 변주되지만, 이와 함께 특히 격자구조의 체크무늬가 눈에 띤다. 체크무늬 사이사이엔 홀로그램 필름을 부분적으로 도입해 변화를 준다. 홀로그램 필름은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시점변화에 따라 마치 그림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아님 일렁이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준다. 그러므로 그림에서의 홀로그램 필름은 빛을 표상하고, 빛은 신성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는 구상적인 형태로 재현된 성가족과 신성을 표상하는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여기에 빛의 질감을 중첩시켜 신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이로써 평소 자신의 종교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드(씨앗) 시리즈를 통해서 자기가 유래한 원천(존재의 원형)과 생명 에너지를 탐색한다. 가든 시리즈를 통해서는 내면의 정원을 매개로 자신만의 유토피아와 무의식 세계를 탐구한다. 라이프스토리 시리즈를 통해서 평소 생활감정 중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그리고 성가족 시리즈를 통해서는 종교심을 표현한다. 약간씩 그 결에 차이가 있지만, 크게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주제화한 것이란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얼핏 원천과 원형, 유토피아와 무의식, 악성과 신성으로 대변되는 거대담론을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평소 소소한 생활감정을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모노타입, 콜라그래피, 콜라주, 그리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한 세밀 목판화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판법을 통해서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장 심화시키는 한편, 나아가 회화와의 접점 가능성마저 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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