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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연을 보며 존재를 그리워하다

고충환

이대희, 연을 보며 존재를 그리워하다 


인체, 기다림. 주로 몸을 안쪽으로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는 포즈의 인체가 태아를 닮았다. 그러므로 그 포즈는 포즈들의 포즈, 모든 포즈가 유래한 원초적 포즈,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기억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원형적 포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기억보다 먼저 있었던 그 포즈는 인간의 원형에 대해서, 그 원형적 상태에 대해서 말해준다. 기억보다 먼저 있었던, 그러므로 기억으로마저도 붙잡을 수는 없는, 그럼에도 기억으로서 각인된 이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상태는 인간의 무엇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일까. 원형 혹은 원형적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작가는 그 상태를 <기다림>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기다림 또한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정상적인 아님 상식적인 경우라면 기다린다는 것은 미처 오지도 않은 미래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작가가 기다리는 것은 과거고, 과거로의 퇴행이다. 상실한 것, 잃어버린 것의 되찾음이다. 이미 상실한 걸 기다린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 기다림은 사실은 그리움이다. 자기가 상실한 원형을 그리워하고, 내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는, 흡사 자기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의 형상을 통해서 존재의 원형을, 원형적 존재를, 존재의 원형적인 상태를 조형한다. 삶은 어쩜 상실과 함께 태어나고, 평생 그렇게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는 사실은 어쩜 그렇게 응축된 그리움의 형상, 그리움의 물화된 형식을 조형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자조형, 쌍희희희. 각종 전통 장신구나 특히 베개 모서리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문자문양 중 기쁠 희(囍) 자가 있다. 아마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는 의미며 주문을 담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 문자를 조형했는데, 공교롭게도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되는 모듈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재미난 착상을 한다. 문자가 기쁨을 뜻하니, 그 꼴을 반복하면 기쁨도 두 배 세 배 증폭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쌍희>를 조형했고, 그 속엔 사실상 기쁨이 무한 반복 재생산되는 쌍희희희를 함축하고 있다. 문자를 조형하는 작가들이 더러 있지만, 이처럼 문자의 의미와 꼴이 갖는 관계를 파고들어 제삼의 의미를 파생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어서 주목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경우가 기왕의 인체와 문자조형을 하나로 합체한 것이다.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란 한글단어를 인체의 꼴을 따라 형상화한 것인데, 하나같이 품에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부모로 치자면 자식사랑을 전형적인 표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문자조형을 매개로 무슨 나비효과에서처럼 자신으로부터 발원한 기쁨이 두 배 세 배 퍼져나가면서 남들도 기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그리고 아마도 모든 사랑의 원형이랄 수 있는 부모의 자식사랑과 같은 삶의 태도 혹은 성찰을 되새기게 만든다. 

때 맞춰 싹 틔워 밤이 오면 잠 잘 줄 알고, 해가 뜨면 깨어나고, 구멍 뚫린 대공은 공학적으로 생겨서 부러지거나 꺾이지도 않고, 잎은 둥글어서 부담이 없고,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아진다지요...해질녘 문종이에 찻잎 싸서 꽃봉오리에 집어넣고, 밤새 꽃잎으로 보듬어 저장해둔 향기, 해 올라오면 되가져와서 연차로 아침을 시작도 했지요. 염치없는 짓입니다. 미안한 마음, 간사한 마음 합쳐서 이젠 그러지 않습니다...어릴 적 샘 속에서 보았던 내 얼굴, 연으로 채워봅니다(작가노트). 

작가의 작업실은 경산시 자인면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에 포장조차 되지 않았던 읍천리란 인적 드문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에는 <읍천리 가는 길>이란 제목의 작품이 적지 않다. 작업실 가는 길에도 작업실 앞에도 연꽃습지들이 있어서 자연스레 눈길이 갔을 것이다. 몇날며칠을 혼자 작업실을 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면 말벗도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작가는 눈 벗이며 말벗을 조형으로 옮겼다. 작가가 보기에 연은 밤이 오면 잘 줄 알고, 해가 뜨면 깨어나는 꼴이 꼭 생물의 생리 그대로다. 존재의 생리라고해도 무방하겠다. 생물이든 존재든 중요한 것은 생리 그대로 살고 때를 맞춰 사는 일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일이다. 작가에게 연은 바로 그렇게 자연처럼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더욱이 연의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아서 좋다. 향기를 즐길 수 있는(향기가 맑아지는) 자기만 아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모를까, 실제로 거리가 멀어지면 향기도 멀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향기는 사실은 향기의 기억으로 봐야한다. 상으로 치자면 잔영과 잔상, 소리로 치자면 여운과 같은 경우로 봐야한다. 상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들리는 소리, 향기가 사라진 뒤에서 여전히 맴도는 향기는 결국 기억이고 그리움이다. 애틋한 마음이고 살가운 마음씨다. 이런 마음씨가 없으면 향기가 기억으로 전이되면서까지 자기의 존재를 지속하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가 않는다. 결국 향기를 기억으로 전이시키는 것은 연이 아닌, 연을 향한 작가의 마음이다. 작가에게 연은 이처럼 기억으로마저 붙잡고 싶은 벗이다.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애틋해지고 살가워지는 벗이다. 
해가 있는 동안 연꽃은 잎을 벌리고 있다가도 해가 지면 잎을 오므려 닫는다. 낮에 깨고 밤에 자는 생물 혹은 존재의 생리 그대로다. 작가는 해질녘, 꽃봉오리가 막 닫히기 전에 그 속에 찻잎을 싼 종이를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되가져와 차로 마신다. 그러면 밤새 머금은 연꽃 향기가 배어 더 은근한 향을 즐길 수가 있다. 작가는 곧 그만두었다고 했지만, 세상에 없는 미식가 아님 신선놀음 수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자연과 교감하는 작가의 마음씨의 수준을 가늠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다. 현실 속 이야기라기보다는 도가와 선시 아님 하이쿠의 한 경구를 보고 듣는 것 같다. 그 짓을 실행에 옮긴 것도 예사롭지가 않고,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이내 그만둔 이유도 비범하다. 잘은 모르지만 작가의 성품을 생각하면 말 꾸밈이나 만든 말 같지는 않다. 연과의 은밀한 교감이나, 자연을 대하는 삶의 태도가 선승이 따로 없지 싶다. 
아마도 작가는 자연만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작업도 사람도 그리고 물론 삶도 매번 그렇게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업이 삐거덕거려도 상관이 없고 때로 늑장을 부려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에는 어느 정도 수행적인 측면이 있고, 수도자적인 부분이 있다. 작업 자체가 목적이고, 작업 자체에 의미부여하는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찾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킨다. 자본이 목적이고, 노동은 다만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 예술이다. 그 자체가 의미고 행복인 노동이다. 창조적인 노동이고 창의적인 노동이다. 생산적인 노동이고, 자기 식대로 생산하는 노동이다. 이론적으로만 보자면 모든 노동은 예술처럼 창조적이며 창의적인 노동이 될 수가 있다. 마르크스에게 예술이 그리고 미학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입장이지만, 여하튼 예술의 존재의미며 당위성을 밝히고 있는 부분으로 봐도 되겠다. 작가의 수행적인 작업이나 수도자적인 태도에는 이처럼 예술과 노동과의 유의미한 관계를 복원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는 이처럼 연과의 은밀한 교감이며, 자연과의 애틋하고 살가운 감정을 조각으로 옮겼다. 그 조각이 예사롭지가 않다. 왁스주조로 옮긴 것인데, 정밀주조인 만큼 기법이 까다로워 국내에 그 기법을 실행할 수 있는 작가가 손에 꼽을 정도다. 물론 기법은 다만 도구일 뿐, 중요한 건 작가정신이며 아이덴티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업의 내용에 개성적인 면이 있고, 여기에 남다른 스킬마저 더해진다면, 더욱이 축 쳐진, 애잔한, 가슴앓이를 앓는, 그리고 고요한 것과 같은 사물감정마저 헤아릴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처럼 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을 상기시킨다. 물질 곧 연이 작가의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그렇게 연에서 작가 쪽으로 건너온 것과 작가에게서 연에게 건네진 것 간의 상호작용이, 어쩜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상호교감이 오롯이 살을 얻고 숨결을 얻는다. 
그렇게 실체를 얻은 사물감정 중 고요한 경우가 주목된다. 선입견일지는 모르나, 연꽃습지는 호수임에도 호수 같지가 않다. 거울처럼 미동도 없다. 아마도 수면 밑이 빽빽한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미동조차 없으니 고요하게 느껴지고 적막감이 감돈다. 그리고 그렇게 정중동의 명상적 분위기에로 이끈다. 작가는 이 분위기 그대로 일종의 풍경조각으로 옮겨놓았다. 그 속에 연못이 담긴 원형거울(브론즈)이 있는, 그리고 그 수면에 연의 실루엣을 반영하는. 반영이라고 했다. 반영은 자기반성적인 거울이다. 여기서 작가는 어릴 적 샘 속에서 보았던 자기를 다시 본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마저 아득한 존재의 원초적 상태를 그리워하고, 원형적 사랑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자기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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