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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관/ 도래할 세상, 도래할 풍경

고충환

박인관/ 도래할 세상, 도래할 풍경 


전작이 없지 않지만(이를테면 1989년 이전 상황 시리즈 같은), 박인관의 회화가 뚜렷한 자기 색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이미지 시리즈 이후가 될 것 같다(그러므로 아마도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이를테면 이미지-유년시절, 이미지-기억여행, 이미지-시공유영, 그리고 이미지-시원 시리즈 같은. 그리고 여기에 근작의 주제인 이미지-새 하늘 새 땅을 포함하면, 이미지 시리즈는 작가의 작업을 견인하는 사실상의 주제의식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작업의 이면에 면면한 인문학적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시리즈 간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크게는 시리즈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관성을 견지해온 것 같다.  
근작에서는 이미지-시원 시리즈와 이미지-새 하늘 새 땅 시리즈가 집중 선보이는데, 아마도 이미지-새 하늘 새 땅 시리즈는 선행하는 이미지-시원 시리즈를 심화 발전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시리즈가 작업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의 폭을 엿보게 한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시원은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열린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기 위해선 하나의 세상이 끝나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또 다른 시원)을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의 주제의식의 폭은 세상의 시작에서 끝까지 미친다(참고로 작가는 신앙을 계기로 거듭났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의 세상은 끝이 났고, 지금 그는 어쩜 이미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폭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관념 밖에 없다. 관념이 아니고서는 그 폭을 다 담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이다. 감각적 실재보다는 작가가 생각하는 가치며 사상과 같은 관념적 실재를 그렸다. 결국 그 관념적 실재가 뭔지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곧 작가의 그림을 해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지 시리즈에서 보듯 이미지는 작가의 그림에서 일종의 좌표 혹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는 관념적 실재를 이미지로 옮겨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과 의미를 강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에서 이미지가 갖는 의미에는 남다른 점이 있다. 
이미지의 어원은 이마고에서 왔다. 그리고 이마고는 원래 죽은 사람을 대신한 그림과 조각을 의미했다. 예로부터 죽은 사람을 기념(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관습이었고, 이마고는 그 관습에서 유래한 것. 그런 만큼 이마고는 원래 귀신을 의미했다. 이 관습은 이후 전쟁터로 떠나는 애인을 곁에 붙잡아둘 요량으로 벽에 비친 애인의 실루엣을 그리는 것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마고란 말 속엔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는 의미가,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란 의미가, 부재 속에 존재를 화석화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 의미 그대로 예술의 의미가 되었다. 즉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가 이마고의 의미 곧 귀신과도 통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 기술(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것과 비감각적인 것과의 관계에 대한 기술)을 상기라고 했는데, 요새로 치자면 암시가 되겠다. 그렇게 예술은 다시, 암시의 기술이 되었다. 예술의 의미가 분분하지만, 이처럼 처음 의미대로라면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고, 그려진 것으로 하여금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 된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감각적 실재가 아닌 관념적 실재를 그린다고 했다. 비가시적인 것을 그리고,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 그러므로 어쩜 그려질 수 없는 것을 그린다. 상기와 암시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알만한 모티브들은 말하자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비가시적인 것, 미쳐 그려지지 않은 것, 그러므로 관념적 실재를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 관념적 실재가 뭔가. 시원 곧 처음으로 하늘과 땅이 열리는 때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순간을 그리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그리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쩜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이다(유토피아는 없는 장소, 부재하는 장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하며, 그 의미가 비가시적인 관념적 실재와도 통한다). 

작가는 천지창조의 순간을 그리고, 어쩜 유토피아를 그린다고 했다. 그렇담 그 순간의 비전을 어떻게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가(사실은 어떻게 표상하는가). 작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로 치자면 울울한 준봉과 중첩된 산세를 들 수가 있다. 그 준봉과 산세가 자욱한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아님 우윳빛으로 흐르는 빛에 감싸인 채 부유하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과 몽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건 말하자면 비록 알만한 산세의 형국을 닮았지만, 사실은 세속적인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몽몽한? 마치 꿈속에서 본 풍경 같다. 꿈속에서 본 풍경?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전해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도 있지만, 작가의 그림은 그런 꿈속 풍경 같다. 여기서 꿈속 풍경은 말할 것도 없이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서양에도 에덴(동산)과 아르카디아(사랑의 신 비너스가 사는 섬, 그리고 묘하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섬, 그러므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공존하는 섬) 같은 낙원이 있지만, 유독 동양에서 낙원은 첩첩산중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도원경(복숭아꽃 피는 곳)이나 선경(신선이 사는 곳)이 다 그렇다. 첩첩산중이란 말하자면 속세보다는 내세를, 지금여기와는 다른 세상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어쩜 이상향과 그 경계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꿈속에서 본 풍경을 그렸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그렸고, 시원 곧 한 세상이 열리는 극적 순간을 그렸고,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렸다. 
그 순간을 여는 계기로 치자면 빛이 결정적이다.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 빛인 만큼, 어쩜 빛은 신 자신일 수 있다(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오는 신 역시 빛으로 온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산세와 준봉을 가리면서 감싸는 것은 안개일 수도, 빛일 수도, 그러므로 신 자신(신의 기운?)일 수도 있다. 작가의 그림이 다 그렇지만, 특히 빛으로 현현한 신의 존재를 좀 더 극명하게 예시해주는 그림이 있는데, 마치 세로로 긴 창문(그 생긴 꼴이 중첩된 준봉과 닮은)을 통해 빛이 흐르는 것 같은 교회내부의 전경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그렇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빛이 감싸는 시원의 풍경을 그렸고, 도래할 세상을 그렸고, 교회를 그렸다. 
대개는 그림 위쪽에 산세가 그려져 있고, 화면 아래쪽에 양식화된 나무(소나무?)가 그려져 있어서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더러 이런 전형적인 포맷과는 다른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아래쪽에 길게 그려진 비정형의 형상이 그것이다. 섬인가? 풍경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섬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세상이 막 창조되는 순간의 풍경을 그린 것임을 생각하면, 그건 어쩜 미처 창조되기 전의 피조물, 창조를 예비하고 있는 피조물, 잠재태며 가능태로서의 피조물, 그러므로 일종의 미증유의 원형질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그 원형질 속에는 삼각형과 사각형 같은 알록달록한 띠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존재의 타고난 본성을, 생물학적 유전자며 DNA를 표상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도상학에서 삼각형은 성삼위일체를, 그리고 사각형은 여기에 인간이 더해진 완전체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시원의 극적 순간을 그리면서, 그리고 도래할 세상을 그리면서 그림 도처에 신의 의지를 숨겨놓고 있었다. 

예술의 존재이유가 분분하지만, 전통적으로 예술은 각 진리와 진실 그리고 감각의 세 갈래 길로 나뉘고 모인다. 먼저, 진실은 사실을 따져 묻는다. 리얼리즘미학과 현실주의 미술,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 소격(소외)효과, 반영이론과 전형이론, 상징투쟁과 인정투쟁 같은 예술사회학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감각은 예술의 도구로서의 형식을 묻는다. 모더니즘의 형식실험, 언어의 한계와 언어유희, 의미론과 의미의 바깥, 그리고 텍스트이론을 아우른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존재론적인 조건과 한계를 파고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와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을, 어쩜 영원히 답해질 수 없을 물음을, 질문만 있고 답은 없는 물음을 묻는다. 햄릿의 절규와 리어왕의 번민, 실존주의적 자의식과 부조리, 형이상학과 숨은 신, 그러므로 어쩜 종교를 아우른다. 
시원을, 그리고 시원 이후의 시원(시원과 시원 이후의 시원 사이에 노아의 홍수며 방주가 또 다른 시원의 한 계기로서 가로놓여져 있는)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은 존재의 유래를 거슬러 오른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어쩜 상실한 원형을 찾아 헤맨다. 그런 만큼 그의 그림은 크게 진리를 파고드는 예술의 갈래로 범주화될 수가 있을 것이다. 형이하학의 시대에 형이상학을, 미시서사의 시절에 거대담론을 되불러온 것(그러므로 어쩜 시대감정에 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가고,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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