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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리, 모든 그림은 무언가의 흔적이다

고충환

고우리, 모든 그림은 무언가의 흔적이다

고충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벽에 난 얼룩에서 세상 모든 풍경을 본다. 홍수와 숲 그리고 전쟁 같은.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를 듣기조차 한다. 암시와 상상력 그리고 공감각이 가시적인 것을 넘어 비가시적인 것을 보게 만들고, 가청적인 영역 너머의 비가청적인 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 그 바탕에 얼룩이 있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무분별한 얼룩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홍수 같고 숲 같고 전쟁 같다. 그렇게 발명된 것이 심적 혹은 미적 거리개념이다. 거리가 문제고 조율의 문제다. 사물대상에 들러붙어 있으면 아님 사물대상 속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볼 수가 없고 동떨어지면 보이지가 않는다. 그건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아닌 심적 거리의 문제며 정신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물대상이, 사물대상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 보이는 감각지점을 어떻게 알 것인가. 고우리의 그림은 바로 그 감각지점의 캐치와 관련이 있다. 
작가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비정형의 얼룩을 매개로 감정을 그린다. 타자와의 관계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파생된 감정의 흔적을 그린다. 불안과 공포, 생경함과 이질감, 분노와 소외 같은. 외관상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반성적인 그림이다. 비록 주관적인 감정을 그린 그림이지만 객관화할 수 있는 그림이고, 그런 만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렇담 추상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가. 주관적인 감정을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객관적인 감정을 그릴 수가 있는가(예술은 주관을 객관화하는 것이며,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보는 기술이다). 
작가는 우선 캔버스에 잿소를 칠하고, 빨래를 빨듯 캔버스를 물에 빨아 짠다. 그리고 캔버스를 펴면 표면에 크고 작은 구김과 미세균열이 생기고, 부분적으로 칠해진 잿소가 떨어져 나가면서 바탕천 본래의 표면질감이 드러나 보인다. 그 위에 덧칠하고 다시 빠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바탕천 본래의 질감이 드러나 보이는 부분과 그 위에 덧칠된 부분이 하나의 화면으로 포개진 색감이며 질감의 그림을 얻는다. 여기서 구김과 미세균열은 관계의 망을 상징하고, 얼룩한 표면질감은 그 관계로부터 작가가 느꼈을(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겪었을) 감정의 흔적을 표상한다. 그럼에도 이 일련의 그림에서 최초 감정의 격렬함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심지어 그림은 관념적으로 보이고, 명상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최초 감정의 격렬함이 순화되고 정화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림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겠고, 파토스(감정을 겪는)를 에토스(감정을 대상화시켜 쳐다보는)로 전이시켜놓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특이한 건 감정의 흔적을 그리기(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마치 빨래 빨듯 하는 것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또 다른 방법이고, 가급적 감정의 직접성을 표출하는 그리기를 위해 찾아낸 방법이다. 
감정의 직접성을 표출하는 그리기? 여기에 빨래 빨듯 하는 경우보다 더 부합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맨손으로 그리는 것이다(실제로는 장갑을 끼고 그리지만). 사실상 몸으로 그리는 것(매개 없이 그리기)인 만큼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그런 만큼 감정 본래의 격렬함이 더 오롯하고 더 생생한 그림이다. 그 와중에 감정이 격해지면 손톱을 세워 미세 스크래치를 남기기도 한다. 파토스를 에토스로 전이시켜놓는 그림에 비해볼 때, 파토스 그대로를 표출한 그림이고, 파토스를 겪는 그림이다. 파토스를 겪는 그림? 몸 그림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능동적인 그리기보다는 수동적인 그리기다. 미술사적 용어로 치자면 액션페인팅이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행위를 그린 그림이고, 흔적을 그린 그림이고, 행위의 자국 그러므로 감정의 흔적을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작가는 몸의 직접성을 도구로 감정의 직접성을 그린다. 처음엔 맨손을 사용하다가 이후 머리카락을 도구로 사용한다. 여기서 그림이 사뭇 혹은 많이 달라진다. 맨손이나 머리카락이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인 것은 같지만, 그 결과는 다르다. 맨손으로 그린다는 것은 사실상 몸으로 그리는 것이지만, 머리카락으로 그린다는 것은 다만 붓을 대신한 것일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붓처럼 세필처럼 사용해 그리는 것이다. 당연히 그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른 그림들이 감정이라는, 그 자체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따로 없는 미증유의 대상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라면, 이 그림의 경우에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암시적인 형태가 있고 알만한 사물대상이 있다(붓은 언제나 뭔가를 그리기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한다. 혹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붓의 관성이 그렇게 보이게 만든다). 그 사물대상이 뭔가. 풍경이다. 살과 털이 있는 살(아님 몸)풍경이며, 땅과 풀이 자라는 숲의 정경이 펼쳐진다. 동물성과 식물성이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혼성풍경이며, 자기 내면의 감정이 외화 된 내면풍경(아님 외면풍경?)이다. 
그렇게 작가는 한갓 우연하고 무분별한 비정형의 얼룩을 매개로 감정을 그린다. 빨래 빨듯 그리기, 맨손 그러므로 온몸으로 그리기,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리기와 같은 자신만의 방법론을 도구로 감정의 흔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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