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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뷔페, 표현주의적 인간과 비극적 영혼

고충환

베르나르 뷔페, 표현주의적 인간과 비극적 영혼

고충환

서체 전문가들은 서명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가 아니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베르나르 뷔페 만큼은 예외적인 것 같다. 그의 서명은 개성이 뚜렷해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삐죽하고 날렵하고 양식적인 그의 서명은 영락없이 그림 그대로다. 서명과 그림이 이처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직선의 화가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의 그림에는 곡선이 없다. 심지어 불가피한 곡선마저도 직선처럼 보인다. 초상이건 풍경이건 사물대상의 특징을 한눈에 포착해 최소한의 직선으로 정의해내는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구조와 소묘에 능한 작가임을 알겠다. 여기에 굵고 힘찬 직선으로 인물의 가장자리를 가두는, 그리고 그렇게 인물의 특징을 한눈에 부각하는 양식적 특징이 거침이 없고, 기계적이고, 관성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왠지 뻣뻣하고 부자연스런 인상 그대로 개성적인 표현으로 굳어진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이처럼 경직된, 뻣뻣한, 부자연스런 표현과 표정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굳이 그 상호영향관계를 찾자면, 비잔틴 양식과 지오토를 전후한 중세 이콘화에서 그와의 닮은꼴이 설핏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대로 치자면 당연 표현주의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뭔가에 놀란 듯한, 순간적으로 굳어진 것 같은, 내적 파토스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자기 내면에 갇힌 것 같은, 이율배반적인 인물의 표정과 표현이 전후의 피폐한 시대감정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즉각적인 반응과 호응을 얻었다. 발표 즉시 앵포르멜(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해당하는 유럽식 추상)에 맞서는 신사실주의의 기수로 떠올랐고, 19세(1948)의 이른 나이에 비평가상을 수상했고,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회고전을 열면서 이미 고전이 되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천재의 반열에 올랐고, 이와 거의 동시에 과거의 유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작가의 양식적 특징은 이른 시기에 형성과 동시에 완성되었고, 사사로운 변화를 제외하면 평생 지속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가장 대중적인 작가,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로 사랑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평단의 평가는 인색했다. 여기에 가장 프랑스적인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따로 분석을 해봐야 하겠지만,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두 화가와 비평가의 아이러니한 관계가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는 표현주의의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면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열었다. 형식과 내용이 상호연동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양식적 특징과 함께 표현주의의 세계관(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세기말적 상상력과 비극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도 물려받았을 것이다. 작가는 평생 인물과 풍경, 그리고 정물과 같은 사실상 모든 장르에 두루 통달했지만, 그 중 특히 인물화에서 이런 표현주의의 세계관이 더 극적인 형식을 얻는다. 이를테면 작가는 생전에 부인 아나벨과 같은 사랑스런 주제도 그렸지만, 이와 함께 새 연작, 박피 연작, 광대 연작이 특히 주목된다. 그 중 새 연작은 노래로 사람을 홀려 죽음에 빠트리는 사이렌을 소재로 한 것으로, 예술과 죽음과의 상관성을 테마로 한 것이다. 자신의 아내로 하여금 그토록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뮤즈의 모델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그림이 박피 연작이다. 해부도를 연상시키는, 껍질을 홀랑 벗긴 자화상을 시리즈로 그린 것인데, 지극한 자기반성적 경향성과 함께 자의식의 극단적인 경우를 보는 것 같다. 
작가는, 나를 둘러싼 증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 광대는 모든 종류의 변장과 풍자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고도 했다. 아마도 자신의 발가벗은 자의식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광대 뒤에 숨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양가적인 자의식을 세상에 대해 전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가는 199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1999년(71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사후 첫 전시로 죽음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다. 그는 위대한 천재화가이기 이전에 타고난 표현주의의적 인간이었고, 비극적 영혼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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