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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 흩어진 주체, 해체적 주체, 경계 위의 주체, 그러므로 불안정한

고충환

이지수/ 흩어진 주체, 해체적 주체, 경계 위의 주체, 그러므로 불안정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에 대한 그림이라고 했다. 기억이라는 모호한 형태의 이미지를 기록한 것이고, 왜곡된 기억과 부정확한 개념을 옮겨 그린 그림이라고도 했다. 자신에 대한 그림이고 자신을 그린 그림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자기 반성적인 회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스스로를 대상화 객체화 사물화한 것이다. 그렇담 작가의 그림은 자화상이고 초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화상이며 초상화와 관련한 선입견을 따르자면 사물대상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충실한 재현이 기본인데, 한눈에도 작가의 그림은 재현적인 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담 그림 어디에 작가는 있는가. 무슨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작가는 그림 속에 자신을 숨겨놓기라도 한 것인가. 작가는 그림 속에 숨어있다기보다는 흩어져 있다. 산발적인 주체, 해체적인 주체, 경계 위의 주체로 흩어져 있다. 가변적인 주체, 비결정적인 주체, 이행하는 주체로 흩어져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리어왕의 절규에서와도 같은 다중주체, 누구라도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누구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익명주체에 가깝다. 
다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에 대한 그림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림 속에선 다만 최소한의 실루엣의 형상이 서성거리는 정황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서성거린다? 여기에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표정을 볼 수가 있다면 아마도 그 표정은 무표정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익명적인 사람들이며 무표정한 사람들이 서성거린다. 서성거린다는 것은 행동 이전의 행동, 행위 이전의 행위의 잠정적인 경우로 자기를 묶어두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신을 그린 것임에도 정작 자신을 알 수가 없다. 어쩜 처음부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담 그렇게 자신을 그리다보면 마침내 자신을 알 수 있게 될까. 자크 라캉은 주체는 없다고 했다(사실은 너무 많은 주체를 그렇게 표현한). 질 들뢰즈는 주체를 다만 허명이며, 그저 주체라고 부르는 막연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그리면서 실체도 없는 주체의 허명(혹은 자기라는 허명)을 좇는다. 그리고 그렇게 실존주의적 자의식, 존재론적 자의식, 정신분석학적 자의식을 그린다. 그건 비록 작가 개인을 그린 것이지만, 보기에 따라선 동시에 저마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다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자신을 그린 그림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개념은 부정확하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이런 부정확한 자기라는 개념을 옮겨 그리기 위해 개발된 것일지도 모른다. 드로잉적인, 대략적인, 암시적인, 그리고 어쩜 즉흥적인(아님 오히려 즉발적인?), 그리고 어느 정도 우연적인 그림 그리기가 자기라는 부정확한 개념에 정확성을 더해줄 것이다. 주체라는 애매한 실체에 실감을 되찾아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면 수술 장면 같기도 하고 죽음연습 같기도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꽃인지 수술도군지 알 수가 없는 리허설(연극인가? 아님 삶을 연극에 빗댄 상황극? 삶의 축도?), 미스터리한 얼굴(타자감정? 아님 자기반성적인 경향성?), 호수 한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은 듯 떠있는 부유하는 마음(심리적인 풍경? 정신분석학적 아님 정신 병리학적 풍경?), 문자와 기호와 같은 언어를 빌린 토로(내면의 소리? 독백? 너무 시끄러운 침묵?), 계절이 바뀜에 따라 해체되고 재편되는 얼굴(아님 사물초상?)을 그린 마인드스케이프, 춤추는 나무, 숲속의 산책자와 연인들, 그리고 숲속에 부는 그러므로 어쩜 사실은 작가의 마음속에 부는 바람소리, 그리고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친애하는 이름(친애하는 이름? 세계를 명명하는 자? 김춘수의 꽃?)과 같은 그림이 표현적이고 상황적이고 해체적이다. 내면을 외화한 것이란 점에서 표현적이고, 삶을 축도한 것이란 점에서 상황적이고,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주체를 표출한 것이란 점에서 해체적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내면풍경을 표현한 경우로 보인다. 그 전형적인 경우가 호수다. 여기서 호수는 말할 것도 없이 내면의 정경을 표현한 것이며, 무의식적 자기, 억압된 자기가 고이는 호수, 때론 기억이 그리고 의식이 흐르는 호수를 표상한다. 그렇게 내면풍경이 호수에서 숲으로, 춤추는 나무로, 숲속을 거니는 산책자로, 숲에서 부는 바람으로 변주 확장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풍경이 이미지 대신 문자와 기호와 같은 언어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다. 바람소리와 같은 소리 말을 차용한 경우와, 아마도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을 반추상적인 언어기호를 차용한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이미지 중심의 회화에서 일종의 문자그림으로 확장시키고 있는데,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문자의 변용에 바탕을 둔 이미지 시 혹은 시적 이미지즘과의 상호영향관계를 엿보게 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의미론적인 관심사를 표출한 경우다. <친애하는 이름>이 그런데, 창작이란 결국 세계를 명명하는 일이고, 세계를 부르는 일이며, 이로써 결국 오리무중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임을 예시해준다. 여기서 세계를 부른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단순한 호명행위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 바깥에 있던 것을 의미의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의미로 구축된 세계 그러므로 의미론적 세계)를 건축하는 행위일 수 있다. 기왕의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이름(그리고 개념)을 매개로 궁극에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행위로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한 또 다른 한 가능성으로 볼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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