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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훈/ 깨지고 터진,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

고충환

이세훈/ 깨지고 터진,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


여기에 이빨 빠진 머그잔이 있다. 게다가 살짝 찌그러져 있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마시는 데는 문제가 없다. 머그잔의 기능에는 부합하지만 머그잔과 관련한 상식과 합리적 형상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을 대변해줄 상징과도 같은 이 이 빠진 머그잔을 그렇다면 작가는 왜 만들었을까. 이 의도적인 미완, 이 계획적인 실패(?)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의 작업은 상식과 합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식과 합리가 뭔가. 누가 상식과 합리를 정의하는가. 롤랑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렇게 알고 보면 문화도, 미적 관습도 이데올로기 아닌 것이 없다. 사회가 용인할 만한, 공적 영역의 바운더리를 설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 긋기가 상식이고 합리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건 어쩜 모든 개별성을 말살하는 제도의 기획이다(인정하기는 싫지만, 제도의 유토피아는 모든 개별성이 말살된, 도구화된 효율성으로 추동되는 마치 군대와도 같은 사회다). 어떤 개별 어쩜 모든 개별은 범주화되지도 보편화되지도 개념화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범주와 보편과 개념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지정학적 위치는 바로 그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경계 위에 있고, 그 경계에서의 형식실험을 통해 모든 범주와 보편과 개념을 항상적으로 재설정하는 것(그러므로 예술은 불안정하다)에 예술의 존재의미가 있고 실천논리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쩜 의도적인 미완을 매개로 완성의 의미를 재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말년의 미완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현대적으로 보이고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인다. 그때와 지금의 미적 관습이 다른 것이고, 완성의 개념이 달라진 것이다. 작가의 작업도 그럴까. 적어도 기획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개념의 재설정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의 작업은 세라믹이다. 재료와 기법을 전용했을 뿐 사실상 도조다. 세라믹 재료와 기법을 전용한 조각이다. 세라믹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합치되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특수성이 있고 아이덴티티가 있다. 소성 후 표면의 유약을 갈아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수행하면서 작가 고유의 형태를, 질감과 색채를 만든다. 
그 중 형태를 보자면 대개는 좌선하는 불상과 나한상, 그리고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멀쩡한 것이 하나 없다. 하나같이 깨지고 터진 형상들이다. 팔 한쪽이 떨어져나간, 어깨 죽지가 깨진,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형상들이다. 여기에 이목구비도 분명치 않은 것이 두루뭉술한 동자승이나 석상을 보는 것 같다. 깨지고 터진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명상 수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내면을 투시한다는 것이며,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자아(어쩜 불교의 진아)와 만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이중 분열되는데, 외면적 정체성이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내면적 정체성이 아이덴티티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란 어원에서 왔다.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 제도적 주체, 타자가 욕망하는 주체,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주체다. 그 주체가 가면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를 본적도 볼 수도 없다. 나, 그러므로 어쩜 진아는 언제나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 진아를 투명하게 대면한다는 것, 그것은 페르소나에 가려진, 억압된,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데가 한군데 없는 또 다른 나와, 그러므로 어쩜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경험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자기 반성적이다. 불교의 면벽수행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끊임없이 똑같은 물음을 묻는다. 명상 수행하는 사람을 끝도 없이 반영하는 거울 방이 이런 자기 반성적인 경향성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그러므로 종래에는 대긍정에 이르고 싶은 존재론적 욕망을 표상할 것이다. 궁극에는 그 욕망마저 무화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어떤 경지며 차원을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주체며 실존적 자아는 온통 깨지고 터진, 성한 곳이 한군데 없는 상처투성이다. 형태가 그렇고, 표면질감을 갈아내는 과정에서 유래한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그렇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그렇다. 상처를 내재화한 존재, 그러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한 침묵의 소리며 내면의 소리를 응축한 존재를 표상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엔 파토스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면서도 격렬하지는 않은데, 동작을 억제하는 최소한의 형태가, 자기 내면을 향해 열리는 응축된 형태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무슨 표정을 표현했다고 보기가 어려운 무표정한 표정, 그러므로 어쩜 관조적인 표정이 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시종 <침묵의 소리>를 주제화한다. 바로 자기 내면의 소리, 심연의 밑바닥에서 진아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그 귀 기울임을 작업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자기 개인의 내면적 성찰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인간의 존재론적 성찰과도 통하는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얻는다. 특히 인간실존의 실체를 다름 아닌 상처로 보는 것이 공감을 얻는다. 
한편으로 이처럼 깨지고 터진 형태, 비정형의 스크래치, 그리고 얼룩덜룩한 색채감정이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상처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 시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자기 속에 오랜 시간을 머금고 있는 부장품이며 발굴된 유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심연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비의(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은 알고 보면 상처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를 발굴하고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외화 하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와 대면하게 해주는 작업의 주제의식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잊힌 자기며 아득한 자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기 위해 시간을 차용한다. 전통적인 목가구로 좌대를 대신한 것이다. 그 꼴이 무슨 골동처럼도 보이고, 부장품처럼도 보이고, 그 자체 시간의 화신처럼도 보인다.  

작가를 특집으로 다룬 매체가 빼 올린 타이틀이 흥미롭다. 깨고 깨는 조각가다. 멀쩡한 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는 조각가며, 이로써 궁극에는 자기를 깨는 조각가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이 분명해졌다. 굳이 멀쩡한 조각을 깨트리는 작가의 무모한(?) 행위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자기며 인간실존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종래에는 거짓 자기를 깨트려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나지는 기획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대개 독립조각을 깨트려 상처를 표현하지만, 때로 온통 깨지고 터진 조각조각들을 하나의 철망 케이지 속에 넣어 집적한, 그 위에 토르소를 얹은, 그래서 불완전한 것들의 몸통으로 축조된 또 다른 실존적 인간을 예시하기도 한다. 
질 들뢰즈는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것에 예술의 특수성이 있다고 했다. 굳이 들로즈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창조적 파괴에 대한 진술은 많다. 상식과 합리로 굳어진 것들(롤랑 바르트라면 독사 doxa라고 했을)을 깨트려 재설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편화되지 않는 개별들을 구제하고, 의미화를 거부하는 선의미들을 발굴하는 것에서 예술의 당위성이며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다. 침묵의 소리라는 주제도, 온통 깨지고 터진 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실존적 인간 군상도 이런 예술의 설천논리에 부합한다. 작가의 말처럼 의도적인 파괴로 새로운 창조적 울림을 만들어낸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깨지고 터진 구멍들이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아님 차라리 증명)하는 상처처럼도 보이고, 자기가 깨지는 각성의 계기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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